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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명이 '김'씨인 사회

[박동천의 집중탐구]<53>국민과 민족

제5부 민족주의: 집단생존 프레임
제5장 국민과 민족


일본어에서는 민족국가라는 용어보다는 국민국가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민족이라는 단어에 인종적인 뉘앙스가 불필요하게 섞이기 때문에 아예 nation이라는 서양어를 "국민"으로 옮겨버리자는 얘기다. "국민"이란 이미 단어 안에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자연적 인종적 혈통적 원형집단을 떠올릴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한국어에서도 일본식으로 네이션(nation)은 "국민"으로 옮기고, "민족"이란 종족집단(ethnic group)을 가리킬 때에만 사용을 국한하자는 주장들이 꽤 있다. 중국의 소수 "민족", 미국이나 러시아에 사는 한국 "민족",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의 애보리진이나 마오리 "민족"을 생각하면, 그리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다민족국가"라고 부르는 용례를 생각하면 상당히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차피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인종적 함의는 상징적인 수준을 넘을 수가 없으며, 서양어 네이션도 혈연적 공통성을 표상하는 의미가 있으므로 "민족"으로 옮겨야 맞다는 입장도 있다. 나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 "국민"이라는 말은 국적을 가진 시민을 가리키는 말로서, 누가 어떤 나라의 국민인지 아닌지를 기어이 가리고자 한다면 법률적인 판단에 의뢰해서 그 결정을 집행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한다. 즉, 누가 어떤 나라의 국민인지는 기어이 분별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면 국가의 강제력으로 결정이 내려지는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국민"이라는 말은 단순히 현실에서 실효적으로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룩하고 있는 단위를 지칭하는 데 그친다.

네이션을 "국민"으로 옮기고, "민족"이라는 단어는 지금 "종족집단"이라 불리는 대상들에게만 국한해서 쓴다면, 예컨대 지금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국민"이 되고 한국계로서 미국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민족"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중국의 조선족이나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그런 경우 "한민족"에 속한다고 봐야 하나 속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나? 한반도에 존재했던 정치공동체 가운데 한(韓)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고대의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1897년의 대한제국, 1919년의 대한민국, 1948년의 대한민국뿐이다. 네이션을 "국민"으로 옮겨야 한다는 입장을 적용하면, 1897년 이전에 조선의 국민 가운데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국적이 바뀐 순간부터 중국이나 러시아의 "국민"이 된다. 하지만 "민족"으로서는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들을 "한민족"이라고 부르기는 매우 곤란하다. 그들은 단 한번도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을 고대의 삼한에 근거해서 "한민족"에 넣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대부분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살던 조선 국민의 후예들인 반면에, 삼한은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북한강 이남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형성이나 구성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 여기서 결론을 추구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네이션을 "국민"으로 옮겨야 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얕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를 지적하기 위해서, 그런 발상이 간과하는 무수한 사항 중 하나를 드러내봤을 따름이다. 그 발상에도 일리는 없지 않다. 네이션이라고 하면 종종 인종적, 혈연적, 문화적 공동체가 정치적 공동체에 앞서서 있어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런 자연적 공동체를 사실은 찾아내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자연적 공동체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국민국가"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취지를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발상은 "민족"이나 "종족"이라고 해도 다시 정치적 공동체의 존재에 의존해서 정체가 규정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민족국가"라고 하더라도, 애당초 "민족"이라는 것이 국가의 존재라고 하는 바탕 위에서 형성되는 상징임을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 그리고 한국인을 바라보는 외부자들의 감각에서 "한민족"이라는 집단의 정체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뿐만 아니라 "한"이라는 글자를 국호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는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존재에 의존하는 만큼이나, 과거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에도 의존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강역에 속했던 인민(즉, 현재 논의의 주제인 어법에 따르면 "국민")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이해하는 프레임이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있었다면, 그 프레임은 또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뿐만 아니라 고려, 발해, 삼국, 삼한, 고구려 등등,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과거의 정치적 경험에도 크게 의존해서 축조된 결과이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민족국가"로 지칭하는 말투에는 이처럼 현재의 정치공동체가 과거의 정치적 경험과 (상당히 느슨하고 모호하게) 정서적으로 연관되는 상징의 끈이 포함된다. 반면에 대한민국을 하나의 "국민국가"라고 부르게 되면 그런 끈이 모두 언어의 표면에서 추방되고, "국민"과 "국가" 사이의 앙상한 동어반복만이 남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물론 국민도 역시) 상징적인 실체임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현재 인구 4800만 명, 그리고 고조선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데 묶어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 사이에 어떤 인종적 혈통적 공통성이 대내적으로 정합적이며 대외적으로 배타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면 물화(物化), 즉 우상숭배가 발생한다. 하지만 역으로 그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민족"이라는 상징이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퇴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같이 강대국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그런 나라들이 개인의 가치보다는 국가적 (즉, 민족적) 위신을 중시하는 현실이 대한민국의 여건인 만큼, 이 나라의 민족주의는 남과 북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물론이고 통일된 다음에도 오랫동안 인민의 정치의식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한민족이라는 상징이 결코 영원불변은 아니지만, 단기간 내에 몇 사람의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퇴색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그것이 상징인 만큼 그것은 가변적이며, 현재 한국 민족주의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는 물화 및 거기서 다른 영역들로 전이되는 사유 프레임의 폐색현상은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다. 이것은 충분한 수의 상식인들이 스스로 그 폐색의 문제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의외로 단기간에 고칠 수 있는 문제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로이터=뉴시스

앞 장에서 미뤄뒀던 논제, 한 사회의 인구 98%가 동일한 종족 정체성을 고백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일인지가 방금 언급한 깨달음을 위해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우선 보통 한국인들이 느끼듯이 "단일민족"이 순수혈통이고 따라서 잡혼의 결과인 "혼혈"보다 깨끗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아주 안목이 좁고 편협한 사람을 제외하면 "혼혈"을 더럽다고 공언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잉글랜드계 미국인 모친과 케냐인 유학생 부친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모친이 재혼한 계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 가서 초등학교를 다닌 인물이다. 미국에서 이 사람의 혈통을 "더럽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보통 "인종주의자"라고 불리며 사회적으로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다.

순종이니 잡종이니 하는 표현을 문명사회에서는 사람에게는 쓰지 않고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서만 쓴다. 물론 까만 머리에 검은 눈동자 납작한 코를 가진 사람이 금발에 푸른 눈동자 오똑한 코를 가진 사람과 만나 연애를 하거나 결혼한다는 것은 익숙한 일은 아니다. 뭔가 넘을 수 없도록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도 무리가 아니고, "종자"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별로 자랑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물며 한 사회의 인구전체에 관해서 "순종"이기 때문에 "잡종"보다 깨끗하다는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미개한 탓으로 배배꼬인 무지와 편협하기 짝이 없는 옹고집일 수는 있겠지만, 자랑스러운 일과는 오직 정반대밖에는 아닐 것이다. 앞장에서 인용했듯이, 유엔인종차별위원회의 보고서에서 "순수혈통"과 "혼혈"을 구분하는 습관을 가장 우려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이 문제는 단순한 혈통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가계혈통에 관해 "같다"와 "다르다"의 경계는 결코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습적으로 어떻게 정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성씨가 280여개가 있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혈통이라고 믿는다. 단군의 자손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텐데, 우리는 "단군이 민족의 조상"이라는 문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도 많다. 이 주변에서 굉장히 강력한 획일주의의 사유형식이 작용하며, 아울러 차이와 이견을 억압하는 사회적 압력의 존재를 읽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기독교도들에 대해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비기독교들은 한국에 적지 않다. 대통령이 말실수는 물론이고 "10년 내 세계 7대 우주강국" 따위 화려해 보이는 소리를 해도 코웃음으로 넘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김씨 성 가진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꼴을 넘어 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할 때, 그들이 어떻게 모두 한 명 또는 두 명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천만 명이 같은 성씨를 가지고 산다고 할 때, 내 마음에는 모든 집안에서 족보를 챙기기 시작한 최근 2-300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김씨 족보로 끼어들어갔겠느냐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인구 4800만 명 가운데 김, 이, 박, 최, 사대 성씨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씨까지 10대 성씨를 합하면 64%에 이른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이 혈통적으로 균질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수준으로 집단적 획일성에 순응하며, 인습적인 사고에 대해 도전하기가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적으로 부담스러움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본관이나 파가 갈라진 것을 보면, 김씨 천만 명이든 이씨 680만 명이든 박씨 390만 명이든 전혀 균질한 혈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가령 박길수에게 부모가 있을 것이고, 그럼 조부모는 4명이 있을 것이며, 증조부모는 8명일 거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그의 10대 조상은 2의 열제곱 즉, 1024명이 된다. 그 1024 명 가운데 박씨가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하겠지만, 나머지는 전부 박씨가 아닌 경우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 파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 만큼 모두 성씨를 다르게 쓰고 있다면 수 만 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10대 조상 1024명의 성이 모두 다른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만주나 중국계가 500명 쯤 되고, 일본계가 300명쯤 되고 나머지 200명이 한반도의 토착 혈통이라고 해서 혈통의 균질성이 특별히 손상될 까닭은 내가 보기에 없을 것 같다.

이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한족은 현재 인구가 약 13억으로 세계 인구의 20%에 육박한다고 한다 (☞ 바로가기). 중국정부가 56개로 분류한 "族群" 중 최대로, 중국 본토에만 12억여 명으로 중국 인구의 91.9%를 차지한다. 우리는 보통 중국의 "족군"을 "소수민족"이라고 번역해 부르지만, 한족을 소수라고 볼 수는 도저히 없어서 어떤 사람은 중국에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략적으로 중국 내 한족의 인구와 그들이 영유하는 땅의 면적(967만㎢)은 유럽의 인구(약 7억 3000만 명)와 면적(1018만㎢)에 비견할 만하다. 역사 역시 엇비슷하게 오래 되고 복잡다단하다. 그런데 한족은 하나의 민족 또는 종족이라고 말할 수가 있지만, 유럽 전체의 인구를 그렇게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유럽의 경우는 7억여 명의 인구 가운데 흑인이나 아시아계는 다 빼고 순전히 백인들만이 남더라도 하나의 민족이라고 부르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반면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나머지 55개 "족군"들이 없이 순전히 한족으로만 구성된다면, 한국에서 "단일민족"을 강하게 신봉하는 사람 중에는 중국도 "단일민족"이라고 부르고 싶을지 궁금하다.

민족이란 하나의 개념적인 범주로서 수천만 명이나 수억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집단이라면 당연히 내부에 인종, 종교, 혈통, 문화, 습속, 사상, 가치 등에서 대단히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양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굳이 정치적인 구획을 통해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정치적인 구획은 바로 단일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민족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굳이 "단일"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다.

한편 모든 사회는 종족을 분류하는 통계적 습관을 가진다. 이때 분류는 대개 각 개인이 스스로 어떤 종족에 속하는지를 물어서 이뤄진다. 대개는 한 종족집단이 80-90% 이상의 주류를 차지하고, 기타 소수 종족들로써 구성된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한국은 주관적 정체성에서 주류로 나타나는 집단의 비중이 98%에 달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으로 특이하다. 대한민국을 단일민족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은 이 차원을 중시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단일성"이란 2%에 달하든 아니면 정말로 수십 명에 불과하든, 소수의 존재 자체를 묵살하고 뭉개버리는 효과를 은연중 자아내기가 쉽다. 사실은 대한민국의 경우 2% 외국인 체류자뿐이 아니라, 종족적 주류에 해당하는 98% "한국인" 내부에도 무수한 갈래의 종족적 다양성들이 없을 리 없건만, 순수혈통을 숭배하는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풍조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묻혀버렸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회는 종족적으로 균질한 사회이기에 앞서, 종족적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제 바로 이 획일성에서부터 한국 민족주의의 과잉이 정치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을 비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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