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은 예정대로 30일 '근로자 포상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다. 전 방위적인 압박을 받으며 신음하고 있는 공기업노조가 속한 공공연맹 위원장은 예고대로 청와대에 가지 않았지만, 공공연맹은 새달 1일 열려던 집회를 취소했다.
명분은 국무총리실, 감사원, 노동부 등으로부터 공기업노조와의 면담을 약속받은 만큼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지난 27일 정부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를 피력하며 예고했던 한국노총의 "강력한 투쟁"은 또 한번 소리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셈이 됐다.
한국노총 "집중 면담 및 노사 자율 원칙 존중 약속 얻어낸 것이 성과"
공기업 노조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비판하며 '공기업 선진화 2차 과제 중단'을 요구했던 장석춘 위원장 등 한국노총 관계자들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노사협력 우수 사업장 포상 등 '근로자의 날' 기념 오찬에 참석했다. 불과 며칠 전 정부를 향해 "역대 독재정권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다"며 핏대를 세우던 한국노총 지도부가 정부와 한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인 것이다.
지난 27일 장석춘 위원장은 임금 삭감, 단협 평가 등 정부가 벌이고 있는 공기업 노조에 대한 탄압을 언급하며 "정부의 변화가 없다면 청와대 오찬 참석 여부를 다시 결정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노총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는 입장이다. 국무총리실, 감사원, 노동부, 기획재정부를 잇따라 항의 방문해 "노사 자율 원칙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또 새달 6일에서 8일 사이에 유관기관과 공기업 노조가 면담을 갖기로 한 것도 성과로 보고 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일단 대화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강력한 투쟁'은 6~8일 사이 열릴 면담 결과를 지켜본 뒤 다시 논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공공연맹이 노동절 기념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 계획이던 장외 집회를 취소한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명박 "한국노총이 있어 내가 자신감을 가진다"
한국노총의 태도 변화에 화답하듯 이명박 대통령도 이날 오찬에서 한국노총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노총이 주도적으로 제안했던 '노사민정 대타협'을 언급하며 "노사민정은 관이 주도한 게 아니라 민이 주도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이 앞서 줬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강력한 투쟁'을 예고하며 청와대 오찬 불참까지 시사했던 한국노총의 태도 변화에 화답하듯 이명박 대통령은 3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오찬에서 한국노총을 한껏 치켜세웠다.ⓒ청와대 |
이 대통령은 '오찬 불참'을 시사했다 입장을 바꿔 자리한 한국노총 관계자들을 향해 "여러분이 있기에 전대미문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며 격려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또 "5월의 시작은 '근로자의 날'인데, 가정을 지키는 것은 일자리 지키기와 직결돼 있다"며 "일자리는 기업이 만드는 것이며, 기업이 잘 되기 위해서는 노사가 잘 돼야 하기 때문에 한국노총에도 감사를 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불씨는 그대로…'강력한 투쟁' 해프닝의 승자는 정부
문제는 강력한 투쟁을 경고한 뒤 얻은 것은 '대화 테이블'일 뿐, 정부는 현재 추진 중인 공기업노조 등에 대한 압박 정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승수 총리는 지난 29일 장석춘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노사자율 원칙을 존중하겠다"고 했고, 성용락 감사원 사무총장도 "노동조합의 운영이나 노사관계에 개입할 뜻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원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현재 공기업에 대해 벌이고 있는 감사를 중단하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노동부가 산하기관 단협 평가 및 시정조치를 전체 공기업으로 확대하겠다던 계획도 그대로다. 이대로라면 공기업 곳곳에서 노사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현장의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임금 삭감 및 인력 감축 지시는 정부의 공기업 관련 핵심 정책이어서 면담으로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
불씨는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력한 투쟁'의 유보로 당장 발등의 불을 끄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게 된 것은 한국노총이 아니라 정부다. 게다가 청와대 오찬 불참 및 노동절 장외 집회 해프닝으로 한국노총은 스스로의 말의 신뢰마저 추락하는 부담을 고스란히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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