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은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재임시절을 회고하면서 "외환위기 책임의 65%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65%라는 숫자가 어떻게 도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2/3에 가까운 책임이 당시 야당 총재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DJ에게 있다는 얘기다.
대통령 본인의 입으로 경제위기 발생 책임이 대통령보다 야당 총재에 있다는 YS의 주장은 누가 봐도 책임 회피라는 점에서 빈축을 샀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평생 DJ에 대한 '피해의식'에 시달렸던 YS만의 것이 아니다. YS는 DJ의 책임에 대해 "노동법, 한은법 개정, 기아사태 등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반대했다"고 밝혔다. YS는 이어 "DJ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한자도 안 고치고 노동법 개정, 한은법 개정, 기아사태 등 전부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을 자기가 다 했다"며 "그래서 환란을 극복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런 인식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확인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7일 한나라당 지도부와 회동에서 "과거 10년 전 외환위기 때 노동법, 금융개혁법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해외투자자들의 불신을 샀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 뿐 아니라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도 지난해 10월 2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10년 전 금융개혁법과 노동법 개정을 둘러싼 대립과 투쟁으로 외환위기를 자초했던 쓰라린 교훈을 상기하자"고 강조했었다.
OECD 가입 위해 추진된 노동법 개정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의 책임을 DJ에게 돌리면서 "노동법 등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취임 직후 한 중소기업을 찾은 YS. ⓒ연합뉴스 |
'세계화'를 최우선 국정아젠더로 내세우면서 OECD 가입을 최대 목표로 삼았던 김영삼 대통령이 노동법 개정에 나선 것도 OECD 가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는 96년 4월 OECD 기준으로 노동법을 맞춘다면서 '신노사관계의 구상'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노사정 합의 테이블을 마련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민주노총을 합법적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던 김영삼 정부는 96년 5월 대통령 직속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만들면서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OECD 규범에 따라 민주노총을 대화상대로 인정했다.
이에 재계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부는 무마책으로 재계가 원하는 정리해고제 도입을 꺼냈다. 또 '복수노조 허용'도 신한국당이 정부안을 수정해 '3년간 유예'하기로 했다. 결국 자본과 노동의 입장을 적당히 타협시키려던 의지는 물 건너가고 반노동적 성격의 노동법 개정안이 성탄절 다음날 새벽 6시 6분 날치기로 통과됐다.
'복수노조 유예' 배후 세력…이명박 의원-이상득 정책위의장 당시 노동계의 큰 반발을 샀던 내용 중 하나가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3년 유예'다. 당초 정부안에는 상급단체 복수노조 설립을 그 다음해부터 시행키로 돼있었으나 신한국당이 법안 심의 과정에서 유보조항을 끼워 넣었다. 신한국당의 수정안은 전경련 등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부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 전경련은 당정 관계자들을 만나 "복수노조를 허용할 경우 노사 및 노·노갈등이 심화해 경제가 파탄된다"며 복수노조 허용 철회 또는 일정기간 유예를 촉구했다.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명박 의원 등 재계 출신 의원들은 당 지도부에 복수노조 허용 조항의 수정 필요성을 제기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이홍구 당시 신한국당 대표는 수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동법 특별심의반'을 구성했다. 이 팀은 정영훈 제3정조위원장(반장), 이강두 제2정조위원장 이강희 최병렬 이신행 김문수 의원 등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문수 의원(현 경기지사)을 제외하고 모두 '복수노조 허용'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복수노조 유예' 조항이 수정안에 들어갔다. 코오롱 사장 출신인 이상득 의원은 당시 정책위의장으로 노동법 개정안 통과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복수노조 유예' 조항이 들어간 것에 대해 정부안을 주도해온 박세일 당시 청와대 사회복지수석은 상당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민주노총 총파업→한보사태→IMF?
노동법이 통과된 직후인 26일 오전 8시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노동법 뿐 아니라 개악된 안기부법 등의 '날치기 통과'는 야당, 노동계를 넘어서 국민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한달 넘게 계속됐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97년 1월 21일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오찬회동을 갖고 "노동법을 국회에서 재논의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 논의 과정을 통해 97년 3월 재개정된 노동법으로 상급단체 복수노조가 허용돼 민주노총이 합법화됐다.
이런 '노동법 파동' 와중에 한보사태가 터졌다. 민주노총의 총파업도 사실 이 때문에 기운이 한풀 꺾였었다. 한보철강이 부도가 나면서 5조7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실 대출이 드러났고, 이런 부실 대출의 배후에 YS의 차남 김현철 씨 등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돼 있음이 밝혀졌다. 금융비리가 핵심인 한보사태는 민주노총 총파업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자 두 가지가 뭉뚱그려지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비난하는 근거가 됐다. 97년 1월 총파업은 2조8500억 원의 생산 차질을 초래했으며, 한보 등 대기업의 연쇄 부도 사태를 눈앞에 두고도 대비하지 못해 외환위기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96년 노동법 개정을 유지했으면 IMF 사태가 쉽사리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MB "IMF 때 노동유연성 문제 제대로 해결 못해 아쉬워"
10여년이 지나 보수세력이 재집권한 가운데 다시 경제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노동관련법 개정 문제가 또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복수노조 허용 등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6월 비정규직 법안과 함께 개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4월 경제위기 상황에서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으로 하는 것은 해고만 늘릴 수 있다면서 이를 4년으로 연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명박 정부는 또 '제2의 금모으기 운동'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졸 초임 삭감'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노동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일 "노동유연성 문제는 올해 연말까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면서 "과거 외환위기 때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쉽다"고 조속한 처리를 주문했다.
노동계에 화살이 돌아온 것은 경제위기 상황과 무관치 않다. 매출 감소, 수익률 저하 등 지갑이 얇아진 기업 입장에서 가장 손쉬운 보완책이 노동자들의 몫을 줄이는 것이다. 구조조정 등 당장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교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다. 이런 가운데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가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동유연성을 늘리겠다고 한다.
노동유연화→내수위축→위기의 심화
▲ 가락시장을 깜짝 방문하는 등 이명박 대통령은 유독 '민생 행보'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정작 추진하는 정책은 부자 감세, 규제 완화 등 빈부격차를 늘리는 방향이다. ⓒ청와대 |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원인 진단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말했다. 96년 YS 정권의 노동법 개정에서부터 본격화된 노동유연화가 현 경제위기를 야기시켰고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장 교수는 지난 10여년 동안 기업들이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통해 '고용 없는 성장'을 추구하면서 비정규직 고용이 빠르게 증가하게 됐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강조했다. 정규직 위주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의 증가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노조의 힘을 약화시켰다.
아래로부터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한국경제는 외견상으로는 큰 문제 없이 성장하는 듯 했다. 세계경제 호황기에 수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잠재성장률(4%대)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매년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세계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미국, 중국 등 주요 수출시장이 한꺼번에 경기침체 상황에 처한 것이다.
'소비'가 되살아나지 않고서는 이 늪에서 빠져나올 없다고 장 교수는 지적했다. 노동자들의 소득이 늘지 않고서는 소비가 늘지 않는다. 정부가 GDP의 3%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의 추경을 통해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등 돈을 풀고 있지만, 이 돈은 부동산, 주식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 거품만 키우고 있다. 실물경제는 여전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장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서 양극화 문제가 더 심화시키면 경제위기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권영국 변호사도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노동권을 제한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면 노동자들의 소득은 줄고 이는 내수위축으로 이어진다"며 "국민경제 전체를 고려한 정책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권 변호사는 "이명박 대통령은 노동권을 자본의 이윤독점을 방해하는 요소로 바라보고 있다"며 "이런 인식 하에서 근시안적 정책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자본이 이윤을 독점하면 할수록 내수시장은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인 폴 크루그먼 역시 그의 책 <미래를 말하다>에서 미국 경제를 분석하면서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크루그먼은 1920~30년대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을 지나 뉴딜정책의 입법화, 부자들에 대한 증세, 노조 활성화, 2차 세계대전 동안의 임금통제 등을 통해 빈부격차가 줄어드는 '대압착(the Great Compression)'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1950-60년대 미국은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았고, 가장 큰 수혜자는 육체 노동자였다. 크루그먼은 "'선분배' 정책을 추진하니 '후성장'이 경제적으로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역으로 미국의 현 경제위기는 레이건 정부 이래로 계속된 반노동적 경제정책이 노조 가입률 저하와 노동자들의 구매력 감소를 불러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크루그먼,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등과 함께 '월가 비관론자 3인방'으로 꼽히는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지난해 연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완전 고용이라는 통 큰 목표를 선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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