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남자>는 불행한 시대에 행복한 드라마였다. 한국 경제엔 희망이 없다. 더 나은 직장을 얻고 더 나은 옷을 입고 더 나은 차를 몰고 더 나은 밥을 먹을 희망이 없다. 몇 년 전엔 달랐다. 다들 사회 조직 안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겼다. 희망은 현실 안에 있었다. 희망은 욕망이 됐고 욕망은 경제를 움직였다. 그러나 지금 희망은 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에 있다. WBC야구에 있고 김연아에 있고 <꽃보다 남자>에 있다. 희망만 가득찬 듯 보이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대중문화로 진실을 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의 끄트머리까진 그랬다. 이젠 다르다. 절망만 가득찬 듯 보이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누군가 희망을 보여주길 바란다. 설사 그게 거짓이고 찰나적일지라도 탐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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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는 초상류층과 서민층의 동화적 화해를 말했다. 입을 것, 볼 것, 탈 것, 꿈꿀 것을 나열하면서 가짜 만족을 줬다. 누군간 그게 가짜라며, 허깨비에 유난떠는 대중의 우매함을 질타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걸 증폭하는 미디어를 꼬집고 싶을수도 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매정한 얘기다. 그런 입바른 소리 따윈 이 불행한 시대에 사람들한테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유치원 시절의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주의적 숙명이다. 아무도 그걸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현실엔 욕망을 실현할 희망이 없다. 대중이 자꾸만 그 희망을 환상에서 찾는다는 건 시대의 비극이다. <꽃보다 남자>는 고마운 드라마였다. 애통한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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