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배우려 한 삼성
아들인 이건희 전(前) 삼성 회장과 손자인 이재용 전무가 일본에서 유학한 것도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학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이 전무를 일본 게이오 대학으로 유학 보내면서, 이 전 회장은 "일본을 본 뒤에 미국을 봐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미국 문화를 먼저 접하면, 엄정하고 꼼꼼한 일본 문화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본을 닮은 삼성 문화'는 한국 사회에서 대단한 경쟁력이었다. 중요한 결정이 합리적인 원칙 대신 인간적인 친소관계에 따라 내려지기 일쑤고, 충분한 사전 계산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업 방식이 흔했던 한국 사회에서 사무라이처럼 엄정하고, 장인(匠人)처럼 꼼꼼한 문화는 독보적인 힘을 발휘했다는 뜻이다. 사사로운 정(情)과 공적인 책임 사이에서 휘청대고 무모함과 대범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 한, 엄정하고 꼼꼼한 일본 문화는 앞으로도 한동안 교본으로 남을 게다.
삼성 수뇌부는 삼성답지않다?
그런데 "삼성은 일본 문화의 장점을 깊이 흡수했다"는 오랜 통념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겼다.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이 계기였다. 삼성 구조본에서 오래 일했던 김 변호사가 한국 사회에 전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직원들의 부정행위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삼성 수뇌부가 권력층을 상대로 광범위한 불법 로비를 벌였다는 게다. 능력과 공로 위주의 인사를 위해 회사 안에 동문회, 향우회 성격의 모임이 생기는 것을 철저히 막았던 삼성이 온갖 연줄을 이용해 권력층을 '관리'했다고 했다. 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치밀한 사전 검토와 계획을 강조했던 삼성이 회장 개인의 취향에 따라 즉흥적으로 사업을 벌이거나 접는 일도 흔했다고 했다.
1년 전의 사과와 쇄신 약속
이런 고백이 남긴 충격은 컸다. 이용철 전(前) 청와대 비서관이나 추미애 의원처럼 삼성의 불법 로비 시도를 자진해서 공개한 이들도 나왔다. 언론사에는 삼성 비리 관련 제보가 쏟아졌다. 결국 삼성 비리를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팀이 꾸려졌고, 관련 재판 심리가 대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특검이 삼성에 대해 봐주기 수사를 했고, 1·2심 재판부는 면죄부 판결을 했다는 지적은 이미 여러 번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봐주기 수사를 해도 이미 드러난 죄를 다 덮을 수는 없었다. 2008년 4월 22일, 이건희 전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회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래서였다.
▲ 2008년 4월 22일 삼성 쇄신안을 발표하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뉴시스 |
이게 정확히 1년 전이다. 당시 이 전 회장이 한 약속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법적 실체가 없으면서 막대한 권한만 행사했던 전략기획실을 없애겠다고 약속했지만, 투자위원회·브랜드관리위원회·인사위원회 등이 대신 생겼다. 이들 조직 역시 법적 권한과 책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영에서 퇴진한 이건희 전 회장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삼성을 조종한다는 이야기 역시 공공연하다.
어두운 과거를 씻어내겠다는 1년 전의 약속을 더 노골적으로 짓밟은 일도 있었다. 올해 초 삼성은 사장단과 고위 임원을 대폭 갈아치웠다. 창사 이래 최대 규모 인사라고 했다. 60대 이상 고령을 은퇴시키고, 50대 신진을 일선에 배치한다는 게 명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명분은 그저 구실에 불과했다. 비리로 이름을 더럽힌 경영자에게 더욱 강력한 보상을 해서 조직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한 구실이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광범위한 차명계좌 거래 사실이 확인돼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올해 초 인사에서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복귀했다.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 연루돼 기소된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은 삼성토탈 사장이 됐다. 삼성의 정보수집과 로비업무를 총괄했던 장충기 전 전략기획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서 삼성 브랜드 관리위원장을 맡게 됐다.
황창규, 이기태 등 '스타 CEO'들도 대거 물러나는 마당에 비리로 기소된 자는 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삼성 임직원들에게 "능력 있고 이름난 경영자는 잘릴 수 있어도 회장 일가의 비리 공범은 결코 잘리지 않는다"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꼼꼼한 삼성의 계산착오?
1년 전의 약속을 무시한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1년 전 삼성이 발표한 경영쇄신안에 따르면, 이건희 전 회장의 차명재산은 '실명전환 후 좋은 일'에 쓰기로 약속돼 있다. 그런데 2009년 3월까지 삼성 측이 공시한 내용을 다 합쳐도, 이건희 회장의 실명전환 주식가액은 삼성특검이 밝힌 차명재산 총액에서 최소 3000억 원에서 최대 6000억 원 정도 모자란다.
꼼꼼한 일처리를 그토록 강조하는 삼성 수뇌부가 '계산 착오'를 했을 리는 없다. 슬그머니 덮고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누가 이런 문제를 따지고 들겠느냐"는 삼성 수뇌부의 판단은 틀렸다. 2009년 3월 9일, 경제개혁연대는 이런 사실에 대해 삼성그룹 사장단협의회와 삼성전자 이사회, 삼성SDI 이사회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차명주식의 실명전환내역, △삼성특검수사결과발표 당시 차명주식의 평가액과 실명전환 주식의 평가액간의 차액내역, △차명재산의 사회공헌계획의 진행상황 등에 관한 질의서다.
이에 대한 삼성 측의 답변은 아직 없다. '조용히 무시하고 넘어가면 아무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라면, '세계 초일류 기업'을 지향한다는 삼성답지 않은 일이다. 세계적인 일류 기업은 소비자의 사소한 지적 하나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물며 회사가 공개적으로 한 약속의 이행 여부에 대한 공식적인 질의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삼성화재 미지급 보험금, 왜 안 돌려주나
삼성이 잘못을 슬그머니 덮고 넘어간 사례가 계속 쌓이면, 결국 '삼성맨'들에게 손해다. 덮어둔 잘못들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순간, "'삼성맨'들은 매사에 빈틈이 없다"는 평판도 결국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드러난 잘못에 대해 변변한 사과도 없이 적당히 넘어가버린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게 삼성화재 미지급 보험금 문제다.
삼성 특검 수사진은 지난해 1월 25일 새벽 서울시 중구 삼성화재 본관과 이 회사 전산센터 등을 전격 압수 수색 했다. 삼성화재는 고객에게 지급하기로 했으나 합의 등의 이유로 지급하지 않은 미지급 보험금, 고객이 잘 찾아가지 않은 렌트카 비용 등 소액의 돈을 따로 모아 차명계좌에 빼돌리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제보에 따른 것이다.
이 제보 내용이 언론과 시민단체에 알려졌을 당시, 삼성 비리를 오랫동안 연구했던 시민단체 관계자조차 "보험회사가 설마 그럴 리 있겠는가. 믿을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수사 결과 제보 내용은 사실로 드러났다. 다만, 미지급 보험금 등을 빼돌려 만든 비자금이 삼성 구조본에 전달됐다는 대목에 대해서만 논란이 됐을 뿐이다. 제보 내용과 달리, 삼성 특검은 황태선 전(前) 삼성화재 사장 개인의 횡령으로 결론을 내렸다. 특검의 이런 판단을 다시 문제 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다른 중요한 문제는 남아 있다. 삼성화재가 빼돌린 미지급 보험금 등은 결국 고객의 돈이다. 이 돈을 고객의 몫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삼성답지 않다. "매사에 빈틈없는 일처리"를 강조하는 삼성이라면, 고객에게 깊이 사과하고 빼돌린 돈을 반납하는 게 옳다.
일본 문화 배울 바엔, 제대로 배워야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하게 하는 엄격한 기업 문화는 아직까지 한국 경제에도 유익하다. '연고주의', '적당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렇다. 이런 면에서 일본 문화의 장점을 배우려 했던 이병철 가문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그리고 1년 전 삼성이 공개적으로 한 약속들을 돌아보면, 이런 노력은 더 필요한 듯하다. 에도 막부 시대 이후 활발히 피어난 일본 상인 문화의 특징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 상인들이 유독 착했기 때문은 아니다. 약속을 어긴 상인은 철저한 보복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국으로 도망치기도 힘든 섬나라에서 약속을 어긴 상인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 문화의 장점을 배울 바엔, 제대로 배우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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