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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사로잡힌 가련한 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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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사로잡힌 가련한 경찰청

[박동천의 집중탐구]<39>역사를 예언할 수 있을까?

제4부 선험주의: 선견지명 프레임
제2장 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제3절 역사를 예언할 수 있을까?


계몽주의 시대에 뉴턴의 위업에 반한 사람들이 사회적 지식에서도 뉴턴과 같은 신기원을 이룩한 인물이 되어보겠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계몽주의자들은 뉴턴이 자연의 법칙을 찾아서 자연을 통제했듯이, 사회현상도 법칙을 찾으면 빈곤이나 범죄나 전쟁과 같은 문제들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생시몽, 콩트, 헤겔 등이 역사에서 법칙을 찾아보려 시도했고, 마르크스는 역사가 계급투쟁이라는 동력에 따라 단계별로 발전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자본주의가 내부모순 때문에 프롤테타리아 혁명을 불러일으켜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계급없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리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역사의 예언가능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논의할 가치가 있다. 마르크스가 죽은 지 130년이 가깝고, 소련이 무너진 지도 거의 30년이 지났으며, 중국마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해서 성장을 추구하는 현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다고 판정을 내리기가 쉽다.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적은 전혀 없고, 러시아, 중국, 쿠바 등,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혁명이 일어난 곳은 한결같이 자본주의도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의 자본주의는 2008년의 금융위기도 대충 극복하고 넘어갈 기세고, 체제경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중국, 동유럽 국가들은 낭비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자본주의 정신을 익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예언이 틀렸다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확정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예언이 경고로 작용해서, 자본주의의 자체교정이 있었기 때문에 혁명이 예방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라든지 수정자본주의와 같은 형태, 다시 말해 정치적 자유주의 안에서 사회주의적 요구들을 수용해 나가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공헌에 힘입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단적으로 케인스 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에게 영감을 받은 만큼이나 칼 마르크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충분히 음미해보면 마르크스의 공과와는 다른 차원에서 결론이 하나 뚜렷이 떠오른다. 역사, 즉 사회현상에 관해서는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법칙적 설명이나 예측이라는 발상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이다. 과학적 법칙이란 전형적으로 행위자들의 의지나 가치와 상관없이 맹목적인 인과의 고리만을 찾아낼수록 성취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사회현상에 대한 법칙은 사람들의 행태를 주제로 삼는 것인데, 공표되는 순간 법칙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법칙에 어떻게든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반응 역시 사람들의 행태이기 때문에 법칙 안으로 포섭되어야 할 대상이 되지만, 법칙에 대한 반응을 포섭해서 법칙을 찾아내더라도 다시 그 법칙에 대한 반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논리적 악순환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 논증은 매우 짧고 간단하지만 의미는 대단히 깊고 크다. 사회생활의 개선은 결코 몇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설계로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각 개인들로 하여금 선의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함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에서, 토마스 홉스, 칼 마르크스 등을 거쳐 박정희나 김일성까지, 강제와 폭력을 써야 사회를 유지하고 개선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은 인간이란 통제하지 않으면 사고를 친다는 불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체제가 만일 의도대로 통제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의 생각이 결코 설계자가 설정해놓은 한계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선한 체제가 아니라 "선"이라는 이름을 간판으로 단 감옥 또는 사육장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류의 역사를 자기가 설계한 한계 안에 가두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런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시도된 모든 체제들은 다 설계자의 의도를 벗어나서 발전했다.


물론 명백한 범죄는 당연히 통제해야 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예방해야 한다. 그러나 공포와 걱정과 염려에만 사로잡힌 시선으로 보면 아이들이 머리에 염색하는 것만 가지고 "말세"를 걱정하며, 단지 용산에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는 촛불만 봐도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불안해지며, 한미 FTA가 체결되면 생계가 막막해질까봐 두려워 분신자살을 할 수밖에 없어진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개인 재산이 얼마인지 계산도 잘 되지 않는 부자라도 걱정을 하기로 맘만 먹는다면 "10년 후 뭘 먹고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인생에는 본시 아무 보장이 없는 것이다.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할 수는 없었고, 부잣집 딸이라고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행복이란 성적순도 아니지만 성적의 역순도 당연히 아니다. 이런 차원의 불확실성들은 인간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이지,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비밀을 벗겨내어 인간의 수중에 장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확실성에 관한 이런 소리는 단지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 각 개인들이 오직 자신의 경험만을 지침 삼아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한다면 굉장히 불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상황이 그와 같지는 않다. 도덕에서나 행위에서나 모든 사람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선견지명에 따라 진로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축적되어 전통적 격언에 담겨있는 지혜를 가지고 방향타를 잡는다. 그런 전통의 권위에 복종하는 성향이 워낙 강해서, 더 이상 어처구니없을 수 없는 관습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여러 시대를 건너다니며 영속되는 지경이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인류가 실수를 저지를 위험은 거의 없다. 수억 명의 인간들이, 단지 조상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이유만으로, 우상 앞에서 고리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짓을 가장 고상한 덕이라고 여기며, 소고기국을 먹으면 가장 끔찍한 오욕이라고 여긴다. 터키인들은 여성이 가리개 없이 거리에 나다니면 최고로 음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되는 나라도 있다고 말해주면,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버터를 불에 가까이 대면 녹기 마련"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말을 한 치의 잘못도 없는 진리로 믿지 않았던가? 주입된 의견에서 벗어나기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경험의 진보, 그리고 인간 지성의 성장을 통해 전통적인 견해를 수정하고 개선하는 일은 지극히 천천히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인간 대다수가 각자 나름의 자체 기준에 따라 "행동의 결과를 어림잡아보겠다"고 고집하게 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대신 계산해서 영원한 기준을 세워주기만을 기다리면서, 도덕의 규칙을 세우는 일은 자기와 상관이 없고 자기는 복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 ☞ Sedgwick's Discourse)

힌두교도가 줄에 매달리고 무슬림 여성이 가리개를 쓰는 관습을 그 나라들더러 고치라고 충고할 생각은 내게 전혀 없다. 그러나 "버터를 불에 가까이 대면 녹기 마련"이라는 걱정에, 치마를 조금 짧게 입은 여중생을 불러내 치마를 찢어버리는(☞ "교사가 여중생 치마 찢어", ☞ "치맛단 뜯는 생활지도") 우리 사회의 생활지도에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봐"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제해도 된다고 하면, 고문이나 살해까지도 "위험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간단히 정당화된다. 국회의원들, 부산국제영화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을 비롯해 1800개의 합법적이며 평화적이기만 한 시민단체들을 "불법폭력단체"로 분류하는 경찰청의 발상이(☞ "사제단·문국현 의원도 폭력단체?" ) 바로 그런 공포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 ⓒ프레시안

정책이란 시기, 체면, 복수심에 근거해서 결정해서도 안 되며, 걱정, 염려, 공포에 근거해서 결정해서도 안 된다. 물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익사의 위험은 줄일 수 있고, 산에 가지 않으면 추락사의 위험은 줄일 수 있지만, 그 사이에 수영도 익힐 수가 없고 산의 지형이나 식생을 알 수도 없게 된다. 무엇보다도 처음 당해보는 모든 일 앞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모든 불확실성에서 바로 공포에 사로잡히는 가련한 겁쟁이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바로 이 때문에 표현의 자유에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주입된 의견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 사회의 개선을 위해 무엇보다도 절실한 필수조건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표현의 방식은 남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를 지켜야 한다. 밀이 위해의 기준을 명시하지 않은 채로 남기고 죽자, 그의 정신을 충실하게 계승한 미국의 연방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스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그 기준을 정하고, 깜깜한 극장에서 장난으로 "불이야"를 외쳐 공황을 부르는 행위 정도를 예시했다. 나는 지금 2009년 대한민국에서 정책결정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물리적 충돌들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때문에 불가피한 경우가 하나도 없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해서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알게 모르게 가하는 폭력과 강제와 압박 역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검사기준을 통과하는 경우보다는, 기본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찌들린 부모들의 "주입된 의견" 탓인 경우가 압도적이리라고 짐작한다.

이명박이나 이건희 같은 부자들이 더 인색하고 쩨쩨한 까닭은 부자가 원래 그렇기 때문이 아니고, 일제와 전쟁과 궁핍과 독재라고 하는 인색하고 쩨쩨한 시대를 우리사회가 거쳐 왔기 때문이라고 봐야 출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성 자체를 천사표로 몽땅 개조해서 이명박이나 이건희 같은 사람들은 아예 생겨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길은 없다. 더구나 그들이 목표를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고 부지런히 궁리하고 돌아다닌 것은 어떻게 봐도 미덕이라고 봐야 일관적이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사회적 주의를 환기해야 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쩨쩨한 버릇을 고치기에 앞서 스스로 덜 인색하게 행동하는 데에 출구가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탐욕스러우니 나도 어쩔 수 없이 탐욕을 추구한다든지, 남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맘을 열지 않으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에서 핑계로 등장하는 "남"이란 결국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일 뿐이다.

남을 무작정 믿고 의지하는 것은 물론 바보짓이다. 천사의 기준으로 보면 바보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천사가 아니므로 당연히 천사의 기준으로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남을 무작정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짓이 정당화되는가? 누구나 스스로 직접 접해서 아는 사람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믿을 이유와 의심할 이유를 가지고 적응하면서 산다. 때로는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도 당하고, 때로는 의심했던 상대에게 감동도 받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부대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 4800만 가운데 한 개인이 그처럼 직접 접해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어떤 정책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면서 고려하는 "남"이란 단지 불특정다수를 가리킬 뿐이다. 일생에 한번 스쳐지나갈 확률도 대단히 낮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 불특정다수를 믿고 의지할 특별한 까닭은 당연히 없지만, 그렇다면 똑같은 이유로 의심하고 두려워할 특별한 까닭도 당연히 없다. 어차피 생전 부딪칠 일이 없는 상대라면 선의로 용납하는 것이 적어도 내 마음의 평안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더구나 그들 중에 살인자도 있고 절도범도 있고 사기꾼도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내가 먹는 쌀, 내가 입은 옷, 내가 쓰는 전기, 내가 타는 차를 나름대로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서 마련해주는 사람들도 그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범죄자들은 어차피 사법기관에서 담당할 일이니, 공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정상적인 불특정다수가 판단을 그르치기보다는 잘 내릴 가능성이 높고, 설사 한번 잘못 판단했더라도 자기교정의 능력이 있다고 보는 편이 상식적으로 온당하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는 한국사회에서 지금도 얕고 가볍기만 한데,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미 1953년에 최상의 선에는 반드시 자유가 포함되어야 하고, 인간성에 대한 신망이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임을 갈파한 바 있다(「민주주의론」, 『사상계』 2호). 사람들 중에 남이 안 보는 구석에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반적인 인간성에는 선을 향한 의지와 향상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개인들 안에 잠재되어 있을 선한 의지와 향상의 능력이 공론장에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상호 비판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다듬어지려면 무엇보다 공론장의 형체가 갖춰져야 한다. 무력이나 무력을 등에 업은 억지가 통할 수 없어야 하는 것이 핵심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절대적이다. 그런데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무력의 뒷받침 없이 생성되려면, 쟁점의 진상에만 시선을 모으는 집중력이 유일한 원천이다.

위에 길게 인용한 문단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이익이 곧 윤리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전통적인 도덕관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입된 의견에 따라 부화뇌동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에, 행동의 결과를 스스로 판단해서 어느 편이 이익인지에 따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론의 형성을 위해 필수조건이라는 취지다. 각자에게 도덕을 판단하게 맡기면 혼란이 온다는 세지위크(Adam Sedgwick)*의 상투적인 답변에 대해 공론의 변화란 천천히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필요없다고 반박하는 내용이다.

*필자주: 세지위크(Adam Sedgwick, 1785-1873): 근대 지질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청년기 다윈에게 지질학을 가르친 스승인데, 영국교회의 보수신학에 심취해서 모든 형태의 진화주의에 반대했다. 반면에 밀(John Stuart Mill, 1806-1872)은 명시적으로 교회를 배격한 공리주의자로서 세속적 공론을 통해 사회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믿은 자유주의자였다. 밀의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선험주의라는 말이 항상 칸트의 슬하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고 통속적인 의미로는 세지위크와 같은 입장이 전형적으로 선험주의적인 태도가 된다. 실제로 한국사회의 정치의식에서 내가 꼬집어 비판하려는 선험주의는 칸트와 같은 철학적 입장보다는 세지위크와 같은 정치적인 입장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안 봐도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사업에 관한 한, 그 생각에 따라서 생활하는 태도를 내가 굳이 비판할 까닭은 전혀 없다. 그런 종류의 선견지명은 맞거나 틀리거나 결실도 당사자가 수확하고 쓴맛도 당사자가 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적인 쟁점에 관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사실은 시간상으로 보나 인과관계의 고리로 보나 까마득히 먼 나중의 일이기 때문에 결코 현재의 시점에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에 관해서 "안 봐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지나, 그런 차원의 개인적인 추정을 선견지명이랍시고 우기고 고집하며 다른 모든 의견에 대해 우격다짐으로 배척하는 태도는 공론의 형성에 크게 해롭다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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