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어마어마한 비용, 그리고 학생들의 시간과 체력을 쏟아 붓는 사교육이 진정으로 우리 사회 전체에 유익한 것인지 나아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인지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단지 소수의 상위권 학생을 가려내기 위한 과정에 이만한 비용을 들인다면 너무나 큰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결국은 한정된 수밖에 차지할 수 없는 상위라는 허상을 좇아 어려서 부터 모든 학생이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적순으로 줄 세워서 경쟁을 하도록 내모는 현 교육제도에서는 대부분의 학부모와 학생이 사교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외국은 어떨까. 우리처럼 심한 사교육 문제가 외국에는 없다고들 말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필자가 거주했던 덴마크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덴마크의 교육제도는 기본적으로 아이마다 능력이 다르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공부를 못 한다기보다 능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아이라고 특별히 칭찬하는 일도 없고, 못하는 아이라고 무시하는 일도 없다. 공부라는 한 가지 잣대로 아이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8학년까지는 시험도 없다. 평가라고 하면 담임선생님이 아이에 대해서 다각도로 세밀하게 관찰한 것을 수치가 아니라 말로 기록한 것이 평가다.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이 있을 뿐이라는 이 생각의 근본은 인간에 대한 평등 정신이다. 북구 특유의 복지제도는 바로 이 평등 정신의 소산이다.
덴마크의 초등학교에서는 숙제를 할 때 보통 4명씩 짝을 이루어 하게 한다. 잘하는 아이 혼자서 먼저 문제를 다 풀어도 소용이 없다. 그 중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잘하는 아이가 가르쳐서라도 다 같이 알아야 숙제를 한 것으로 인정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중시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가면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 몇 개월에 걸쳐서 과제를 해내는데 이때도 반 전체 혹은 다수의 학생들이 참여해서 공동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그 중에는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역할을 분담해서 다 함께 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협동 정신이 사회인으로 일 할 때 팀을 이루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한다.
덴마크 교사들은 학교가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곳이라고 인식을 한다. 시시각각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서 그 모든 지식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학생들이 알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공부해서 배울 수 있도록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 훨씬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길러지는 자율성은 오늘날 덴마크 사회가 갖는 높은 효율과 직결되고 있다.
이처럼 평등 정신에 기초하고, 협동 그리고 자율성을 기르는 덴마크 교육 현장은 학생을 성적으로 평가해서 경쟁을 강조하는 우리와는 사뭇 풍토가 다르다. 우열을 가리는 평가나 줄 세우기가 없으니 누구도 사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교육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악기나 특별한 취미를 배우는 정도인데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고 아이 스스로 원해서 하기 때문에 우리 식의 사교육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다. 또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업을 갖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높은 보수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보다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마치 순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흔히 인생의 '성공' 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입시가 이른바 '성공'을 하기 위한 관문이라면 좋은 성적은 이 관문을 통과하는데 필수적인 도구다. 학부모들이 허리가 휘면서도 사교육비에 지갑을 열고,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당장 눈앞의 학교 시험에 쫓겨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학입시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 결과에 따라서, 또 대학의 서열에 따라서 학생의 장래가 대략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진학이 향후의 직업이나 직장, 보수, 사회적 지위, 삶의 질 등과 계속 연결이 되는 구조 속에서는 보다 유리한 입지에 서기 위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사교육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덴마크 사회에는 대학입시 문제가 없을까.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좋은 직장, 높은 보수, 높은 사회적 지위, 보다 안락한 삶이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순환 고리는 없을까.
덴마크에서는 초등학교 9학년을 마치면 인문계 고등학교와 기술계 상업계의 직업학교로 나뉘어 진학하게 되고 이에 따라 그 후 대학진학, 기술대학 진학 혹은 직장 진출 등으로 진로가 정해진다. 진학과정에서 담임교사가 9년간 아이를 면밀히 관찰한 내용과 9학년에서 치른 각 과목마다 시험 결과를 가지고 학부모, 그리고 학생과 면담을 하는데, 담임이 기술학교나 상업학교 등 직업학교 쪽을 추천할 경우 학부모는 대개 그대로 받아들인다.
담임교사가 정확히 파악한 아이의 적성에 따라 그리고 아이의 능력에 맞추어 교육을 받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가 적성과 능력에 맞지 않는 인문계를 가거나 대학 진학 하는 것을 걱정하는 부모도 있다. 어차피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서이다. 직업학교만 나와서 사회에 진출해도 대학교 다니는 기간만큼 더 빨리 직장생활을 하게 되므로 경제적으로 대학 졸업자나 별로 차이가 없다. 또 전문 기술자에 대한 인식과 보수가 높기 때문에 직업학교만 나왔다 해서 대학 졸업자보다 차별을 받거나 경제적으로 뒤쳐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유럽국가도 그렇듯, 덴마크에서는 대학이 우리처럼 서열화 되어있지 않다. 어느 대학이 어느 분야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는 있어도 우리처럼 획일적인 서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졸업 후에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니 대학을 나왔느냐 아니냐 자체보다 어느 정도의 전문가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덴마크인들에게 직업에 대한 의식을 물어보면 번번이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게 마련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의사 못지않게 벽돌을 잘 쌓는 전문가를 존경 한다"라거나, "불행한 의사보다 행복한 청소부가 낫다"고 흔히 이야기 한다. 일반적으로 직업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거의 누구나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직장이 아닌 동네 여가 클럽에서는 벽돌공이나 사장이나 똑같이 동등하게 어울린다고 한다. 또한 직장 내에서의 서열도 큰 의미가 없어서 사장이나 매니저는 높은 사람이고 일반 직원이나 기술자는 낮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다. 맡은 일이나 기능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신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맡겨진 일을 잘 해내는 데에서 보람을 찾는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임금 문제는 어떨까. 아무리 평등을 강조하고 서열이 없는 사회라 해도 어느 직업이나 소득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을까. 덴마크에서도 표면적으로 볼 때는 직업에 따라 어느 정도 소득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소득에 따라 워낙 고율의 누진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세금을 제하고 난 실질 소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실제 벽돌공이나 의사나 생활수준이 비슷하고, 페인트공이나 법률가나 실수입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소득 차 부분이 세금으로 환수되는 셈이다.
이렇게 거둔 세금은 투명하게 복지로 전환되어 다시 국민에게 돌아간다. 전 국민이 돈이 없어서 교육을 못 받거나, 돈이 없어서 필요한 치료를 못 받는 일은 없다. 소득에 따라 주택이나 육아를 위한 보조가 있고, 실직을 해도 생활은 보장이 된다. 노후생활도 걱정이 없다. 잘 갖추어진 복지제도 덕분에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난 덴마크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성공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상위권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보수, 더 안락한 삶으로 이어지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 사회, 그래서 사람 사이에 서열이 없는 사회, 직업에 따른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는 비교적 평등한 사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는 사회이니 우리처럼 죽자 사자 매달려서 꼭 대학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없고 사교육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덴마크 사회가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상사회일까. 꼭 그렇게 생각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라고 아주 실현 못할 것은 없다. 지금도 간간히 제안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 대학이 평준화 된다고 생각해보자. 당장 사교육이 사라지지 않을까. 혹시 국가 경쟁력이 약해지지 않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의 국가 경쟁력은 학생들의 시험성적에서가 아니라 창의력에서 나온다고 봐야한다.
또 실질 소득 격차를 줄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도록 복지제도를 강화한다면, 대학에 서열이 없고 직업 간의 차별이나 서열이 없다면, 그래도 너도나도 기를 쓰고 사교육을 시킬지 의문이다. 보다 질 높은 복지서비스를 시행 못하는 이유로 흔히 예산 타령을 하지만 예산보다는 실현하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보면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함께 풀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이민 가는 사람도 있고, 조기유학을 보내기도 하고 기러기 가족도 많다. 그러나 이민이나 해외 유학이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더 많은 문제를 떠안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 교육 문제, 특히 사교육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학부모들이 나서서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제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쟁 구도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는 게임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도를 거부하는 데에는 물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는 어렵다. 학부모들이 연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조금씩이라도 제도를 바꾸어 가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서열의식을 거부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서열이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사교육 또한 뒤따르기 때문이다. 보다 수준 높은 사회보장 제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하다. 교육과 의료가 보장되고 실업이나 노후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적인 사교육 열풍은 사라질 것이 당연한 이치다
덴마크 아이들은 유독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독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 부모가 아이의 손을 이끌고 앞으로 뛰어가기보다,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 "한국에서 살아보니" <1> 고생도 훈장 <2> 피곤한 사람들 <3>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 <4> 청계산이여, 안녕 <5> "석유 안 나는 나라에서 기차를 홀대해서야…" <6> "기억 속 푸른 하늘, 다시 볼 날은 언제쯤?" <7> "침 뱉을 일 많아도, 길에서는 참읍시다" <8> "아빠, 빨리 들어오세요" <9> 메뉴판을 하나만 주는 식당 <10> 어른도 교복 입는 나라? <11> "여자라서 못한다고요?" <12> "단체행동, 꼭 따라해야 하나요?" <13> 윗사람, 아랫사람 <14> 축 합격 ○○○? <15> "'○○과장' 대신 '○○님' 어때요?" |
○ "덴마크에서 살아보니" -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다 ☞ "명문대? 우리 애가 대학에 갈까봐 걱정" ☞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는 사회 ☞ "덴마크도 40년 전에는 '서열 의식'이 견고했다" ☞ 모두가 승리자 되는 복지제도 ☞ 비정규직 임금이 정규직 임금보다 더 많은 나라 - '암기가 아닌 창의, 통제가 아닌 자율'을 장려하는 교육 ☞ "아이들은 숲 속에서 뛰노는 게 원칙" ☞ "노는 게 공부다" ☞ "충분히 놀아야 다부진 어른으로 자란다" ☞ 1등도, 꼴찌도 없는 교실 ☞ "왜?"라는 물음에 익숙한 사회 ☞ "19살 넘으면,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 - "아기 돌보기, 사회가 책임진다" ☞ "출산율? 왜 떨어집니까" ☞ "직장인의 육아? 걱정 없어요" - "덜 소비하는 풍요" ☞ "에너지 덜 쓰니, 삶의 질은 더 높아져" ☞ "개인주의를 보장하는 공동체 생활" ☞ '빚과 쓰레기'로부터의 자유 ☞ "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 "우리는 언제 '덴마크의 1979년'에 도달하려나" - "낡고 초라한 아름다움" ☞ "수도 한 복판에 있는 300년 전 해군 병영" ☞ 인기 높은 헌 집 ☞ "코펜하겐에 가면, 감자줄 주택에 들르세요" ☞ 도서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곳 - 덴마크 사회, 이모저모 ☞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사람들 ☞ "크리스마스' 대신 '율'이라고 불러요" ☞ 아이와 노인이 함께 즐기는 놀이공원, 티볼리 ☞ "저 아름다운 건물을 보세요" ☞ 구름과 바람과 비의 왕국 ☞ "체면 안 따져서 행복해요" ☞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이 만나면 ☞ 잘난 체하지 마라, "옌틀로운" ☞ "긴 겨울 밤, '휘계'로 버텨요" - 덴마크 사회의 그늘 ☞ "덴마크는 천국이 아니다" ☞ "덴마크 사회의 '관용'은 유럽인을 위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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