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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척결, 아무리 중요해도 국정원은 안 된다"

[곽노현 칼럼] 법원, 국정원 '부패비리 정보 수집' 위법 판결

대법원이 얼토당토 않은 삼성에버랜드 배임 무죄 판결로 사법부의 얼굴에 먹칠을 한 지난 5월 29일, 서울중앙지법은 국정원의 정보수집권 남용에 제동을 거는 아주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 민사합의 35부(부장판사 문영화)가 "전국적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사회적 사건이라고 해도 이에 관한 정보수집과 수사는 수사 기관의 직무이지 국정원의 직무범위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며 국정원의 부패비리 정보 수집 활동을 위법 행위로 판단한 것이다. 모처럼 만에 들어보는 사법부발(發)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이 실토했듯이 국정원은 2004년 6월부터 이른바 부패척결 태스크포스를 운영하며 대형 부패비리 정보 수집에 나선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부패비리 정보 수집. 차명토지 보유 첩보가 발단이 돼 당시 이명박 시장의 지인 96명을 샅샅이 뒷조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게 국정원의 공식 설명이다.

당시 국정원 부패비리TF가 수집한 부패비리 정보 중에는 다단계업체인 제이유네트워크 주수도 회장이 사채놀이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안전판으로 판·검사와 경찰관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고 다닌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 관계자는 제이유그룹의 주수도 비리정보 보고서를 모 인터넷신문 기자에게 줘 기사를 작성하도록 했다. 검찰수사 결과 뇌물살포 부분은 무혐의로 판명났다.

제이유그룹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면서 국정원은 부패비리 정보 수집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 중앙지법의 판결은 부패비리 척결은 수사기관의 업무이지 정보기관의 업무가 아니라는 법리를 확인하며 이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단한 건 아니다. 국정원법상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권한은 대북,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국제범죄조직 등 6가지 유형의 '보안정보' 수집으로 제한적으로 열거돼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나 국제 범죄 조직와 관련된 부패비리 정보가 아닌 이상 국정원의 부패비리 정보 수집은 위법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은 부패척결을 향한 시대의 요구와 국민의 염원에 편승해 부패비리 정보를 관행적으로 수집해 왔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도 "부패비리는 망국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부패비리 정보는 현대적 의미의 안보 정보로 봐야 한다며 국정원의 입장을 거들었다. 국정원과 한나라당은 지난 2008년 정기국회에 대비해서 부패비리 정보수집을 포함해서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중앙지법의 이번 판결은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권한을 엄격하게 제한한 현행 국정원법상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체적 맥락과 흐름을 고려할 때 이렇게 판결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부패 비리 정보수집은 절대로 허용되어선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정보기관은 부패비리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공직자와 기업인 위에 군림하게 된다.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이 수사기관보다 정보기관을 더 무서워하는 순간 공포의 지배는 불가피하다.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를 위한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몹시 위험한 도구다. 국가안보의 명분과 잠행활동의 속성, 그리고 비밀보안의 필요 때문에 통제가 용이하지 않고 그 결과 국가 속의 국가로 행세하며 공포의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굳이 유신독재시대의 중앙정보부, 나치시대의 게슈타포, 동독시대의 슈타지의 예를 들 것도 없이 비밀정보기관의 권한과 활동에 대해서는 최대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안전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은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맞다. 정보기관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서는 국내정보 수집기관과 국외정보 수집기관을 분리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국내정보 수집을 허용할 경우에는 지금처럼 국가안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해야 맞다. 국정원의 국내정보 비밀수집활동은 우리 국민의 프라이버시 등 인권침해를 전제하고 허용하는 중대한 침해적 국가작용이기 때문이다.

망국적인 부패비리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할 일도 많다. 부패전담기구 신설 등 반부패의 촘촘한 제도화, 검경, 국세청, 금감위 등 반부패기관의 조사기법 전문화,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관행 해소, 반부패 국제협력 강화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국정원 동원은 절대로 안 된다. 비밀정보기관을 부패척결에 끌어들이는 건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극도로 어리석고 무분별한 짓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국정원은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취지를 존중해서 지금 당장 부패비리 정보수집활동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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