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들이 '릴레이 단식'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 등 정부가 밀어붙이는 노동관계법을 막기 위해서다. 단식에 들어가며 이들은 "법률가는 법률의 정함에 따라 사회관계를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프레시안>은 일주일에 두 번, '사회적 정의와 양심'을 위해 단식에 참여한 법률가들의 글을 싣는다. |
귀찮아서인지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최근 몇 달동안 여행아닌 여행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전국농업협동조합노동조합 영월분회에서 있었던 시간제업무보조원(기간제) 해고사건과 파업 투쟁으로 인한 형사 사건이었다. 민·형사 재판기일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지정되는 경우도 있었고, 형사사건의 경우는 피고인도 좀 많은 편이어서 아예 짐을 싸들고 영월에 내려가서 며칠을 묵으면서 서면을 썼던 기억이 난다. 해고무효확인 사건은 패소로 확정되었고, 형사사건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해고무효확인 사건의 원고는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 가능한 기간제 노동자였는데, 첫 번째 갱신 기회에 무단결근으로 인한 낮은 근무평정을 사유로 해고(갱신거절)되었다. 하지만, 그 사유는 형식적인 사유였을 뿐 실제의 사유는 바로 원고가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원고가 자신이 기간제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감히" 파업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해고(갱신거절)가 된 것이었다. 소송 준비 과정에서 영월분회 분들과 인간적으로도 친해지기도 하였던 것 같고, 원고의 사정이 마치 나의 일같이 느껴지기도 하여서 의욕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결국 입증이 부족하여 패소하게 되어 기운이 상당히 빠졌었다.
위 사건을 진행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기간제 노동자에게 권리란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로서 파업에 참여할 권리, 아니 노동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용자의 모욕적이고 부당한 처우에 대하여 항의할 권리, 이런 권리란 기간제 노동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기간제 노동자가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려면 곧 닥쳐올 계약 갱신 시기에 해고(갱신거절)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러한 존재를 과거에 "노예"라고 불렀던 것 같다.
법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법의 그러한 역할은 대체로 상대방에게 의무이행을 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질 테이다. 즉, 권리란 상대방의 의무와 부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런 의무와 부담도 지지 않으면서 다른 상대방이 권리를 얻게 되는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기간제법의 출생 내역을 보면 기간제법은 처음부터 사용자들이 자신의 의무와 부담을 떨쳐버리려고 만든 것이다. 즉 기간제법은 그 출생부터 노동자의 권리를 축소하는 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기간제법 때문에 지금 많은 기간제 노동자들이 "해고는 안 당하겠지"라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도 포기하며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기간제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막기 위하여"라는 뻔한 레퍼토리를 들이밀며 기간제 노동자를 최장 4년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간제법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정부의 그런 후안무치가 놀랍기도 하고, 그런 후안무치한 법안이 법률로 제정되었을 때 또 다시 얼마나 많은 기간제 노동자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인간답게 일할 권리를 포기하게 될지를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비염 수술을 한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단식을 하게 되어 약간 힘들기도 하였고, 과연 법안 통과를 막아낼 수 있을까 하는 패배적인 생각 때문에 우울한 하루이기도 하였지만, 나의 1일 단식이 인간답게 노동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쌀 한 톨 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람되기도 하였던, 그런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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