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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이 삽니다…하지만 할 말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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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이 삽니다…하지만 할 말은 많아요"

[좌담] 한·일 프리터 5인방의 '발칙한' 수다 <上>

꼭 20대로 한정할 것도 없다. 실업·비정규직 문제는 30대를 포함한 온 세계 젊은이의 숨통을 죄고 있다.

정규직으로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않다. 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순간 '직장 내 24시간 항시 대기-대출받아 주택 장만-해고를 두려워하면서-평생 빚 갚기' 시나리오를 밟아야 한다.

좀 자유롭게 살 방법은 없을까?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없을까? 이런 고민은 따라서 전 세계 젊은이의 공통 화두다. 동북아시아의 두 나라,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다른 방법을 찾는 사람들의 '노가리' 기회를 마련했다.

일본에서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이라는 형용사와 프롤레타리아트(pl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 신자유주의 경제 하에서 불안정한 고용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및 실업자를 총칭한다) 운동의 기수이자 최근 <성난 서울>(송태욱 옮김, 꾸리에 펴냄)을 쓴 우익 펑크밴드 출신의 작가 아마미야 카린(34)이 왔다.

젊은 시절부터 노숙의 기술을 갈고 닦은 후 '롯폰기 힐스를 불바다로!'라는 무시무시한(!) 슬로건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찌개를 끓이는 봉기(?)를 결행한 <가난뱅이의 역습>(김경원 옮김, 이루 펴냄)의 저자 마쓰모토 하지메(34)도 한국을 찾았다. 이들 둘은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와도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을 한국의 20대 셋이 맞았다. 기륭전자 단식투쟁에 동참했던 에세이스트 김현진(28)과 6년째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 '6년차 프리랜서 알바'가 공식 직함이라는 '알바 전문가' 루미(26), 그리고 이 모임의 유일한 정규직 노동자인 '20대 편집장' 노정태(27)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 다섯은 각자의 삶을 공유하면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얘기했다. 다섯 명의 수다는 4월 29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서교동 카페 '디디다'에서 열렸다. 통역은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한 후지이 다케시 씨가 맡았다. 두 차례에 걸쳐 이들의 수다를 싣는다. <편집자>

가난한 사람이 제일 강해?

프레시안 :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사는 다섯 분이 모였습니다. 독자 여러분을 위해 먼저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현진 :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정규직 생활을 마감하고 이 가게(디디다)에 취직했네요. 앞으로 시사 칼럼집과 독한 연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서울의 재개발 지역에서만 살아온 제 체험기를 책으로 낼 예정이에요. 아마미야 씨는 기륭전자 단식 투쟁 때 뵌 적이 있네요.

▲김현진. 몇 안 되는 20대 글쟁이 중 하나. <시사인>, <한겨레> 등 여러 매체에 활발히 기고하는 프리터(?). 기륭전자 단식 투쟁에 동참했다. ⓒ프레시안
루미 : 희망청 일을 그만두고 신촌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해요. 고교 시절부터 6년째 별의별 알바(아르바이트의 줄임말)를 다 해봐서 아예 '6년째 전문 프리랜서 알바'라는 글을 명함에 박아놨어요.

정태 : 앞의 두 분과 달리 정규직 노동자예요.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입니다.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외도를 하다 삶이 바뀌었습니다. 어쨌건 운이 좋아서 4대 보험이 나오는 일을 하고 있네요.

아마미야 : 저도 글 쓰면서 먹고 삽니다. 열아홉부터 스물네 살까지는 프리터(정식 직원 이외의 취업 형태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였어요. <생지옥 천국>(2000)을 시작으로 <프레카리아트의 우울>, <배제하는 공기에 침을 뱉어라>, <성난 서울> 등의 책을 썼습니다.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는 일본 젊은이의 삶이 주 소재입니다.

마쓰모토 : 고엔지(高円寺·도쿄의 변두리 동네)의 재활용 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점장인 마쓰모토 하지메입니다. 계속 프리터로 살아왔는데 아무래도 먹고 사는 문제가 크다보니 가게를 차리게 됐습니다.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돈이 별로 안 드는 생활을 하니 큰 문제 없습니다. 완벽한 삶이에요.

루미 : 전 비정규직 전문가(?)이지만 정규직이 되고 싶어요. 졸업하고 100곳이 넘게 입사원서를 냈는데 안 됐고, 그러다보니 이 생활을 계속 하고 있네요. 자칫하면 저를 보고 "의지가 없어서 안 된 게으름뱅이구나!" 하실지 모르겠는데 그건 아닙니다!

현진, 마쓰모토 : 왜 취직하고 싶은데요?

루미 : 대학 나왔잖아요. 거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 당연히 부모님의 기대가 클 수밖에 없죠. 첫째 딸인데 아직 부모님께 돈을 드린 적이 없어요. 어른이 됐는데도 부모님께 용돈만 받아봤지 드려보지 못한 거죠.

현진 : 나랑 반대네? 전 평생 부모님께 돈 갖다드려야 돼요. 아버지가 목사라 수익이 없으시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빈민이었던 셈이고, 그래서인지 저희 가족은 외환위기 왔을 때도 무슨 타격같은 걸 입은 기억이 없어요.

마쓰모토 : 제일 강한 게 가난한 사람이죠! (일동 웃음)

▲ 마쓰모토 하지메. 1994년 호세(法政)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노숙 동호회에 가입, 노숙의 기술을 갈고닦았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시위를 여러 번 주도해 일본의 새로운 시위문화를 이끄는 '프리터의 기수'. 노동절을 앞두고 한국에 '슬쩍' 들어왔다. ⓒ프레시안

경쟁사회에서 자유롭게 살기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만큼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둘의 공존은 쉽지 않다. 그래서 구직자들은 자유보다 안정적인 삶을 찾기 마련이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꿈, 혹은 자유를 위해 경제적 안정을 어느 정도 포기했다. 과연 두려움은 없을까? 점차 나이는 들어가기 마련인데.

프레시안 : 보수적인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 정해진 노선, 즉 정규직화에 적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의 기대를 못 채웠다는 점이 신경 쓰이지는 않나요?

아마미야 :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죠. 결국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늘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저나 마쓰모토 씨는 그게 가능한데, 외톨이 친구들은 넷카페 난민(PC방에서 숙식하는 사람을 지칭)이나 노숙인이 되는 거죠. 정규직이 아닌데 도와줄 사람도 없다면 순식간에 빈민이 됩니다.

마쓰모토 : 저는 완벽히 부모님의 기대대로 살고 있습니다. (자지러지게 웃는 걸 보니 다들 마쓰모토 씨의 책을 읽으셨군.)

아버지는 편집장 하시다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회사를 때려치우셨고요. 어머니도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전국을 돌아보고 싶다'고 하시며 혼자 이사를 다니기 시작하셨어요. 지금은 나가노의 산 속에 들어가셔서 자급자족 하겠다며 농사짓고 사십니다.

처음에는 '이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부모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으니 지금은 좋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알바 전문가' 루미. 하지만 그 역시 정규직만이 줄 수 있는 생활의 안정을 바란다. 루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든 아니든, 많은 20대가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한다. ⓒ프레시안
루미
: 아이고…, 그래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직장이 없다고 해도 책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만 봐도 부러운데요?

현진 : 책 써도 배고픈 건 마찬가지예요. 당장 내가 알바하면서 책 쓰잖아. 아마미야 씨는 책만 쓰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요?

아마미야 : 지금이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 괜찮지만 첫 책을 쓸 때는 고생 많이 했죠. 아르바이트를 못 하니 돈이 안 들어오잖아요. 다행히 담당 편집자 고향이 시골이라 부모님이 보내주시는 채소로 연명하면서 버텼어요. 그 사람은 밥 안 해 먹었거든. (웃음)

마쓰모토 : 도쿄니까 가능한 풍경이죠.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가 부모의 지원을 계속 받아가며 버티는…. 그래서 저는 친구도 시골에서 올라온 녀석만 골라가면서 사귀었어요. 그러면 먹을 문제가 해결되니까. 하하!

정태 : 일본 젊은이 생활도 한국과 비슷하네요. 오히려 용돈 받는 젊은이가 많은 걸 생각하면 일본보다 한국의 젊은이가 부모에게 더 의존하는 것도 같고요. 한국에서 마쓰모토 씨 부모와 같은 분을 가진 사람은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마쓰모토 : 음…. 그럴지도요. 대학에 가면 부모보다 선배, 친구들에게 더 기대니까요. 제가 산증인인데요, 선배를 꼬드겨서 4년 동안은 아예 대학교 안에서 살았어요. 우리 동호회 같은 경우 한 사람은 반드시 편의점에서 일하게 했어요. 그래야 남은 음식을 갖고 올 수 있거든. (통역하는 후지이 다케시 씨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이후로도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꽤 했다.)

현진, 루미, 정태 : 충격적인데요! 한국에서는 선배나 친구도 다 취업길을 가로막는 경쟁자인데.

마쓰모토 : 제가 특수한 경우죠. 십여 년 간 불황으로 취업빙하기가 지나가면서 요즘은 일본도 달라졌어요. 경쟁이 치열해지니까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더 기대게 되고 그만큼 자유는 사라졌죠.

▲ 아마미야 카린. 빈곤과 생존을 요구하는 운동에는 좌와 우가 없다며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절망에 빠진 일본 프리터의 오늘을 가장 생생히 얘기하는 인물 중 하나다. ⓒ프레시안

좌익 집회는 어려워서…

루미 : 아마미야 씨는 어땠어요? 대학 생활을 하지 않으셨는데.

아마미야 : 저는 우울한 일본 프리터의 전형이에요. 어릴 때는 부모님의 기대가 컸죠. 좋은 학교 가서 정규직 취업하는.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밴드 생활을 하고, 또 여러 번 가출을 반복하면서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어요. 당시 돌이켜 보면 일부러 부모의 기대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마미야 카린의 인생은 극적이다. 어린 시절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고 그 후에는 천황을 받들고 일본의 재무장을 도모하자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극우파 펑크밴드 '유신적성숙(維新赤誠塾)'을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좌파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쓰치야 유타카와의 조우를 시작으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청년 비정규직 문제와 빈곤 현상에 눈뜬 그는 일본의 오늘을 고발하는 문제적 글을 왕성하게 써내면서 정론지 <슈칸 깅요비(週刊 金曜日)>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쓰모토 : 밴드 생활하면서 우익 활동 했고, 우익을 그만두면서 밴드도 접었잖아요? 그냥 우익 활동만 안 하고 밴드 생활 계속하면 되지 않았어요? (루미 : 제가 아마미야 씨 나온 비디오 봤어요. 노래 못해요.)

아마미야 : 밴드 생활은 재미있었어요. 지금도 좌파 펑크밴드를 한다면 하고 싶어요. 제가 노래는 잘 못하지만 외치는 건 잘하니까. (웃음) 그런데 좌파에는 악기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말밖에 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행 이 부분에서 박장대소했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일본 우익은 그냥 깡패예요. 그래서 공연하러 다닐 때 어딜 가든 출입금지 당했죠. 그런데 이라크에 가서 공연하니 인기가 엄청났어요. 우익은 반미니까.

현진 : 왜 우익 활동을 한 거예요?

아마미야 : 딴 것 없어요. 혼자 홋카이도에서 도쿄로 와서 살다보니 기댈 데가 없었는데 우익단체 모임에서 소속감을 처음 가지게 된 것 뿐이에요.

처음에는 좌익 집회도 당연히 가봤죠. '경제도 어렵고 취업빙하기니 사회에 대해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그런데…, 좌익 집회는 말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우익은 쉬운데. (모두 공감의 뜻으로 한숨 '휴~') 그래서 우익단체 든 거죠 뭐.

▲ 노정태. 이 모임 참가자 중 유일한 정규직. 직함도 무시무시한(!) 편집장이다. 대화 내내 본인은 "월급이 얼마 안 된다"고 강조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모습. ⓒ프레시안
루미
: 보통 신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너의 가난은 네 책임'이라는 식이잖아요. 어떤 교육 받길래 이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된 건가요?

아마미야 : 집회에서는 그런 얘기 절대 안 나와요. 거기 구성원들도 대부분 가난한 프리터들인데 그렇게 책임 물을 이유가 없죠. 다만 '힘든 상황일수록 일본인으로서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주입시켜요. 그러면서 기댈 데 없는 젊은이들은 자아를 유지하게 되고.

헌법9조 개정, 일·미 안보조약 분쇄 따위 구호를 외치는 게 곧 자아 없는 젊은이들의 유일한 끈이 되는 거죠. 10년 전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그런 현상이 신자유주의 사회 초기에 나타나는 모습인 것 같아요.

(한·일 프리터 5인방의 '발칙한' 수다 下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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