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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변희재를 탓하는 당신도 '듣보잡'이 될 수 있다"

[기고] '듣보잡' 현상과 진보의 위기

광장의 열기를 일상에서 견고하게 만들어야

"혹시 인원이 적으면 어떡하지, 경찰은 차벽을 쌓았을까,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지난 6월 10일 저녁, 2호선을 타고서 서울시청으로 향한 길에 오만가지 걱정을 했던 필자의 다급함은 서울시청에 도착해서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보고서는 이내 사라졌다. 여전히 시민들은 작년의 촛불을, 1987년의 눈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달라진 점도 있었다. 지난해 촛불집회의 동기가 '미친 소'라는 의제가 압도적이었다면, 올해 6·10 집회에서는 현 정권을 겨냥한 총체적인 비판과 더불어 쌍용자동차, 한국예술종합학교, 용산 참사, 대운하, 광장 조례 등의 다양한 의제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공존하였다.

흥겨운 집회의 공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 11시가 지나 야당 의원들이 빠져나가면서 경찰들이 서울광장과 도로에 있었던 시민을 삽시간에 도로 밖으로 내몰았다. 추측컨대 작년 촛불 집회의 학습 효과로 경찰국가 한국의 경찰들은 시가지에서 사회운동을 저지하는 반복 훈련을 받았던 거 같다. 만약에 이날 집회 참여 인원이 작년 6월 10일처럼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촛불로 가득 찼더라면 경찰들의 진압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인원에 대한 아쉬움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논쟁적인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하자. 그래서? 그래서 뭐가 해결되는데?"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선천성 난청증 걸린 현 정권과 소통하길 원하는 시민들은 벽에 부닥치고 있다. 그렇다고 거리의 정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광장과 거리에서 시민들은 쌍용자동차, 운하, 용산 참사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양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 소통의 공간은 정당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훌륭한 토양으로 일궈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장에서의 소통의 열기를 어떻게 "광장", "거리"라는 제한된 지리적 규모를 넘어서 어떻게 현 정권의 '소통 불가능성의 지속 가능성'을 제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가다. 앞으로도 현 정권의 임기가 끝날 때 까지 막차를 놓치는 불편함과 다음 날의 피곤함이 반복되겠지만 광장과 거리의 정치는 지속될 것이고 지속되어야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앞서 반문했던 "그래서?"로 돌아가 보자. '집회 그래서 집회 그래서 집회 그래서…'의 순환 고리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전략인가?

광장의 한복판에서 목청을 높이다가, 순식간에 덕수궁 앞 인도 앞에서 로보캅 복장을 한 전경들을 멍하게 마주하게 되면서 무기력함을 느낀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는 시적인 문구를 남긴 바 있다.

이 문장은 혁명을 통하여 지배 계급(견고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서 복잡해진 정치·사회 구조 속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이 문장은 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해 던져진 물음표이기도 하다.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견고하게 할 것인가?"

▲ 6월 10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는 쌍용차, 용산 참사, 운하 등 갖가지 사회 의제를 놓고 온갖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런 광장의 열기를 어떻게 공고화할 것인가? ⓒ황진태

'듣보잡' 현상의 교훈?

'듣보잡'이라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용어가 짐짓 인터넷과 멀어 보이는 교수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에 따르면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을 일컫는다. 이 용어의 확산 원인은 진중권과 변희재 간의 논쟁에서 진중권이 변희재를 '듣보잡'이라고 딱지를 붙이면서 확산되었다. 그간 공개적으로 변희재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게 껄끄러워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이번 '듣보잡' 현상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현재 수많은 보수단체의 완장을 차고 있는 변희재는 사실 '듣보잡'이라고 하기에는 인터넷 토론 바닥에서는 유명한 논객이었다. 1990년대 후반 논객사관학교로 알려져 있던 <대자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인물과사상사에서 대중문화 관련 서적을 출간했었다. 2002년 대선 기간 동안에는 당시 노무현 후보의 진지였던 인터넷 토론 사이트 <서프라이즈>의 필진으로 활동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촉망받는 논객으로 주목받았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 <서프라이즈>를 나와서 <시대소리>를 창간했었다. 필자 또한 2003년부터 <대자보>와 <시대소리>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대자보> 사무실에서 변희재를 가끔 만났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후 변희재는 안티조선 논객에서 조선일보 논객으로의 변신을 하였다.

변희재의 전향에서 대해서 그간 언급할 기회가 없었지만, 예전부터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한 바로는 논객으로서 변희재는 이념적 토대에 근거하기 보다는 각각의 상황에 적합한 맥락들을 빠른 시간 안에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이슈화하는데 재능이 있는 감각적인 글쓰기에 능한 인물이다.

변희재의 이슈화를 위한 감각적 글쓰기가 이념적 토대에서 벗어나서 '변희재' 그 자체를 이슈화하고자 나서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는 포털 공격,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등등으로 종횡무진 '감각적 활동'에 나서며 변신에 성공했다.

갑자기 광장의 정치를 이야기 할 참에 왜 변희재를 끄집어냈냐며 반감이 생길 독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은 잠시 제쳐두고, 이 글에서는 이 두 고리가 서로 연결된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시작해서 이슈 제기에 능했던 진보진영의 한 젊은 논객이 하루아침에 보수 그것도 극우매체의 논객이 된 사건을 개인 하나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변희재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겠지만 변희재의 '감각적 활동'을 통해 얻은 수많은 완장들은 역으로 그 많은 완장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도 된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깨놓고 말해서 진중권과 같은 예외적인 스타 논객을 제외하고는 이 바닥에 있는 글쟁이들은 생계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평소 진보진영이 대안이 없다고 쉽게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과 함께 진보진영에서 정책을 구상하고,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했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그러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었다고 생각한다.

변희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감각적 활동'을 추구했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지만 내 생각에 그가 했던 매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수익 창출을 이끌어 냈다면 그 정도의 초월적 행보는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예측한다. 변희재와 같은 사회의제에 포괄적이면서 의제 포착 능력이 뛰어난 논객들이 활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매체가 있고, 사회의 중요한 이슈별로 전문분야를 전공한 소장학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연구 공간이 마련된다면 진보 진영의 정책 역량은 상당히 강화될 것이다. 언제까지 진보매체들도 예외적 천재인 진중권의 '입' 하나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창피하기도 하지만 이는 필자에게도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2003년 <대자보>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여러 매체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이러한 활동이 딱히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현재 필자의 나이 스물여덟. 88만원 세대, 실업자 범주에 잡히지도 않는 일개 대학원생이다.

미국에서 대학원생은 극빈층에 속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고작 할 줄 아는 것은 글을 읽고, 쓰는 것 밖에 없다. 시민단체에 한 푼이나마 회원으로 가입하여 돈을 매달 낼 능력도 못돼서, 글이나 쓰면서 대운하를 비판하고, 서울시정을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글을 쓸 때 소속으로 밝히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이란 직함은 어디까지나 '객원'이고, 연구소로부터 그 어떤 물적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본적인 연구원이 지향하는 바에 동감하고, 미약하나마 직함으로 연구소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회비 대신에 글로써 회비를 내는 꼴이다.

그간 필자가 <프레시안>과 다른 매체에서 실명을 언급하면서 운하와 함께 현 정권을 비판한 글들과 논문이 앞으로 학계에서 학자로서의 미래에 얼마나 장애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이든 이명박 정권이든 그 시대를 안고 가는 사람으로서 소박한 책임감으로 마땅히 펜을 들 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20대 논객인 아흐리만 한윤형과 김현진이 그러하며, 정권을 가리지 않고 날카로운 필봉을 겨누고 있는 <프레시안> 기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속 시원하면 그걸로 "땡!"인가?

위기의 희망제작소는 진보진영의 위기를 가리킨다

소장학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내 후배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은 월급이라도 주면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 말은 결코 낭만적인 빈말이 아니다. 그간 대운하 비판을 하면서 알려진 필자한테도 6월 10일 아침에 한 선배가 국토연구원에서 경인운하 프로젝트에서 GIS(지리 정보 시스템) 관련 1년짜리 위촉연구원을 뽑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자를 보내 왔었다. 운하 비판을 해왔던 나까지도 그 운하 프로젝트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누구든 '듣보잡'이 될 수 있는 덫 아래 놓여있다. 절묘하게도 어제 시청 앞 거리에서 녹색연합이 만든 경인운하 반대 현수막을 보면서 요즘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유행어가 떠올랐다.

"이거 왠지 씁쓸하구먼…"

6월 3일 <경향신문>에는 위기의 '희망제작소'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역 활성화와 소기업 발전 운동에 앞장선 시민참여 연구소 '희망제작소'가 위기에 처했다. 창립 3년째를 맞은 올해 들어 정부와 기업의 협력 사업이 잇따라 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00여 명의 개인 후원으로 단체를 꾸려가고 있지만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이 때문에 희망제작소는 지난 4월말 사무실을 종로구 수송동에서 평창동으로 이전했다. 월세 부담금을 절반쯤 줄인 것이다. 또 지난해 말쯤부터 전체 인력의 절반에 달하는 40여 명의 연구원이 희망 퇴직이나 휴직을 하는 방식으로 연구소를 떠났다."

대표적인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의 사정이 녹록치 않은 지경이 되었다. 박원순 변호사라는 시민운동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개인 후원이 2000여 명에 불과하다니 나머지 민간연구소 사정은 말할 것도 없겠다. 희망제작소는 설립 초기에 삼성으로부터의 후원을 받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치른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비판과 더불어 이 연구소가 재벌의 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운영이 가능하도록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10명의 회원이 1명의 연구원을 책임진다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운영방식을 상기한다면 결국 국가, 재벌 등의 지배 세력들로부터 독립적인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돈으로 연구소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 모순에서 벗어나서 자립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필자가 너무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냈는가?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서 진보진영은 대안이 없다는 비판은 비판이기보다는 비난에 가깝다. 처음에 던졌던 화두를 다시 꺼내보자.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견고하게 할 것인가?"

광장의 정치를 우리만의 축제로 끝날 게 아니라 난청증에 걸려 있는 현 정권의 견고함을 대기 중으로 증발시키고자 한다면,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실천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변희재와 같은 사례를 '듣보잡'이라고 희화하하며 예외적인 사례로 단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주변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포부와 무관하게 생계를 이유로 변경하려는 침묵하는 '듣보잡'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아니 운하를 강하게 비판한 필자조차 운하 관련 프로젝트에 위촉으로 들어갈 당의정의 유혹을 받고 있지 않은가!

6월 10일의 집회에서 경찰들로 인하여 광장의 의사소통 공간이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느꼈을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어깨에 지고서 집으로 돌아간 시민이라면 시민단체나 민간연구소에 회원 가입을 하여 회비를 지원하든 인터넷신문에 자발적 구독료를 냄으로써 그러한 허무함을 이겨냄으로써 먼 길이겠지만 하나의 대안을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촉망받던 한 젊은 논객의 전향은 진보진영에게 희극에 가까운 비극이다. 하지만 광장을 넘어서 일상적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희극조차 허락되지 않는 철저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듣보잡' 현상이 한국 사회에 던져주는 교훈이다.

정정합니다!

내용 중에 "<시대소리> 폐간"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확인 결과 <시대소리>는 현재도 운영 중입니다. 본문의 해당 내용은 수정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시대소리> 관계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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