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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전태일 통신 <1> 비정규직 노동자의 오늘과 내일

프레시안은 전태일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전태일통신>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11위의 GNP와 국민소득 1만5000달러의 경제선진국으로서, 또한 민주주의를 빠른 시간 안에 정착시킨 모범국가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600만~700만을 헤아리는 빈곤층과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태일통신>은 사랑과 평화의 정신으로 가득했던 전태일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오늘날 고통받고 있는 소외계층의 생생한 삶의 실상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신문고이고자 합니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는 지금 당장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촛불 하나라도 켜는 일이야말로 극단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를 보다 더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로 나아가게 만드는 작업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 중에건 지향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광풍에 대한 성찰의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매주 1회 정도로 계획하고 있는 <전태일통신>의 진행은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주관할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으로서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참여 속에 운영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투고를 부탁합니다. 투고할 곳은 이메일 chuntaeil@chuntaeil.org, 전화 02-3672-4138, 팩스 02-3672-4139 또는 (110-542) 서울시 종로구 창신 2동 131-106 전태일기념사업회입니다.

이 <전태일통신>은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이메일링 편지로도 배달됩니다. 기념사업회 누리집 주소는 www.chuntaeil.org입니다. <편집자>

***하나**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1년, 나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현대자동차, 2ㆍ3차 업체인 현대비즈니스에 입사했다. 면도칼 공장이다, 시계 케이스 공장이다, 여러 군데를 떠돌아다녔어도 주야 맞교대만큼 돈 되는 데가 없겠다 싶어 입사한 자동차 공장,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공장 안에서도 제일 후지다는 2ㆍ3차 업체에 입사한 것이다.

자동차 공장에서 2ㆍ3차는 1차와는 다르게 그 계약이 2중, 3중으로 체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자동차는 아폴로에게 하청을 주고, 아폴로는 현대비지니스에게 하청을 주고… 하는 식으로. 사실 솔직히 말하면 현대자동차 공장 안에서 누구나 기피하는 3D 업종을 2ㆍ3차 업체가 맡아 하고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암튼 같은 하청이라도 1차 업체냐, 2ㆍ3차 업체냐에 따라 비정규직 안에서도 임금, 복지수준 등이 상당히 다르다. 하긴 떼어먹는 곳이 중간에 하나 더 있으니 그럴 수밖에….

입사 첫날, 마치 하나의 도시 같던 공장의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공장 위 아래로 움직이는 콘베이어가 어찌나 신기하던지 입을 다물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첫 입사일의 부푼 마음도 단지 며칠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하청 노동자로서의 '인간차별'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야간 근무를 할 때의 일이다. 라인에서 주변의 직영 아저씨들과 1차 업체 하청 친구들과 이야기도 해가며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다들 출출해질 무렵, 라인 조반장 아저씨들이 빵과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원래 야간이 되면 지급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나누어 주었는데… 내 것은 없었다. 우리 업체는 2ㆍ3차 업체이기 때문에 야간에 빵과 음료가 지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들 모여 앉아서 간식을 먹는데,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뭣 하고, 쳐다보고만 있기도 그렇고, 얼굴만 벌개진 채 앉아 있어야 했다.

조금 우스운 일도 있었다. 산업 뭐 어쩌고저쩌고 라는 곳에서 안전시설 점검을 나오는 날이라고 했다. 생판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던 사장님께서 직접 직원 모두를 불러 모았다. "안전교육은 이렇게 받았다고 해라!", "안전화는 다 지급받았다고 해라!" 그 구구절절한 잔소리…. 사실 우린 안전교육 시간에도 일을 하거나 현장 청소를 해야 했고 안전화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안전모를 쓴 낯선 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높으신 양반은 정말 높디높은 양반인가보다. 사장님, 소장님, 반장까지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전모를 쓴 그 양반, 내 옆에서 일하는 어린 친구에게 안전화는 언제 지급받았냐고 물었다. 사장님 잔소리 시간에 화장실에 갔던 그 친구 "안전화가 뭐예요?"라고 대답했고, 그 높으신 양반을 급하게 사무실로 모셔가던 사장님 얼굴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린 "이제 우리 사장님 사단 났다"며 약간은 들떠 있었는데 사실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

차별에 대한 저항은 서서히 나타났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이 끝나고 직영과 1차 하청업체에겐 성과금이 지급되었는데,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들 수근거렸고, 그 수근거림을 막으려고 사장님께선 특별히 500원짜리 음료수를 직원 전체에게 나눠주었다. 하지만 그 수근거림은 500원짜리 음료수로 전혀 덮어지지 않았다.

특근이 있던 날, 모두 출근해서 성과금 지급을 요구했다. 사장님은 본청에서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누가 그리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모두 특근을 거부했다. 3일 동안 자발적인 잔업거부가 이어졌지만 사장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젊은 남성 직원들은 술을 엄청시리 먹고는 이런 X같은 회사에선 일하기 싫다며 출입증을 내던져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끝났고, 나는 남았다. 그 땐 정말 노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벌써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이후 노동조합의 전신인 '비정규직투쟁위원회'의 투쟁으로 회사 창립 10년 만에 지급되었다고 하는 눈물 젖은 (간식)빵도 먹게 되었고 안전화도 지급받았다. 그리고 작년에는 비정규노조의 파업투쟁으로 성과금의 일부도 지급받았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몸소 느끼는 뼈저린 차별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미팅을 나가도, 맞선을 나가도 "직영이예요? 하청이예요?"라는 질문이 일상화되어 있을 정도로 차별은 이제 현장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다.

***둘**

내가 류기혁(*편집자 주: 2005년 9월 4일 현대자동차 비정규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자살한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조 조합원)을 만난 것은 현대자동차 비정규노조 간부를 하면서 한참 바쁠 때였다. 기혁이는 나와 같은 공장이라며 검은 봉지 가득 먹을 것을 사가지고 노조 사무실을 찾아왔다. 동갑인데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친구였다. 언제나 그랬다. 어느 곳을 가건 기혁이는 검은 봉지를 빼먹은 적이 없다. 술 한 잔 마시면 "이번 일 끝나면 고향인 영덕에 한번 놀러가자"는 말도.

기혁이는 특출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가 현장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동료, 숫기 없고 부끄럼 많이 타는 그런 동료였다.

그런데 그렇게 순박한 기혁이는 언제부터인가 늘 괴롭다는 말을 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업체 사장과 소장 때문에 괴롭다고 했다. 노조 가입한 너 때문에 우리가 피해본다며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업체 친구들 때문에 괴롭다고 했다. 그냥 하청 비정규들도 사람대접 좀 받자고 노조 가입한 것이 그렇게 엄청난 범죄행위냐고 괴로워했다.

사무실에서 노조 탈퇴서를 쓰고, 또 울면서 그것을 찢고 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기혁이는 그렇게 여리고 순수한 친구였다.

기혁이는 항상 그래 온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검은 봉지 가득 오렌지를 싸들고 천막농성장을 찾아와 "고생이 많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사무실에선 노조 미디어팀 친구에게 빵 두 개를 건네주며 "나를 잊지 말라"고 했단다. 기혁이가 떠난 그날 기혁이와 알고 지내던 비정규 노조 사람들은 모두 목이 메어 울고 있었다. 늦은 밤 찾아 온 마흔 줄이 넘은 정규직 형님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고 계셨다.

류기혁이란 이름을 말하면 사람들은 그게 누군데 하고 물을 것이다. 벌써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만 것이다. 며칠 반짝 소동이 일다가 몇 개월 지나면 사람들은 이미 그때 그 사건도 이름도 까마득히 잊고 지낸다. 박일수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게 세상인 모양이다.

작년, 현대중공업에서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고 외치며 박일수라는 이름의 노동자가 분신했다. 그리고 올해 또 류기혁이란 이름이 이 지상에서 사라져 갔다. 노동자의 기본권이라는 자유로운 노조활동, 차별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그 죽음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우리는 하청이라는, 비정규라는 그 서러운 이름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냥 묻고 살겠다'는 가족 분들의 한 마디. 나는 아쉽지만 그래도 가족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이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나는 도저히 기혁이를 차마 그냥 가슴 속으로만 묻을 수가 없다. 무슨 유서가 있고 없고, 정황이 어쩌고 하면서 시작된 열사 호칭 논쟁은 사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관심꺼리도 안 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혁이의 죽음을 보면서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은, 마음으로 하루에 수십 번도 노조 탈퇴서를 쓰고 찢고를 반복하는, 그렇게 고통스럽지만 차마 노동조합을 탈퇴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을 보았던 것이다. 똑같이 일하면서도 인간 이하의 모멸스런 차별을 받아야만 하는, 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다시 처절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비정규직은 노동조합 조합원도 되면 안 되는 신분이란 말인가. 비정규직은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의 권리도 없는 천한 3류 하층계급이란 말인가. 노동조합이 생기면 회사가 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해마다 파업을 계속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뒤 어떻게 현대자동차가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단 말인가. 귀신이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얼마 전 동네에 '비정규직 소주방'이 생겼다. 차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 비정규직이 보편화되는 추세에 맞췄다는 비정규직 소주방. 이미 차별은 공장 담벼락을 넘어서고 있고, 우리는 이 사회에서 삼류인간 취급을 받고 있다.

현대자동차라는 같은 울타리, 한 솥 밥을 먹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전혀 다른 부류의 노동자다. 같은 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상 인간이고 어떤 사람은 반쪽의 비정상 인간이다.

작년 노동부에서는 우리를 '불법파견 노동자'로 판정했다. 그저 법대로 하자면 우린 원래 정규직으로 채용되어야 했을 노동자라는 것이다. 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했다. 현대자동차가 법을 어기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라는 거대한 회사에게는 법도 통하지 않는다. 비정규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법을 어길라 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갑을 채우는 경찰도 검사도, 현대자동차 회장님이 법을 어기면 그냥 눈감고 귀 막고 못 본 체 구렁이 담 넘듯 그냥 넘어가 버린다.

우리의 바람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우리를 원래의 우리 자리로 되돌려 놓으라는, 지극히 소박한 것이다. 더 이상의 차별과 인간적 모멸이 지겹도록 싫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나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소리치고 싶다. 직영 아저씨들, 그렇게 잔업 특근 열심히 해서 아이들 사교육이다 뭐다 시켜봤자 요새는 박사도 비정규직, 교사도 비정규직, 하다못해 공무원도 비정규직이 많습니다. 임금의 차이보다 더 아픈 것이 인간차별이라는 거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세상 물려주시려 합니까.

***셋**

2003년 7월. 그렇게 꿈꾸던 비정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창립총회에 과연 몇 명이나 올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발기인 150명. 그 속에 있는 내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든 그 벅찬 순간부터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들이 내 인생에 벌어졌다. 신문에서 보고 말로만 듣던 노조 없애기 방법, 그보다 더한 현대자동차의 비정규 노동조합 없애기 방식을 얘기하면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야 할라구?" 하며 일반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 세계 몇 위의 손꼽히는 기업, 한국경제를 선도하는 대표 기업이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구태의연한 전근대적 노무관리 방식을 쓸 리가 있냐고, 마치 우리가 무슨 특별한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는 듯이 외면한다.

올해 1월 18일, 비정규 노동조합은 벼랑 끝에 몰린 심정에서 파업을 시작했다. 요구조건은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 쟁취'로 정말 우리로서는 너무도 절박하고도 정당한 요구였다.

언제나 그랬듯 현대자동차(주)는 경비대(이들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를 동원한 폭력, 해고, 출입금지 가처분에 손해배상 청구, 노조 간부들 납치 연행 등 각종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우리는 하도 익숙한 일이라 또 시작이구나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자식 같은 건장한 주먹들한테 어머니 같은 아줌마들이 집단으로 피투성이로 두들겨 맞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정말로 피가 거꾸로 도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비참하게 억압하는 것이었다.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설 귀향비 10만 원을 지급하지 않는가 하면, 조합에 가입하고 활동 좀 했다고 근무시간에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사무실로 불러서 야단치듯 닦달하고, 동료들하고 한 잔 섞는 술자리도 감시하고, 부담을 느낀 동료들은 나를 피하고, 점심시간 조반장이 동료들을 몰고 가버리면 함께 밥 먹을 사람도 없는 왕따 신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것이 바로 하청 노동자가 조합에 가입하면 겪게 되는 서러움이다.

5공장 파업농성 239일.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른 채 온갖 모멸과 왕따를 당해가며 정말 서럽게 서럽게 시작한 파업이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의 임투가 끝나자 우리는 현장 농성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정규직 노조의 임투가 끝나면 우리들의 농성은 더 어렵게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동안의 장기농성으로 인해 우리 모두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앞으로 또 농성을 계속하려면 집단적인 생계활동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현장에선 어려웠다. 우린 흩어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포장마차 같은 거라도 하면서 집단적으로 다시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번 시작한 농성을 끝까지 이어가자고 그렇게 약속했다.

그래도 농성장을 정리하는 데 이를 악물고 있어도 눈물이 나왔다. 같이 있는 동료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짐을 정리하면서 구석에서 누구 것인지 모르는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한 장 한 장 들추는데 70명이 넘는 농성자들의 얼굴이 쭉 지나가고, 같이 웃고, 같이 아파하던 239일에 참고 참던 눈물이 그냥 쏟아져 버렸다.

***넷**

얼마 전인 10월 12일, 9월 8일부터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시작된 현대자동차 3공장 현대세신 노동자들의 단식농성이 끝났다. 현대자동차 2ㆍ3차 업체인 현대세신 아주머니들은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원청 관리자들로부터 감시당하고 성희롱까지 당해야 했다. 간담회 하러 오는 노조 대의원들이 원청 관리자들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가 해고된 아줌마들. 이 아줌마들은 또 다른 얼굴의 기혁이다.

기혁이가 그렇게 갔는데도 노조 활동을 이유로 한 탄압은 그치질 않고 더 모질게 자행되고 있다. 부당한 해고가 철회되기 전까지는 절대 단식을 풀지 않겠다고, 그 순박한 아주머니들이 상복까지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을 나는 차마 처연해서 그냥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3명을 제외한 해고자 전원 복직을 합의하고 타결되어 농성은 끝났다.

나는 현대자동차 비정규노조 초대 집행부라는 죄인 된 심정으로 3공장 아주머니들 단식농성에 참여했었다. 굶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5공장 농성자(얼마 전엔 해고자들이 포장마차를 시작했다)들과 우리 현대세신 아줌마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농성이 끝난 지금 나는 체포영장이 발부된 수배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상에, 나 같은 여자가, 별을 보며 시를 쓰고 싶던 어떤 젊은 노동자가 너무나 억울한 아주머니들과 함께 단식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비리와 범죄에 대해 항의했다고, 대한민국 경찰이 눈을 부릅뜨고 잡으러 돌아다녀야 하는 어마어마한 거물급(!?) 범죄자가 되다니. 경찰이나 검찰이 이렇게도 할 일이 없는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나는 지금 도망 다니는 게 아니다. 그냥 현대자동차 공장 안에 있는 사무실에서 당당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고 경찰이 오면 잡혀갈 것이다. 걱정해주는 분들이 검찰에서 구속되면 한 1년쯤 실형을 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년을 감옥에서 생활해야 한단다. 그래도 나는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는다.

지금 하청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고통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다. 노조를 통해 그야말로 차별이 없는, 떳떳한 인간 대접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신명나는 일터, 노조활동의 자부심, 지금은 이런 것이 그저 희망사항일지 모르지만, 처음 노조를 꿈꾸던 그 마음과 열정만 잃지 않는다면 만들어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아직 나는 믿는다.

5공장에서 파업농성을 했던 농성자들은, 그래서 해고된 사람들은 현장 사람들과 함께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서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 해보는 일이라 처음엔 많이 당황했지만 현장의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갈비를 구워준다, 불을 갈아준다 하며 손들을 보태고 있어, 지금은 제법 진짜 포장마차 태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은 참새가 방앗간 지나가지 못한다고 하나 둘 이 포장마차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마음들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나누고 돕고 사는 게 사람의 참모습 아닐까.

그러나 현대자동차 경영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만 같다. 이미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 임투 말기에 약속한 비정규직 교섭 안건은 앙꼬 없는 진빵 처럼 아무런 내용 없이 시간만 잡아먹고 있다. 그리고 회사는 전환배치를 통한 적법도급을 준비하고 있다. 또다시 문제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현대자동차 계열인 현대 모비스의 비정규직 차별은 현대자동차보다 한 술 더 뜨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연매출액이 6조 원이 넘는다는 대기업의 비정규직 시급이 놀랍게도 3100원이다. 이 3100원이란 정확히 최저임금법이 정한 최저임금이다. 하루 8시간 계산하면 2만4800원, 한 달에 70만 원 정도다. 게다가 원래 3명이 일해야 하는 라인에 사측은 돈을 아끼기 위해 2명의 인원만으로 라인을 돌렸고, 극심한 노동 강도로 인해 그 중 한 사람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참다못해 얼마 전인 10월 21일 현대모비스 노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 회사에 인원충원을 요구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조합 조합원인 이 노동자-사실 이 조합원은 1년 6개월 동안 조합비만 납부하며 현장에선 조합원이라는 말도 못 꺼냈다고 한다-는 그 댓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다.

회사는 이 노동자를 타 공정으로 전환 배치하고 징계하려 했고, 그는 도저히 이런 부당함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식당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조합 조합원임을 밝히면서, 왜 모비스의 비정규직들은 근속이 3년이 넘어도 임금은 딱 최저임금인지, 왜 특근을 안 하면 시말서를 쓰고 관리자들에게 얻어맞아도 참아야 하는지, 본조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 토요일 8시간 근무를 인정하고 있고 모비스에서도 정규직은 토요일 8시간을 인정해 주는데 왜 우리는 4시간만 달아주는지, 왜 우리 모비스의 여성 노동자들 생리휴가는 본조와 다르게 무급인지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리자들이 식판을 던져가며 멱살을 잡은 채 그를 끌어내려고 했고, 이를 보고 밥을 먹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다른 업체 노동자들까지 세상에 그런 이야기하는 것까지도 못하게 하냐고, 이런 법은 없다고 몸으로 막아주는 바람에, 폭력을 중단하라고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다행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처지가 어떤지 지금 눈을 감고도 충분히 짐작한다. 회사가 부모님들의 직장까지 찾아다니며 '당신 자식이 빨간 물이 들어서…'라는 말로 시작되는 협박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현대의 비정규직 차별과 노조에 대한 대응은 어딜 가나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그 다음 그 조합원이 당할 일까지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나는, 나는 절대로 이런 차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노예가 아니라면, 대한민국 헌법 제10조가 명시하고 있듯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차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국가의 처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자존을 위해서도 물러설 수가 없다고 나 스스로를 깨우치고 있다.

나는 젊고 살아서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차별을 없애는 일, 그 이상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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