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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돈 벌 것도 아니고, 마음껏 치료라도 받았으면…"

산재 판단 앞둔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는 불안해

"제가 산업재해 인정 받아서 떼돈 벌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최소한 치료라도 마음껏 제대로 돈 걱정하지 않고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산재 신청 한 건데, 열심히 일하다 얻은 병인데 산재도 안 되나요?"

1991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한 지 14년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김옥이 씨가 자기 공장의 열악했던 작업 환경을 놓고 얘기하던 끝에 내뱉은 말이다. 지금까지 총 5차례의 항암 치료를 받았던 김 씨는 지난 17일 6개월 만에 골수검사 등을 하러 병원을 찾았다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고작 2시간 동안의 검사비가 무려 70만 원이었다. 치료를 마치고 재발 여부를 추적 관찰 중이라 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돈을 내면서 지금도 생활이 힘든데, 검사를 꼭 받아야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만일 또 재발한다고 하면 상상할 수 없는 돈이 또 들거예요. 1차 항암 치료 받을 때, 한 달여 입원에서 2000만 원 넘게 들었거든요. 이제는 그 치료비 감당할 돈도 없어요."

▲1991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해 14년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김옥이 씨(오른쪽)는 자기 공장의 열악했던 작업 환경에 대해 얘기했다. ⓒ<노동과세계> 이명익 기자

삼성반도체의 한 공장에서 같은 노동자들이 계속 잇따라 같은 병에 걸리는 것이 알려진 것은 지난 2007년. 그리고 대책위원회 '반올림'이 만들어진 뒤 피해자는 더 늘었다. 현재까지 반올림이 파악한 피해자 규모만 22명. 이 가운데 7명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는 5월 초 발표될 것으로 알려진 공단의 결정을 앞두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일터에서 건강을 잃은 노동자는 치료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문장을 재차 호소했다.

"검사비, 치료비 걱정 없이 마음껏 치료라도 받았으면…"

그간 반올림이 파악한 피해자는 대부분 삼성반도체 등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였다. 그러나 최근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6년간 일하다 소뇌부 뇌종양 판정을 받은 한혜경 씨도 반올림을 찾았다.

LCD를 만드는 일 역시 반도체 공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반올림은 한 씨의 질병도 산업재해라고 보고 있다. 한 씨가 입사 후 3년이 지난 뒤 무월경 상태가 계속됐던 것도 납크림(솔더크림), 플럭스, 아세톤 등 유기용제를 취급하는 그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얻은 병과 직업의 관련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노동과세계> 이명익 기자

21일 반올림이 주최한 '피해자 증언 대회'에서 한 씨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어렵게 무대 위에 올랐다. 뇌종양 제거 수술은 했지만 그는 현재 지체장애 1급이다. 혼자 힘으로는 몸을 잘 가누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안녕하세요"라는 말 한 마디를 떼기도 힘에 겨웠다.

한 씨의 어머니는 "솔더크림이 납 성분인지 뭔지 엄마들이 알게 뭐냐. 그저 삼성에 다니니 좋은 회사 다닌다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한 씨 어머니의 바람도 길지 않았다.

"지금 재활 치료를 받고 있지만 혜경이가 여기서 더 (장애가) 심해질지는 아무도 몰라요. 어차피 장애를 갖게 됐지만 돈 걱정 없이 치료라도 받았으면 좋겠어요."

한 씨도 지난 3월 산재 신청을 했다. 한 씨 어머니 입에서도 김 씨와 똑같이 "떼돈 받을 것도 아닌데"라는 말이 나왔다.

"사람이 아니라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한 방진복"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이 얻은 병과 직업의 관련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다루던 유해물질의 이름조차 잘 몰랐던 이들이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 반도체 공장은 다 이렇게 냄새도 많이 나고 그런 줄만 알았다"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자신의 일터는 참 위험하고 또 위험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며 만난 남편을 백혈병으로 먼저 보낸 정애정 씨는 "여직원 가운데 생리불순, 유산, 불임이 정말 많다"며 "그게 모두 작업 환경 때문이라고 나는 100% 확신한다"고 말했다.

"라인에 들어가기 전엔 에어샤워하고 방진복을 입는다. 그런데 이 방진복이라는 것이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으로부터 나가는 온갖 먼지 등은 차단되는데 외부의 화학물질은 고스란히 피부에 닿는다. 창문도 없고 통제된 공장에 들어가면 화학 약품 냄새가 정말 심하게 난다."

역시 백혈병 피해자인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도 딸이 삼성반도체에서 그런 병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자신의 딸과 같은 라인에서 일했던 이숙영 씨도 같은 병을 얻어 딸과 같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미가 백혈병을 얻기 전에 유미와 한 조였던 동료가 유산을 한 뒤 사표를 냈다. 그 자리에 이숙영 씨가 들어왔는데 6개월 뒤 유미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또 1년 여가 지난 뒤 이숙영 씨도 같은 병에 걸렸다."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사람이 잇따라 병에 걸렸다면 그 일 자체가 위험한 것 아니냐는 것이 황 씨가 주장하는 '상식'이다. 황 씨는 "우리 딸은 직접 반도체를 화학 약품에 담궜다 뺐다 하는 일을 했다. 각각의 화학 약품이 안전하다 해도 그들이 만나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우리가 하는 얘기는 참 쉽고 간단한데…"

피해자들이 한 목소리로 업무상 재해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나서자, 지난해 노동부는 반도체 산업 일제조사를 벌였다. 이들의 산재 신청에 따라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도 이어졌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비록 일반인에 비해 발병율이 높긴 하지만 반도체 공장의 환경과의 뚜렷한 인과 관계를 찾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조사 결론의 요지였다. 이 조사 결과에는 '건강 노동자 효과' 등이 배제돼 있어 결론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피해자들은 "행여 산재 인정조차 못 받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하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산재 승인을 받기 위해 이들은 참 오래 기다렸다. 고 황유미 씨의 가족은 햇수로 3년째 산재보상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반올림 활동가이면서 산업의학 전문의인 공유정옥 씨는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이 지연되면서 박지연 씨의 가족은 치료와 간병을 위한 비용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참 쉽고 간단한데 귀 기울이는 사람이, 알아듣는 사람이 이렇게 없다니 싶어 참 고통스럽다."

공유정옥 씨의 이 말은 질병과 싸우면서 경제적 고통과도 싸우고, 회사와도 싸우고, 심지어 근로자를 위한 곳이라는 근로복지공단과도 싸워야 하는 피해자들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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