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던 극장에 웃음이 터졌다. 지난 5일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 지하 실험무대. 시선이 쏠린 주인공은 화면에 비춰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었다.
문화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한예종 학생들에게 유인촌 장관은 "알아서 다 해준다는데 왜 그러니"라는 말을 남긴 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확실히 비극보다 희극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터져나온 웃음은 '즐거움'보다 '씁쓸함'에 가까웠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감사로 시작된 이른바 '한예종 사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지우 총장의 사퇴에 이어 감사 처분 결과에 있던 이론학과 축소·폐지, 협동과정 내 서사창작과 폐지, 통섭교육(U-AT) 중단 등이 강행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학교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전례 없는 감사 결과가 궁극적으로 정부와 보수 단체에서 '좌파'로 낙인찍은 교수들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도 분분하다.
논란이 번지자 유인촌 장관은 지난 2일 한예종 교수와 학생들을 만나 "차기 총장에게 전권을 일임하겠다"며 이론과 폐지 등의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신재민 차관은 같은 날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우파 총장이 임명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학교 구성원들의 불안감은 더 커진 상태다.
교수와 학교 차원에서도 대응에 분주하지만 학생들의 대응 역시 만만찮다. 지난달 19일 황지우 총장의 사퇴 이후 500여 명의 학생이 모여 총회를 연 이후 꾸려진 학생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문화부 앞 1인시위, 학내·외 다양한 퍼포먼스와 함께 이들은 온라인으로도 동영상과 게시물로 홍보 활동을 펴고 있다. 서울 석관동과 서초동 캠퍼스는 각종 홍보물과 호소문으로 도배돼 있다.
학생들은 스스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다소 느슨한 분위기가 깔려 있었던 학교에서, 더군다나 '전혀 안 그럴 것 같던 애들'이 나서고 있다고 했다. 이론학과 폐지 등으로 인한 해당 학생들의 위기의식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다양한 학과에서 공통된 목소리를 내는 현재 한예종을 설명할 수 없을 듯하다.
지난 5일 열린 '한예종 사태를 위한 교내 연속 심포지엄' 역시 학생비상대책위와 각 원별 이론과, 협동과정 학생 등이 자체적으로 연 행사였다. 건물 밖에 차려진 일일 바에서 파는 음료수와 맥주를 마시며 학생들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눴다. 건물 안 지하에서는 100여 명의 학생과 교수 등이 모여 5시간에 걸친 토론을 벌였다. 외부에 설치된 대형TV는 토론회를 생중계하며 건물 안팎의 학생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학생, 졸업생, 학부모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이랬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된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제발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
▲ 지난 5일 열린 '한예종 사태를 위한 교내 연속 심포지엄' 역시 학생비상대책위와 각 원별 이론과, 협동과정 학생 등이 자체적으로 연 행사였다. 건물 밖에 차려진 일일 바에서 파는 음료수와 맥주를 마시며 학생들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눴다. 토론회가 끝난 뒤에도 한예종 사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이어졌다. ⓒ프레시안 |
처음 발제를 맡은 한예종 연극학과 전문사 과정 정진세 학생은 지난해 자신의 일화를 소개했다.
"아르바이트로 작년 한해동안 문화부 민원실 정책 모니터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담당 공무원은 내가 한예종 학생이라는 점을 늘 기억하고, 한예종이 문화부의 수석기관으로서 우수하고 개성 넘치는 학생들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하반기 모니터 활동이 끝나갈 무렵, 그분은 대뜸 걱정스럽게 물었다. '요즘 학교에 문제가 참 많지요?'
학교에 '문제 있음'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학교를 다니는 당사자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질문자는 이미 '문제'학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진세 학생은 "문화부가 자랑하던 '수석기관'의 타이틀은 1년 새 '문제기관'으로 바뀌었다"며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감사 결과에 따르게 된다면 이론학과 학생들은 수가 줄어들고, 배우던 스승을 잃고, 배우고 싶던 과목이 없어지고 심지어 입학한 과가 사라진다"며 "학생들 입장에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학생이다. '국립'이기 때문에 더더욱 자율적으로,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 '예술'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다양하게 배우고 싶다. '학교'이기 때문에 심도있게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 이것이 문화부 소속 국립예술학교 학생의 도리일 것이다.
문화 강국을 꿈꾸며, 예술의 첨병 역할을 하는 문화부와 학교에 당부하고 싶다. 원칙을 지켜 달라. 그리고 학생을 존중해 달라. 우리는 좌나 우, 아니면 뒤로 가려는 게 아니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 학생들은 캠퍼스 곳곳에서 의견을 개진했다. ⓒ프레시안 |
이어 서사창작과를 졸업한 소설가 김사과 씨는 "중요한 건, 우리 학교가 살아남을 만큼 훌륭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중요한 건 그 가치라는 것을 결정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등록금으로 수년간 몇 천 만원을 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걸 결정할 권리가 없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그런 권리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아, 이건 국립학교가 아니냐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냐고? 그거야말로 정말 바보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언제부터 국민이란 나와는 몹시 떨어져 천상에 새겨진 추상적인 개념이 되었나. 도대체 왜 책상왕들이 말하는 국민이란 단어는 언제나 나, 를 배제하는 건가? 세금? 그거 내가 내는 거 아닌가?"
"이론 가르치지 말라고? 자신들이 이론을 담당하고 있나?"
한국예술학과의 장미솔 학생은 "이론과 축소·폐지 문제는 현재 해당 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로 하여금 더 이상의 수업과 학습이 어려울 만큼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곧 없어질 수도 있는 학과에서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입장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채, 극단적으로는 '학문분야의 축소'로 귀결되는 방식을 택해 교육시스템을 흔들고자 하는 관 및 민간단체들의 주장을 접하며, 이제는 학습권 억압에 대한 분노를 넘어 정부 차원에서 주관하는 예술관련 교육은 물론 지원 방식 등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들고 있다"고 밝혔다.
또 장 학생은 "정치적 이념으로 좌파를 청소하고자 하는 문화부의 목적과 한예종의 존재가 자신들의 설 자리를 좁혀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단체들의 노파심의 합작이라고밖에 달리 이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연극학과에 재학중인 이지현 학생은 '이론과 축소·폐지'를 명시한 문화부 감사 결과의 '원조격'인 예술대 교수들이 소속된 사립 예술대의 실상을 꼬집었다.
"기존 우리나라 사립대의 실태는 어떤가? 한예종이 예술이론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하려면 당연히 자신들이 이론교육을 담당하고 있어야 옳지 않은가? 중앙대 연극학과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입학정원 표를 보면, 53명의 정원 중 연기전공이 28명으로 전체의 53%를 차지하며, 공연영상미술전공이 18명, 이론/연출/기획을 한데 묶어 7명으로 선발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예술이론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할 4년제 대학교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동국대의 경우에도 학부 과정의 목표는 배우 양성 및 전문공연예술가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지현 학생은 "문화미래포럼이 언급한 유럽의 선진국과 달리 예술이론과 비평에 대한 인식이 전통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의 대학에서 예술교육이 실기위주로 이뤄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인식을 개선하고 예술전반에 대한 수준을 높이기 위한 국립예술학교에서의 이론교육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근거가 매우 희박한 주장"이라고 덧붙였다.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를 졸업하고 무용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배우 서상원 씨는 "보통 시국 사안에 둔감한 학생들도 우리 학교가 어떻게 되는거냐, 정말 없어지냐, 우리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물어온다"며 "예술대학에서 이론과 축소와 같은 요구는 마치 여성에게서 자궁을 없애자는 것처럼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 배우 서상원 씨는 "보통 시국 사안에 둔감한 학생들도 우리 학교가 어떻게 되는거냐, 정말 없어지냐, 우리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물어온다"며 "예술대학에서 이론과 축소와 같은 요구는 마치 여성에게서 자궁을 없애자는 것처럼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하다 다 잡아먹을 수도"
문화부 감사 결과를 하나하나 반박하던 심포지엄은 앞으로의 대응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위기감은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영상이론과의 한 학생은 "유인촌 장관의 발언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희망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다"며 "그래도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이 해결되려면 감사 철회 공문 등 분명한 문서여야지, 말로 이 사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라며 "희망의 단초를 봤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사태가 전혀 나아졌다고 해석할 순 없다"고 지적했다. 서사창작과 2학년 학생의 학부모 역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다가 다 잡아먹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선균 "장관님 말씀대로 바른 행정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길…"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한예종 졸업생과 외부에서 바라본 '한예종 사태'에 대한 영상도 방영됐다. 그중 몇몇 발언을 소개한다. 성기완 3호선버터플라이 보컬: 이론적인 면 강화하는 노력, 이런 것들이 너무나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한예종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관여는 반예술적, 반문화적인 활동 같다. 손가락만 놀리는 사람을 길러내겠다는 건 예술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장인 교육이다. 예술가가 아니라 기능인을 양성하는 집단이다. 그럼 차라리 한예종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한국예능인기예학교라고 이름 붙이던가…. 이언희 영화감독(영상원 예술사 졸업): 10년 이상 지속되어온 학교에서 가장 주체가 되는 건 학생들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배제한 채 학교를 둘러싼 이해관계나 알력 때문에 학교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잘못이 아닐까. 이진원 TACIT 멤버(음악원 전문사 졸업): 학교 들어오기 전에는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런데 영상이론과에서 강의를 듣고 영상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때 배운 기본 이론이 많이 자극한 것 같고, 그것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면…. 개인적으로 봤을 때 지금이 그때에 비해 5만 배는 행복한 것 같다. 또 새로 생기는 통섭원이 여러 예술 장르를 복합적으로 발전시켜보겠다는 취지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드디어 예술이 음악은 음악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가서 되는 게 아니구나 해서 해보려 하는데 시작도 못하고 끝나게 된다면…. 이꽃별 해금연구자(전통원 전문사 졸업): 협동과정은 다른 분야 예술간 교류와 협력을 체계화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예술이 피어나게 도와주는 교육시스템이다. 우리학교가 아주 멋진 과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대로 하나, 왜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학교는 이론 수업 시간에 저에게 그런 실문을 해줬다. 학교 설립목표가 문화예술에 있어서 진짜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 전문가는 단순한 무한반복으로 기술을 습득해서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선균 배우(연극원 예술사 졸업): 아이러니한 것 같다. 실기만 한다고 저희가 이론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학생이 주체가 되어야 할 학교에서 정부나 외압적인 힘이 작용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나. 장관님 말씀대로 바른 행정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길 바란다. 커리큘럼 자체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각 분야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토론하고 창조적인 의견 내면서 얘기하는 건데, 국립 예술대학에서 그걸 떨어트려 놔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의구심이 든다. 군대가 아니지 않나. 마음 아픈 일이 많은데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이 축소판 같다. 더욱더 졸업생으로 마음이 아프다. 학교 자체를 좌파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오점균 감독(영상원 전문사 졸업): 좌파의 온상이라면 뭔가 학교에서 졸업이라든지 행사를 할 때 좌파적인 행사가 많아야 하는데 거의 없다. 정권 바뀌었다고 예술학교까지 입맛 맞는 사람들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하기호 감독(영상원 전문사 졸업): 저희는 남산 밑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다. 영상원의 경우 이면에는 그게 깔려 있을 것이다. 정재형 교수같은 경우 연출이나 기획 하지 말고 촬영과 조명만 가르치라고 하는데, 그런 교수가 있는 학교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길래…. 윤성호 감독(영상원 전문사 졸업): 굳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민망하다. 핸드폰 회사 직원이 여자친구랑 사랑하다 힘들어서 다시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영화를 찍는다고 보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보편적인 플롯에 놓을지 알아야 한다. 카메라나 편집툴을 잘 다룬다고 되는게 아니라, 말만 잘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사회나 보편적인 인간의 서사에 관한 것을 강의도 듣고 책도 보면서 알아야 하지 않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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