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전국 초등학교 4학년~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치러진 일제고사(교과 학습 진단평가)를 보지 않은 학생·학부모 400여 명은 체험 학습을 위해 경기도 여주 신륵사와 남한강 일대를 찾았다. 봄날에 제격인 소풍이었다. 그러나 참가한 학생의 생활기록부엔 이날 '무단 결석'이라는 단어가 표기됐다.
생활기록부에서 무단 결석이란 고의로 연락 없이 학교에 가지 않은 경우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가출하거나 학교에서 징계받을 때도 무단 결석으로 처리된다. 법으로 허용하는 체험 학습을 가겠다며 담임 교사 또는 교장·교감과 수차례 연락을 했던 학생과 학부모는 결국 이런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했다. 교육 당국은 교육과학기술부 안병만 장관을 필두로 "조직적으로 시험을 방해할 때는 엄중 대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렇게 즐거운 봄 소풍은 '비장한 투쟁'이 되어 버렸다. 10년 만에 일제고사를 다시 치르게 된 지난해부터 나타난 새로운 풍토다. 강가에서 물 수제비를 하고 있는 일행에게 "혹시 거기 경찰이 가진 않았느냐"라는 걱정스러운 연락이 오기도 했다.
누가 왜 그들에게 봄날, 자연과 함께할 하루의 자유마저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 교사들로부터 체험 학습을 간다는 학생더러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 해줄 자유를 빼앗은 것은 누구일까? 이날 체험 학습에 참가한 학생과 학부모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생생하고 기이한 '역사적 기록'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로 저를 평가해주세요"
▲ 체험 학습으로 경기도 여주 신륵사를 견학한 학생들. ⓒ프레시안 |
서울 서초구에서 초등학교 5학년, 1학년 두 자녀와 함께 온 박천숙(38) 씨는 올해 처음으로 아이가 일제고사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가 시험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교사 해직 사태였다.
일제고사의 선택권을 안내했다는 이유로 서울 지역에서만 9명의 교사가 파면·해임된 사태는 그를 포함한 학부모들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번 체험 학습이 보다 '비장한' 성격을 띠게 된 직접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며칠 전 박 씨가 체험 학습에 참가하겠다며 아이의 담임교사에게 편지를 보내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선생님이 뜻에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며 "교육청에서 체험 학습을 허용할 수 없고, 무단결석 처리한다는 공문을 보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자녀와 함께 온 서울 동작구 김종옥(48) 씨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그는 "시험 전날 담임에게 갔더니 교장까지 내려와서 '애 성적도 괜찮은데 왜 그러냐'고 묻더라"며 "심지어 이번 시험은 표집 검사라며 설득했는데 거짓말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그의 자녀는 지난해 이미 일제고사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 차원에서 시험을 보지 않은 경험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개인적 차원에서 안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교사들이 줄줄이 해직되는 것 보고 깜짝 놀랐다"며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정부가 밀어붙이는 것을 보고 '체험 학습 싸움'에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왜 공부만 등수 매겨요? 노래도 춤도 다 등수 매기면 몰라도"
▲ 체험 학습을 온 학생들에게는 어디든 놀이터가 됐다. ⓒ프레시안 |
시끌벅적한 서울 D초 5학년 학생들은 한 반에서 8명이 같이 온 '대집단'이었다. 애초 체험 학습에 오기로 한 학생은 15명. 절반으로 줄어버린 일행에 대한 아쉬움이 들뜬 목소리에서 물씬 묻어났다.
이 반의 담임교사를 맡은 O교사는 지난 30일 일제고사를 반대한다며 불복종 운동을 선언한 123명의 서울 지역 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했던 일은 지난해 해직된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일제고사와 체험 학습의 선택권을 안내한 것이다. '불복종'과 '해직'이라는 무거운 단어의 배경은 사실 이렇게 시험을 보기 싫어하는 초등학생에게 소풍 갈 기회를 준 것뿐이다.
그러나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5학년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4학년 때 학생들을 맡았던 담임 교사까지 총동원됐다. 이런 '꾐'에 넘어가지 않았던 아이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시험은 재미없고 지루해요. 5시간 동안 어떻게 시험을 봐요?", "작년에도 배우지 않아서 모르는 문제 나와서 짜증이 났어요."
부모들이 서로 잘 알아 자신들도 친해졌다고 소개한 안양의 세 여학생은 지칠 줄 모르는 수다 속에서도 일제고사와 우리나라 교육 현실의 문제점을 따끔히 지적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문 모 학생은 "이런 시험을 안 보는 건 당연하다"며 "시험을 봐서 등수를 매기면 위에 있는 사람은 밀리지 않게 학원에 다녀야 하고 아래 있는 애는 창피해진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조 모 학생은 "시험 보고 나서 쟤는 1등, 쟤는 꼴등 이러는 게 싫다"며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나는 듯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1학년인 김 모 학생은 "엄마가 학원과 공부를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학교 선생님들은 당연히 학원에 다니는 줄 알고 대충대충 가르쳐서 공부하기 어렵다. 그게 너무 싫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지금 시험 보고 있는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입을 모아 "불쌍하다"고 답했다. 이어진 대답은 친구가 아닌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불쌍한 아이들아, 공부의 노예가 되지 마라."
"인생은 공부가 전부가 아니다. 공부를 위해 사는 게 인생이 아니다."
"왜 공부만 갖고 등수를 매겨요? 노래 잘하는 사람도 있고, 무용 잘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예 그것 모두 등수 매기면 몰라도."
"내가 그 반 애들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강원도 원주에서 온 5학년 이민우(가명) 학생은 장래의 꿈이 고고학자라고 했다. 그는 "꿈을 이루려면 이런 시험을 봐야 하지 않냐"라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더니 "비교하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는 것 아녜요?"라고 말한 뒤 냉큼 뛰어갔다.
역시 원주에서 온 학부모 이정희(40) 씨는 "일제고사 거부가 정치적인 행동에 아이들을 동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말이 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내가 반대하는 이유는 일제고사가 많이 가진 소수를 위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시험 위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사실 애들은 그런 사회의 피해자 아닌가."
이 씨는 이번 시험 성적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을 두고 "더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등수를 공개하지 않을 거라면 왜 결석 처리를 하면서까지 굳이 애들 한 명 한 명에게 시험을 보게 할 필요가 있나"라며 "선생님이 성적 조작 의심을 받을 수 있어서 반드시 봐야 한다는데, 아프면 어찌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말 안 하더라"고 덧붙였다.
이날 참가자 중에는 지난해 교사들이 해직될 때 항의했던 학부모와 학생들도 있었다. 강가 모래밭에서 물 수제비를 하고 맨발로 걸으며 즐거워하던 학부모 정 모씨는 이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간 아이가 겪은 일들을 설명하며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자녀는 지난해 해임된 서울 거원초 박수영 교사네 학급이었다.
"학교에서 작년에 그 반이었던 애들 명단을 적어오라고 했다더라. 생활지도를 맡은 교사가 '내가 6학년 9반이었던 애들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라고 했다고…. 아이들에게 인격 모독을 하는데 좀 많이 놀랐다.
체험 학습을 간다고 담임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이가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사이에 학교에서 전화가 6통씩 와 있더라. 나와 아이는 그냥 시험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인데, 왜 학교에서는 이걸 '나쁜 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 이날 남한강 생태 탐사 행렬은 갈대밭 산책길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프레시안 |
"졸렬한 기 싸움, 조롱해야 마땅"
신륵사를 돌아 남한강 일대 갈대밭을 산책하고, 버들피리를 만들고 물수제비를 뜨고, 돌탑 등을 쌓으며 진행했던 이날 체험 학습은 오후 4시경 마무리됐다. 강가를 따라 약 4.5킬로미터(㎞)를 걷는 빡빡한 일정에도 시험을 보지 않고 야외에 나온 아이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흔치 않은 기회여서 더욱 좋았다는 학부모 박천숙 씨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교장이 진짜 갔는지 확인하라고 해서 담임이 전화를 했더라"며 씁쓸해했다. 그의 아들은 옆에서 "요즘엔 게임보다 이렇게 밖에서 매일매일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며 고백하기도 했다.
평화로운 하루였지만 박 씨는 일제고사를 둘러싼 갈등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걱정된다고 말했다. 1989년 초등학교 6학년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 사태를 몸소 겪기도 했던 그는 특히 150여 명의 교사가 공개 선언을 한 점을 두고 "100명 자르긴 쉽지만, 1000명 자르긴 어려울 것"이라며 "징계를 알면서도 용기 내서 발표한 선생님들을 존경하지만, 좀 더 많은 선생님이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학부모인 박 씨와 김종옥 씨가 똑같이 한 말이 있었다. 시험 대신 체험 학습을 안내한 교사를 대거 해직하고, 무단결석을 운운하며 학생에게 일제고사를 강제하는 정부의 행태는 유치하고 졸렬한 '기 싸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이번 논쟁에서 밀리면 일제고사를 못 볼 뿐만 아니라 다른 정책도 추진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전교조의 시도를 처음부터 좌절시키려는 게 아닐까."
"사실 이건 투쟁이 아니라 조롱할 일이다. 기 싸움에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이가 대체 누구인가. 하다못해 날씨가 이렇게 좋은 날,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배우는 기쁨을 무슨 근거로 막겠다는 것인가?"
▲ 이날 체험 학습은 대형 붓글씨 걸개를 그리고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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