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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법원 속기사, 제조업 정비공보다 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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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법원 속기사, 제조업 정비공보다 골병

76%가 근골격계 질환 의심…"'우아한 전문직'이라구요?"

정장을 입고 법정에 앉아 오가는 재판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법원 속기사. 사람들은 그들을 "우아한 전문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그런 시선에 법원 속기사 11년 차인 최우정(가명) 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 실상을 잘 모른다는 억울함이 묻어났다.

76%가 근골격계 질환이 의심되고, 목·어깨·허리·손목 등 7개 부위 가운데 세 부위 이상의 통증을 경험한 사람이 86%나 되는 집단. "자동차 부품업체 노동자, 철도 정비공 등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노동건강연대와 인천대 노동과학연구소가 6일 발표한 '법원 속기사 건강 실태 조사 결과'를 보고나니 "나도 직접 해보기 전엔 우아한 일인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던 최 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이날 조사 결과 발표 자리에서 잇따른 법원 속기사의 증언은 놀라웠다.

국내 최초로 법원 속기사에 대한 건강 상황을 조사한 정최경희 산업의학 전문의도 "위험수위가 높게 나올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결과를 보고 정말 놀랐다"고 말했다.

"한 번 재판 들어가면 새벽 3시까지 혼자 담당"

"업무량이요? 살인적이죠. 어떤 사건은 오전 10시부터 재판을 시작해 평균적으로 밤 11시까지 했어요. 점심도 한 시간 아닌 딱 40분 먹고 들어갔고요. 그 사건은 그렇게 세 달을 일했죠."

김지선(가명·35) 씨의 말이다. 점심 시간을 빼더라도 무려 12시간 넘게 계속 일을 한 셈이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재판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00 사건에 대한 재판의 경우 기본이 새벽 3시"였다.

법정에서 일하는 시간만 '살인적으로 긴' 것이 아니다. 속기사는 법정에 앉아 재판 과정을 기록하고 사무실에서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정돈된 문서로 만들어내는 작업까지 해야 한다. 속기사들은 "법정에서 1시간이면 그 내용을 정리하는데 3~4시간이 걸린다"고 입을 모은다. 당연히 "일이 항상 밀려"있다.

특히 법원 속기사는 다른 곳과 달리 유독 한 사람이 한 재판을 모두 담당한다. 쉴 틈이 없는 것이다. 2인 1조 체제인 국회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법원에 오게 됐다는 최상희(가명) 씨는 "속기사 한 명이 몇 시간씩 일하는 곳은 법원 뿐"이라고 말했다.

"의회는 20분 간격으로 교대하고, 국회도 2명이서 교대를 하죠. 심지어 한글 자막방송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7시간 동안 내리 혼자 일해요. 휴식 시간이 보장되기는커녕 화장실 가는 일도 쉽지 않아요."

86%가 "목·어깨·손목 등 7곳 중 3곳 이상 통증" 호소

건강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정최경희 전문의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일을 휴식 없이 하게 되면 시간당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하게 되는데 자연히 도일하나 시간에 근골격계에 더 많은 부담을 주게 되니 장애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7년 전 2명으로 시작해 2009년 현재 612명에 달하는 법원 속기사는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여성이다.

"손목 아픈 걸 표현을 못해요, 겪어보지 않으면. 말은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걸 실제로 계속 친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자양강장제 광고에 보면 검은 게 어깨에 매달려 있잖아요? 그런 게 10개는 매달려 있는 것 같아요."

김지선 씨의 말이다. 실제 조사 결과에서도 심각성은 확인됐다. 한 부위 이상 통증을 호소한 사람이 전체 응답자 421명 가운데 97.4%로 그 가운데서도 어깨 통증을 호소한 사람은 93.9%였다. 거의 대부분인 것이다. 그 다음이 목(83.2%), 손목(78.3%), 허리(74.4%) 순이었다.

미국 보건연구원(NIOSH) 기준으로 전체의 91.6%가 관리대상자로 나타났고,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인천대 노동과학연구소 조사 결과 76.0%가 근골격계 질환이 의심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심지어는 철도정비(57.1%)나 병원(69.2%), 자동차부품(47.6%) 종사자보다 더 심각했다. 김철홍 인천대 교수는 "국내 산업계 평균이 40~50%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비율"이라며 "거의 모든 항목에서 대한민국 최고"라고 말했다.

"직무 스트레스, 상위 25%군…사회심리적 스트레스 고위험군도 42.6%"

심리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건강군은 2명에 불과했다. 잠재적 스트레스군이 56.9%, 고위험군이 42.6%로 나타났다. 정최경희 전문의는 "직무 스트레스도 총점 58.7점으로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상위 25%군에 속했다"고 말했다.

이는 속기사 자체의 업무 특성과 더불어 법정의 특수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개 피고인은 말을 웅얼웅얼하기 일쑤다. 말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해 기록으로 남기려면 한 마디를 위해 몇 번씩 녹음된 것을 돌려들어야 한다. 12년 차 속기사 백사연(가명) 씨는 "얼마나 집중을 요하는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첫째 임신 중의 일이었어요. 어떤 증인이 아줌마였는데 목소리도 엄청 커서 그냥 듣기에도 거북한데 더군다나 찢어지는 목소리였어요. 그걸 녹음기로 듣다가 껐다가를 반복하면서 일을 했는데, 내용을 들으려고 카세트 녹음기를 켜면 뱃속에 잇는 아기가 발로 차고, 끄면 가만히 있고, 또 켜면 발로 차고. 아마 자기도 듣기 싫었던 모양이에요."

"'책상에 속기기계 놓기 어렵다' 했더니 서랍의 앞면을 잘라 줬다"

김철홍 교수는 "이런 건강 상태에는 업무 자체의 특성도 있지만 작업 환경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법정과 사무실 등 현장 조사 결과 근골격계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하'군으로 분류된 작업장이 전체의 43.7%에 달했다.

20대인 미혼의 속기사 이지혜(가명) 씨는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법정 리모델링을 하면서 책상과 의자를 모두 바꿨는데, 속기기계를 놓을 컴퓨터 책상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나봐요. 일반 서랍식 책상을 놓고 쓰게 됐는데 서랍을 뺀 채로 그 위에 기계를 놓아보니 당연히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건의를 했더니 관리실에서 서랍의 앞면을 잘라 주더라구요. 그 상태로 속기기계를 놓고 사용했어요."

배려가 없는 것이다. 30대 여성 송지우(가명) 씨도 "우리 목소리는 법원에서 아무도 안 듣는다"고 했다.

"속기사가 부속실에서 과로 내려오기로 결정됐을 때 제일 구석 자리에 배치되기로 돼 있었어요. 그런데 출근해보니 어떤 얘기도 없이 출입구 앞으로 자리가 바뀐 거예요. 그 자리는 민원인이 찾아와 문의를 하면 안내도 해야 하고, 전화도 받아줘야 하고, 다른 부서 전화 벨소리, 카터기 소리 등 소음이 많은 곳이거든요. 당연히 일하면서 볼륨이 높아지죠."

이 씨는 "아무래도 법원이 속기사들한테 신경을 덜 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분명히 법정에 있었지만 법정에는 없는 사람"

근무환경에만 무심한 것이 아니다. 재판 과정에 대한 기록의 그 어디에도 속기사의 이름은 없다. 이 역시 국회 등 다른 기관과 다른 점이다.

속기 1기로 법원에 들어 온 17년차 속기사 김은주(가명) 씨는 "조서에 조서를 작성한 속기사의 도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여관의 도장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법원에서 속기사는 참여를 보조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17년차 속기사 김은주(가명) 씨는 "조서에 조서를 작성한 속기사의 도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여관의 도장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법원에서 속기사는 참여를 보조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뉴시스

그는 "우리는 분명히 법정에 있었음에도 법정에는 없는 사람인 것"이라고 말했다. 신분이 보장되지 않은 34.5%의 계약직 속기사가 느끼는 옅은 소속감은 더 심각했다.

"내가 작성한 기록이지만 그 어디에도 내 이름이 없는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들, '이름도 없는' 법원 속기사의 바람은 건강하게,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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