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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뉴딜을 알아?"

[미국의 뉴딜과 MB의 녹색뉴딜①]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혁명, 뉴딜

세계경제 위기가 실물경제로 전이된 가운데 각국 정부는 다양한 정책처방을 실행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8일 연계된 사업들까지 포함하면 총 22조에 달하는 '4대강 살리기' 사업비를 확정, 발표한 것도 소위 '녹색뉴딜'이라는 이명박식 경기부양책의 일환이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국책사업이 될 '4대강 살리기'를 포함한 이명박 정부의 녹색뉴딜은 정책 방향과 효과 등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과연 '뉴딜'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냐는 것이다.

코리아연구원(www.knsi.org)과 <프레시안>은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미국 대공황기 및 오바마의 경제위기 정책처방에 대해 살펴보고, 이명박 정부의 녹색뉴딜과 비교분석해 한국의 지속가능한 경제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기획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코리아연구원은 통일외교안보 및 사회통합 문제에 대한 정책대안 제시를 목적으로 설립된 네트워크형 싱크탱크다. 편집자


필자의 뉴딜 공부는 일천하다. 제대로 역사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뉴딜을 이해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런 필자가 뉴딜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다만 경제사학자들이 다루지 않는 주제를 통해 뉴딜을 바라본다는 특색이 있어, 때론 조그만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공부가 모자라 부끄럽지만 소개 글을 쓰고자 한다.

Ⅰ. 나에게 뉴딜은 무엇인가?

필자가 뉴딜을 공부한 계기부터 남다르다. 경실련의 재벌개혁위원장을 하면서 재벌개혁을 주장하던 차에 한번은 서로 이해도를 높이고자 재벌 계열사 고위 임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고위 임원은 역사적 사실을 크게 곡해하고 있었다. 선진국들은 한국처럼 국가가 재벌에 대해 인위적으로 제약을 가한 적이 없고, 시장이 발전하면서 저절로 소유지배가 왜곡된 형태의 재벌과 같은 기업집단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재벌에 대한 규제는 역사적 사례가 없는 비합리적인 한국적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 재계 주변의 학자들이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 알 만 했다. 그런 한국 재계 임원들의 실상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막상 따져보니 그 임원들 탓만 할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선진국에서 거대한 기업집단을 어떻게 해체했는지를 소개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외국에 의해 강제로 해체된 독일과 일본의 경우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어떻게 대기업집단을 해체했는지를 소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뉴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뉴딜 공부로 인해 나름대로의 식견을 갖게 되자 이번에는 뉴딜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명박 정부에서 뉴딜이 뭔지도 모르는 채, 루스벨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정부에서 뉴딜을 들고 나왔다. 답답하다.

그런 가운데 뉴딜에 관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스스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뉴딜이 엉터리라면 나에게 뉴딜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동안 공부했던 뉴딜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뉴딜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루스벨트가 처음 뉴딜을 언급한 장소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Ⅱ. Happy Days Are Here Again

▲ 루스벨트의 정책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이명박 정부는 왜 뉴딜을 들고 나왔을까? 사진은 '4대강 살리기 기획단' 출범식 장면. ⓒ뉴시스
뉴딜을 공부하기 전에 'Happy Days Are Here Again'이란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 민주당의 집회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를 처음 캠페인에 사용한 사람이 바로 루스벨트다. 이 노래를 들으며 (인터넷 UCC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노래가 있다) 대공황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2년 7월 2일,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대회장으로 가보자.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루스벨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루스벨트가 전당대회장에 등장했다. (그 이후로 지명자가 수락연설을 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그는 대공황으로 인한 사태의 급박성을 감안해 하루라도 빨리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연설의 대가답게 장시간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감동적으로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한다.

"온 나라에서 지난 몇 년간 정부의 정치철학에서 잊혀진 선남선녀들이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이끌어줄 것을 요구하며, 국부(國富)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더 공평한 기회를 줄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장에서, 대도시에서, 작은 도시와 산골마을에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과거의 생활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망이 헛되어서도 안 되고,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미 국민을 위한 뉴딜을 약속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스스로 능력 있고, 용기를 갖춘 새로운 질서의 예언자가 됩시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무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그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성전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뉴딜은 새로운 질서를 위한 약속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무장을 요구했다(call to arms). 왜 그랬을까? 왜 그는 미국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성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to win this crusade to restore America to its own people) 라는 표현을 썼을까? 대체 어떤 새로운 질서기에 그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용어를 사용했던 것일까?

Ⅲ. 뉴딜은 새로운 질서를 위한 약속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다시 이 수락연설의 앞부분을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역사와 간단한 경제학을 살펴봅시다. 여러분과 저, 평범한 남자와 평범한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경제학을 말입니다. 1929년 이전에 이 나라는 건설과 인플레이션의 거대한 사이클을 지났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전쟁의 잔해 복구라는 명목으로 이 부문의 사업을 확장하였지만, 사실 그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의 자연스런 평소 성장을 벗어나는 수준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에 생산비가 상당히 떨어졌는데도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가격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기간에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윤은 가격 하락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비자는 잊혀졌습니다. 이윤의 아주 적은 부분만이 임금상승에 포함되었습니다. 근로자는 잊혀졌습니다. 적절한 배당금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주주는 잊혀졌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경제가 호황일 때 잊혀진 사람들이 있었다. 1920년대 경기가 좋을 때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얻었지만 소비자, 근로자, 주주는 망각되었다. 국가의 주인은 바로 이들인데 이들은 철저히 잊혀졌다. 앞선 수락연설문의 마지막에 다시 지적한 이들 잊혀진 선남선녀들(forgotten men and women), 과거 공화당 정부에서 철저히 잊혀졌던 이들이 이제 요구하고 나섰음을 지적했다. 부의 분배에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요구하고 있다고 천명하고 있다. 뉴딜은 새로운 질서를 위한 약속인데, 그 새로운 질서는 바로 이 잊혀진 사람들을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과 한판 전쟁을 벌여야 했기에, 그는 무장을 요구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여정은 전투 그 이상이었다.

Ⅳ. 뉴딜은 혁명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처음 뉴딜을 이야기했던 수락연설을 잠시라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뉴딜의 본질을 쉽게 알 수 있다. 잊혀진 사람들이 다시 주인이 되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는 정책이 뉴딜이었다.

뉴딜의 이런 핵심적 요소를 이해해야 뉴딜의 개혁입법을 이해할 수 있다. 루스벨트는 경제 민주화를 원했다. 힘없는 서민들이 힘을 합쳐서 힘센 경제권력과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제도를 정착시키기를 원했다. 1935년 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시 한 번 그의 명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 한때는 자기의 사업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던 사업자들이 매일의 식량을 위해 절망상태에서 매우 소수의 선심에 기대게 하는 권력의 집중현상을 되돌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소수는 지주회사와 같은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경제권력을 확보했습니다. 나는 정부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만큼이나 집중된 사적 권력의 사적 사회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사적 사회주의는 정부 사회주의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사적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부 사회주의를 피하기 위해 매우 필수적입니다."

루스벨트는 거대 기업집단에 의한 경제력 집중과 이에 따른 경제권력의 집중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경제가 관리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선심에 기대야만 하는 상황을 사적 사회주의(private socialism)라고 표현했다. 소수의 정치권력자가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정부 사회주의라면 소수의 경제권력자가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사적 사회주의라는 대비였다. 1935년 당시 유럽의 한쪽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주의 계획경제를 선택하고, 다른 쪽에서는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서민들에게 경제적 권력이 분점 되는 새로운 경제를 제안했던 것이다.

루스벨트가 일관되게 거대 기업의 탈법적 행위를 규제하는 반면 소비자, 노동자, 소액 주주들을 위한 입법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러한 뉴딜의 정신에 기반 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와그너 법(Wagner Act)으로 알려진 국가노사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이다. 최저임금제나 노동시간규제를 강화한 것은 물론 노동자의 조합결성권리를 대폭 신장했다. 재계는 이 법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이 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수백 개의 법안이 만들어졌으나 대통령의 거부권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1947년 태프트-하트리 법(Taft-Hartley Act)으로 알려진 개정안으로 인해 노동자의 권리가 제약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노동조합가입률은 1950년대를 정점으로 해서 점차 낮아졌다가 유럽국가에 비해 최저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만약 루스벨트가 추진한 대로의 와그너 법이 유지되었다면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Ⅴ. 루스벨트의 절제된 혁명

필자가 루스벨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의 상황이 바로 루스벨트 시대 미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과거 12년간 보수정부가 집권했던 탓에 국가 권력기관은 모두 보수적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개혁입법은 끝없이 대법원에 의해 도전받았다. 강력한 경제권력과 국가권력기관이 손을 잡고 루스벨트에 저항한 반면 그를 돕는 개혁가들은 수가 부족했다. 끊임없이 비판해 대는 언론을 빗겨가고자 그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노변정담을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고립무원인 상황이었던 그는 뉴딜을 성공시켰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냈고,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성공요인의 무엇일까? 공부가 일천한 필자가 현재까지 파악한 점은 이렇다. 첫째, 그는 철저하게 국민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다. 그가 수락연설에서 이미 새로운 질서를 밝혔지만 그는 무모한 개혁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첫 두해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구호와 부흥에 힘썼다. 그 결과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상하 양원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에 착수했다. 와그너법과 조세법 개정 등 가장 핵심적 개혁법안 들은 1935년 이후 추진된다.

그가 국민의 지지를 중시한 사례로는 이런 것도 있다. 1936년 재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후 그는 뉴딜 개혁입법에 대해 많은 위헌 판정을 내린 대법원을 바꾸려는 생각에 대법관의 수를 늘리는 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법안을 폐기했다. 미국인들은 루스벨트를 지지했고 비록 과거 보수정부에서 임명한 대법관들에 의한 위헌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것까지는 용납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주도면밀하면서 동시에 절제된 형식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대기업집단의 문제는 이미 1912년 윌슨대통령이 들어섰을 때부터 문제가 되었기에 당시 쉽게 규제책을 내놓을 수 있었지만, 1935년 백악관에서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하여 기업 간 배당에 대한 조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매우 유연한 정책을 채택했다. 지주회사를 해체하거나 부실기업이나 은행을 국유화하는 과격한 방식을 배제했다.

셋째, 처음 약속했던 뉴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일관성을 잃지 않았다. 1935년 세법 개정을 통해 기업 간 배당에 대해 과세하자 기업들은 배당을 하지 않으며 저항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기업의 내부유보이윤에까지 과세하면서 지주회사 해체의 의지를 천명했다. 비록 이 방안은 불필요한 규제라는 지적에 다음해 중단했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를 읽은 재계는 서서히 지주회사를 정리했다. 루스벨트는 뉴딜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때로 지지자들의 반대도 무릅쓸 정도로 강경했다. 소득세를 강화하는 안에 대해 뉴딜의 지지자였던 자유주의자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처음 주창했던 철학을 기반으로 해서 명확한 목표 의식 하에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하되,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해서 무리하지 않고 유연하게 혁명을 성공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Ⅵ. 루스벨트와 노무현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루스벨트는 거론하지 않았을까?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결국 진보개혁세력의 역량 부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사진은 지난달 29일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 장면. ⓒ프레시안
우리에게도 루스벨트와 유사한 목표 의식 하에 개혁을 추진했던 지도자가 있었다. 그 지도자가 링컨은 탐독하면서 루스벨트는 거론하지 않는 것에 항상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개혁을 이야기하면서 루스벨트는 거론하지 않았을까? 그는 루스벨트를 몰랐던 것일까? 뉴딜이라 하면 댐 공사 정도로 치부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피했었는지도 모른다.

참여정부가 끝난 이후 필자 나름대로 정리를 하다가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모자란 뉴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미국의 1920년대 사정을 들여다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1890년에서 1920년까지를 진보시대(Progressive Era)라고 부를 정도로 미국인들은 진보의 이상에 열광했다. 진보시대의 마지막 대통령은 그 유명한 윌슨(Woodrow Wilson)이었다.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했던 진보주의자 윌슨은 임기 말년을 불행하게 보냈다. 심지어 민주당 내에서조차 거리를 둘 정도로 미국인들은 윌슨을 싫어했고, 그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보수정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필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뉴딜을 공부하면서부터 필자는 이 개혁집단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를 궁금하게 여겼었다. 그렇게 진보를 외치던 미국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진보개혁에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진보개혁진영은 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 자신도 잊혀진 존재였다. 자신들과 함께 잊혀진 서민들과 함께 실력을 쌓고 있었다. 실제로 루스벨트 자신도 부통령 후보로서 1920년의 선거 패배를 일선에서 경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떠났다. 그는 역사를 선도하려 했지만 결국 역사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아직 우리 사회가, 진보개혁세력의 역량이 그를 받쳐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은 이제 잊혀진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고민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분석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빠르게 진전 중이다. 안타깝게도 성격이 급했던 그는 좀 더 빠른 진전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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