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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살해 보고 진압복 벗은 지 18년,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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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살해 보고 진압복 벗은 지 18년, 아직도…"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박석진

5월 15일은 1981년 이후 이어져 온 세계병역 거부자의 날이다. 국제평화단체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War Resisters' Interntional)'은 매년 초점 국가를 선정해서 해당 국가의 병역 거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2009년 세계 병역 거부자의 초점 국가는 바로 한국이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 대체 복무제 도입이 무기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10일부터 16일까지 해외의 병역 거부자와 평화운동가들은 한국에 모여서 국제회의와 비폭력 트레이닝을 통해 세계 병역 거부 운동과 한국의 실태를 논의할 에정이다.

병역 거부자이자 현재 대학원에서 평화연구를 하고 있는 임재성 씨가 한국을 찾은 해외 병역 거부자와 평화운동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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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강경대 열사가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살해된 이후, 진압복을 입을 수 없다며 양심 선언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그는 파주 무건리에서 군사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외국 활동가들에게 한국의 평화운동 사례를 알리기 위해서 '세계 병역 거부자의 날' 비폭력 트레이닝 장소를 찾은 박석진 씨에게 '총을 들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기억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 1991년 전투경찰로 복무하다 진압을 거부하며 양심 선언을 했던 박석진 씨. ⓒ임재성

또 다른 병역 거부의 역사

임재성 : 병역 거부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안타까운 부분은 이것이 공론화된 지 9년이 넘었음에도 온전한 역사가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오태양 이후의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나름의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1980~90년대 다양한 방식으로 군대에 저항했던 역사들을 병역 거부의 맥락에서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1991년도 전투경찰의 신분으로서 양심 선언을 했던 박석진 씨의 저항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양심 선언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졌는가?

박석진 : 1991년 5월 4일에 양심 선언을 했다. 군에 입대를 했는데 전투경찰로 차출되면서 시위 진압을 전담하는 1기동대로 배치되었다. 당시는 노태우 군사정권이 폭압적인 정치를 할 때였고, 시위 진압의 방식이 공격 위주의 방식으로 바뀌던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강경대라는 학생이 나와 함께 작전을 하던 부대에 의해 살해되는 모습을 보면서 양심 선언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복무하는 내내 많은 고민이 있었다. 전투경찰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국방의 의무가 아니었고, 국민을 적으로 여기게 만드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강경대의 죽음 통해서 이것은 내 양심에 반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탈영, 즉 근무지에서 이탈을 했고 양심 선언을 했다.

임재성 : 양심 선언을 하겠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박석진 : 강경대의 죽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정말 큰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던 것 같다.

임재성 : 양심 선언을 했을 때, 전·의경제 폐지 등 정치적인 요구를 내세웠다고 알고 있다. 또한 헌법소원도 제기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었나?

박석진 : 하나의 구호로 만들어진 것은 "독재정권의 방패막인 전·의경제를 폐지하라" 이었다. 또한 "군대 내에서 구타를 금지하라", "병영 내의 민주화" 와 같은 것도 함께 주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방의 의무 대신 경찰의 시위 진압을 대신 시키는 전·의경 제도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 역시 제기했다. 그러나 그 헌법소원은 1992년 5대 4의 다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했다.

2년의 수배 생활, 2개월의 농성, 8개월 간의 구속

▲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부터 내가 양심 선언을 할 때까지 군대 문제로 양심 선언을 한 사병만 50여 명에 달한다." ⓒ임재성
임재성 :
박석진 씨의 양심 선언은 매우 정치적인 병역 거부였다고 느껴진다. '총을 잡을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복무하겠다'와 같은 병역 거부는 전형적이긴 하지만 다양한 병역 거부 중 하나일 뿐이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시민들의 손에 총과 곤봉을 쥐어주는 곳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저항을 '병역 거부'라는 언어로서 연결고리를 만들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양심 선언 이후에는 어떤 과정을 거쳤나?

박석진 : 이후 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부터 내가 양심 선언을 할 때까지 군대 문제로 양심 선언을 한 사병만 50여 명에 달한다. 그 중에 8명이 수배 상태였는데 군인이 3명, 전경이 5명이었다. 이렇게 8명은 수배 상태에서도 함께 모임을 가졌고, 1993년 5월 25일부터 7월 말까지 58일 동안 기독교 회관에서 '군의 민주화와 자주화', '전투경찰대의 해체' 등의 주장하면 농성을 진행했다.

이후 모두 구속이 되었는데, 나는 구속되어서 8개월간 재판을 받고 1년6개월의 형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 형량은 군복무가 면제될 수 있는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에 다시 복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압중대는 아니었고, 경비중대로 배치가 되어서 15개월의 잔여복무를 했다.

2001년도에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 나 역시 매우 놀랐다. 병역 거부 관련 토론회에 나가서 과거의 사례로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총을 들 수 없다는 신념으로 감옥에 가왔고, 그것이 권리로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의 행동 역시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공론화된 지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옥행이 이어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전히 반복되는 고통, 전·의경제

임재성 : 양심 선언이 당시 군대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숫자가 많았다는 것은 몰랐다. 민주화 이후에 군이 변화될 것이라는 믿음과 그렇지 못했던 현실 사이에서 만들어진 저항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역주행'으로 상징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다시 집회·시위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진압 방식 역시 예전 군부독재시절로 회귀하고 있다. 그 결과가 용산 참사였다. 이는 노태우 정권이 정권 말인 1991년에 공격위주의 진압방식으로 바뀐 이후에 강경대 열사가 살해된 것과 매우 닮아있다.

박석진 : 내가 양심 선언을 할 당시에 나는 소위 '사복 체포조'로 배치가 되었다. 노태우는 1991년 초에 시위 진압 양식을 바꾸는데 소위 '토끼몰이'식 진압이라고 불리던 방식이었다. 시위자를 전원 다 검거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진압중대의 3분의 1을 사복 체포조로 만든 것이다. 결국 그러한 방식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초래했다. 정권은 우리들의 손으로 그를 죽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서글픈 생각이 든다. 전·의경 친구들을 지금도 집회 현장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데, 10여 년 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다. 노무현 대통령 때 이것을 폐지하겠다는 결정을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없어지는구나 하며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어찌 보면 전·의경들은 내 후배들인데, 내가 받은 고통을 내가 끝내지 못하고 그 친구들까지 이어지게 했구나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도 하다. 작년 촛불 집회에서 진압을 거부하며 병역 거부를 선언한 이길준 의경을 보면서도 결국 또 다른 이들이 이러한 마음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전·의경제 폐지를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문제의식을 이어갔지만 현재는 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 "전·의경들은 내 후배들인데, 내가 받은 고통을 내가 끝내지 못하고 그 친구들까지 이어지게 했구나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도 하다. 작년 촛불집회에서 진압을 거부하며 병역 거부를 선언한 이길준 의경을 보면서도 결국 또 다른 이들이 이러한 마음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임재성

임재성 : 현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이하 '평통사')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에는 파주 무건리의 훈련장이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에 참여하시는데 이전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가?

박석진 : '평통사'라는 단체는 한·미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주되게 문제제기 하는 단체이다. 스스로 전경문제를 통해서 군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한국군의 비민주성과 자주적이지 못한 점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무건리 싸움은 미국이 자신이 쓸 훈련장을 확충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삶의 터전을 가꾸어오던 주민들을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이것에 저항하는 지역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작년 7월 25일에 '무건리훈련장확장반대 대책위원회'(http://www.peaceoh.net)를 만들었고, 그 즈음부터 주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임재성 : 이스라엘 병역 거부자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그가 활동 과정에서 사용했던 이름 중 하나가 '선배로부터의 편지'라는 것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국사회에서 '선배'가 가지는 의미가 다양해서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병역 거부의 '선배'로서 좋은 활동을 부탁드리고 싶다.

2009 세계 병역 거부자의 날 행사 소개

서울과 경기도 고양시 등에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는 병역 거부 운동을 활발히 펼치는 이스라엘, 콜롬비아, 러시아를 비롯한 10여 개국 20여명의 해외 활동가가 참가한다.

10일부터 14일까지는 비폭력 직접행동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시나리오 개발, 역할극 등을 하는 '비폭력 트레이닝'이 고양 일산 한강감리교회에서 진행되며, 15일에는 이 트레이닝에서 나온 논의를 바탕으로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비폭력 직접행동'을 진행한다.

또 오는 16일 오후 1시부터 '전 세계 병역 거부운동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서울대 의대 함춘회관 3층 대강당에서 국제 회의를 개최한다. 이 회의에서는 그리스, 미국, 이스라엘, 푸에르토리코, 마케도니아, 에리트리아 등지에서 온 활동가들의 사례가 발표된다. 이어 이날 오후 7시부터는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2층에서 평화콘서트 '밀리터리 인 더 시티'를 진행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2009 세계 병역 거부자의 날 홈페이지를 통해 알 수 있다. (http://corights.net/2009c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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