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남자 ⓒ kbs.co.kr |
그런데, 일본과 대만의 대중은 <꽃보다 남자>에 열광했다. 분명 양극화는 시대의 트랜드였다. 세계적인 트랜드였다. 만화 <꽃보다 남자>가 처음 출판됐던 1990년대 중반 일본은 거품 붕괴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중산층은 서민이 되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됐다. 드라마 <꽃보단 남자>가 방영을 시작하던 2005년 무렵 일본에선 후지이 겐키의 공포 소설 <90%가 하류로 전락한다 – 한 일본 지식인이 전하는 양극화의 미래>가 출판됐다. 하류 사회나 하류 인생 같은 단어들이 일본의 유행어가 됐다. 일본어 원래 제목은 <미래로 오를 수 없다 Never-Climbing Society>였다. 정말 현실에선 오를 수가 없었다. 일단 추락하면 다른 끝과 만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는 모든 걸 다 가진 자와 아무 것도 없는 자의 사랑스런 화해를 상상했다. 끝과 끝의 만남은 현실에선 절박했지만 절연했다. 그건 환상 속에서나 가능했다. <꽃보다 남자>는 환상을 눈 앞에 보여준 재미난 드라마였다. 대중들은 환호했다. 그래서 더 비극이었다. 현실의 절망에 순응한 서민들은 환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국의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도 강만수 장관이 말한 시대의 트랜드가 흐른다. 부자와 서민이 있다. 부자도 그냥 부자가 아니다. 부자도 부러워하는 부자다. 삼성을 연상시키는 신화 그룹이 나오고 신화 그룹이 운영하는 부자들만의 고등학교인 신화 고등학교가 있고 그 안에서도 상류의 상류인 F4란 꽃미남 집단이 등장한다. 서민도 그냥 서민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세탁소집 딸이다. 장차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삼보 일배를 하게 될 운명이 아니라면 영원히 세탁소집 딸로 기억될 팔자다. 현실에서 양쪽이 만날 일은 없다. 부자들은 동네 세탁소에 가지 않는다. 세탁소집 딸은 청담동에 갈 돈이 없다. 그들이 만나는 곳은 고등학교다. 하지만 <꽃보다 남자>의 배경이 교복 입은 고등학교이란 게 가장 절박한 비극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오랜 세월 신분 상승의 수단이었다. 학교에선 부잣집 아이든 가난한 집 아이든 어우러져야 했다. 공부 잘 하는 가난한 집 아이는 학교에서만큼은 부잣집 아이한테 꿀릴 일이 없었다. 양극화의 현재는 다르다. 교복을 입어도 신분이 드러난다. <꽃보다 남자>의 세탁소 집 주인 아버지는 신화고등학교의 교복을 보고 말한다. "세탁소를 오래 했지만 이런 명품은 처음 본다."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몇몇 외국어 고등학교는 이미 과거의 명문고 신화를 재현하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명문고엔 서민의 똑똑한 자식들과 예술에 미친 부잣집 또라이 아들들과 아직 교육의 힘을 믿는 선생님이 있었고 현재의 명문고엔 자신의 계급을 수성하려는 부잣집 아이들과 엘리트 교육을 숭배하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 정도다. 공정택 교육감의 숙원 사업인 국제중학교가 만들어지면 그렇게 끼리끼리 학교 다니기의 습성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로 결국엔 초등학교로 번지게 된다. 학교가 사회 계층이 어우러지는 장이 되던 시대는 끝났다. 교육이 경색되면서 마지막 계층 상승의 문마저 닫혔다. 일본에서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방영될 무렵 후지이 겐키는 말했다. "사회의 90%가 하류로 전락한다. 다시 올라갈 수 없다. 계급 사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2009년 한국의 <꽃보다 남자>와도 공명하는 이야기다. 얼마 전까진 한국사회에서도 20대80사회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가 널리 읽혔다. 양극화와 세대 착취를 이야기했다. 불우한 20대에 대한 걱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대중은 MB를 선택했다. 다시 한번 시대의 트랜트에 순응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한국에서도 새해 벽두에 <꽃보다 남자>가 방영을 시작했다. MB정부가 들어선지도 1년이 돼 가고 있다.
▲ 꽃보다 남자 ⓒ kbs.co.kr |
<꽃보다 남자>는 어쩌면 시대에 순응한 대중에게 주어질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뉴스위크>는 지난 8년 동안 부시 시대를 가장 잘 드러낸 대중문화 작품으로 <아메리칸 아이돌>을 뽑았다. <뉴스위크>는 "지금처럼 전쟁으로 피폐한 시대에 <아메리칸 아이돌>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그 프로그램이 미국인들에게 두툼하고 포근한 담요처럼 느껴진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허구를 드러낸 드라마 <24>가 방영되기 직전에 이 프로가 방송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라고 썼다. <꽃보다 남자>는 MB정부의 <아메리칸 아이돌>이다. 구태여 머리 아픈 신자유주의 얘기를 다시 꺼낼 필요도 없다. 우린 일상에서 부자들을 만날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차를 타고 있거나 아늑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거나 고급 호텔에서 머문다.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은 뉴스를 통해서거나 세탁물을 배달할 때뿐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시작돼서 일본과 대만을 집어삼킨 자본주의의 트랜드는 이미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5일 저녁 방영된 <꽃보다 남자>의 첫 회 시청률은 14.3%가 나왔다. 썩 괜찮은 출발이다. 그러나 부디 <꽃보다 남자>의 시청률이 나빠지길 바란다. 한국의 대중은 일본이나 대만이나 미국의 대중과 다르길 바란다. <대중이 <꽃보다 남자>에서 허깨비 위안을 얻기 보단 역한 분노를 경험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도 소위 서민들에게 주어질 행복이란 고작 <꽃보다 남자>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의 트랜드에 순응한 대중의 초상은 이미 <꽃보다 남자> 곳곳에 어려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남동생은 유쾌하다. 솔직하다. 그들은 딸이 부자 학교에 다니게 된 걸 진심으로 기뻐한다. 노골적으로 부잣집 아들과 이어지길 바란다. 사심 없이 딸의 성공을 기원하는 가족의 사랑은 갸륵하다. 신화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자신보다 부유한 자들에게 복종하고 자신보다 가난한 자에게 군림한다. 그래야 자신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급에서 추락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 계급인 F4가 만든 법과 질서에 순종한다. MB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질서가 낳을 미래가 <꽃보다 남자>의 작은 고등학교 안에 있다. 이 모든 게 지금 한국 사회의 단면이다. 강만수 장관이 옳았다. 정말 양극화는 시대의 꽃 같은 트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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