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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트로츠키파 색출과 한국의 '지역주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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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에스파냐 트로츠키파 색출과 한국의 '지역주의 탓'

[박동천의 집중탐구]<19>마녀사냥식 담론의 본질

제5장 마녀사냥의 결과

제1절 마녀사냥식 담론의 본질

내 머리가 아플 때 다른 사람도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면 통증이 좀 줄어들까? 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이 현실정치에서 무의미한 개인적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으려면, 이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수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아니라고 대답하도록 전향시켜야 할 것이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묘한 것이라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산다면 조금 위안이 될 때가 많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아프다면 통증이 덜해질 때도 많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이런 심사란 곧 시기심 또는 심술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 초입의 유럽에서는 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흉작이 들거나, 범죄가 꼬리를 물거나, 기타 등등, 뭔가 문제가 생기고 원인을 잘 모를 때 마녀사냥이 행해졌다. 명분은 사교(邪敎)의 주술행위를 막는다고 했지만, 떠돌이라든지, 소외받은 과부라든지, 평범한 다수와는 왠지 잘 어울리지 않고 약간 삐딱한 사람을 골라서, 이상한 습성이나 태도를 곧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임으로써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적 불안심리의 배설장치로 작동했다. 자기들이 받는 고통의 "원인"을 찾았다고 위안을 삼고, 자기들이 선한 편이라는 착각을 다짐하면서, 속죄양을 죽임으로써 맘속의 증오를 키워나간 것이다.

영국은 중세부터 유지해오던 주술처벌법(Witchcraft Act)을 1951년에야 폐지했다. 그 법은 1944년에 여성 심령술사 두 명을 처벌한 근거였고, 그 후에도 폐지 전까지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몇 차례 있었다. 심지어 영국에서도 사정이 이러했음을 보이기 위해 거론한 사실일 뿐이고, 다른 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법률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조사해 보지 않았다. 지금 논의에서 초점은 법률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형태의 마녀사냥이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online)에 따르면, "마녀사냥"(witch-hunt)이라는 단어를 이처럼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 최초의 용례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1938)라고 한다.

오웰은 영국 독립노동당 지원부대의 일원으로 당시 에스파냐 내전에 참가하여 마르크스주의 통합노동자당(POUM)과 함께 싸웠다. 통합노동자당은 스탈린에게 반대하고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따른 세력으로서,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에스파냐 공산당(PCE)보다 더 컸다. 어쨌든 오웰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공산당이 통합노동자당을 공격하기 위해 "트로츠키-파시스트" 따위 문구로 어떻게 마녀사냥을 했는지 한탄을 섞어서 고발한다. 내부의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서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씌운다는 것이다.

"이런 짓들이 파벌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슨 이익이 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와중에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낙인이 증오와 분열을 조장한다는 데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공산당 평당원들은 어디서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쫓는 무의미한 마녀사냥으로 이끌려다니고, 통합노동자당과 같은 형태의 정당은 단지 공산당에 반대한다는 끔찍스럽게 비생산적인 입장밖에는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형편으로 내몰린다. 세계 노동계급 운동에서 위험한 분열이 이미 시작한 상태다." (Homage to Catalonia, ch. 11.)

에스파냐 공산당이 트로츠키주의자를 상대로 마녀사냥에 나선 것은 적어도 스탈린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반면에 우리사회 지식인들이 지역주의를 상대로 마녀사냥을 벌이는 것은 순전히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상대화해서 생각할 줄 모르는 폐쇄성 때문이다. 옆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덩달아 반응하는 무별주의도 크게 한 몫을 거든 것이 틀림없다. 지령을 받아서 벌였든 무별주의 때문에 자생적으로 발생했든, 결과는 마찬가지 증오와 분열의 조장이다. 스탈린주의 마녀사냥이 세계 노동자계급의 분열을 낳았다면, 지역주의 마녀사냥은 바로 대한민국 인민, 특히 노동자계급의 분열을 낳는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만이 아니라 자기 몸뚱이로 일해서 먹고 사는 모든 계급 말이다.

마녀사냥의 이 두 사례를 잠시 비교해보자. 트로츠키(1879-1940)가 레닌 사후 스탈린과 경쟁관계였고, 소련에서 숙청당한 후에도 스탈린주의에 반대하여 국제적인 명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활동이 썩 예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견을 곧 적대시한다는 것은 모든 진보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행위일 뿐이다. 트로츠키와 결탁해서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소련정권이 볼셰비키 노장들을 숙청한 1936년과 1937년 두 차례의 공개재판을 국제여론 대부분이 조작극이라고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에 비해 지역주의라는 마녀사냥은 훨씬 복합적인 다층 구조로 짜여 있다. 가장 밑바닥에는 지역을 경계로 한 적대감이 있다. 경상도의 몰표에 김대중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포함되는지는 구체적으로 가려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반감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1930년대 말 소련 공산당 평당원 가운데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노선 차이를 깊게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하물며 에스파냐 공산당의 평당원 가운데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노선 차이를 깊게 이해하고 나서 트로츠키주의자 사냥에 나선 비율이 얼마였을까? 아무튼 경상도 사람 가운데 김대중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서 그에게 반감을 가지는 사람의 비율도 그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마녀"로 지목된 대상이 진짜로 마녀인지, 또는 얼마나 마녀인지를 전혀 따져 묻지 않는 태도, 이것이 마녀사냥의 첫 번째 특징이다.

경상도 사람 중 일부가 김대중을 악마라고 두려워하고, 또 노무현을 볼 때마다 김대중의 형상을 불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나, 전라도 사람 중 일부가 전두환을 악마라고 두려워하고, 또 한나라당이 내놓는 대통령 후보를 볼 때마다 전두환의 형상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단 형태적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다르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를 구분하자는 소리가 바로 내용상의 차이에 주목하자는 말과 같다. 이런 시각에는 김대중에 대한 경상도의 반감은 무별주의고 마녀사냥이지만, 전두환에 대한 전라도의 반감은 명분이 보다 뚜렷하므로 마녀사냥이 아니라는 의미도 함축된다.

나는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심리학에서 장차 두고두고 다룰 주제로 훌륭하다. 그러나 "지역주의"라는 것을 현실정치의 문제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본연의 목적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도리어 방해만 할 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역구분을 가장 우선시하는 프레임에 따라서 사유의 근본적 흐름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차원, 다시 말해 "지역주의"를 문제시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 주제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되물어보지 않는 태도라는 차원에서 이 역시 전형적인 마녀사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이 내가 비판하는 초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역주의"라는 문구를 통해서 유권자들보다는 정치인들을 겨냥하여 공격하기도 한다. 즉, 1987년에 세 김씨가 출마해서 각각 경남, 전라, 충청을 석권했고, 그 후 그런 풍토가 계속되었다는 관점이다. 정치인들이 표 계산을 할 때 자기 고향을 고려하지 않거나, 유권자들의 출신지역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치인으로 입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런 고려를 설령 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의 여론조사와 정치광고 업체에서 그런 어리석은 짓을 가만 놔둘 리도 없다.
▲ 1987년에 세 김씨가 출마해서 각각 경남, 전라, 충청을 석권했고, 그 후 그런 풍토가 계속되었다는 관점이다. 정치인들이 표 계산을 할 때 자기 고향을 고려하지 않거나, 유권자들의 출신지역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연합뉴스

정치인들이 목전의 선거 승리에만 "집착"하는 경향은 아무리 비판해도 지나칠 리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마녀사냥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가운데 선거 승리에만 "집착"하는 사람과 선거 승리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을 분별하지 않고 싸잡아서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에 장난삼아 출마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선거 승리에도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면 그 중에 선거 승리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어떻게 추려낼까? 이런 경우 "집착"이란 절대로 객관적인 지표에 따라서 경계를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성향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용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어떤 상대에 대해서든 기분만 내키면 "지역주의 정치"라는 불평을 내뱉을 수가 있는 구조가 화용론적으로 아주 잘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유한계급의 인사들이 음풍농월을 주고받고, 술자리에서 신소리를 유머랍시고 떠들어대며, 이런저런 헛소리들을 연결해 가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문구들을 자랑하고, 그러는 와중에 맘속에 쌓여있는 심술과 악의를 배출하는 것을 나는 전혀 탓할 생각이 없다. 즉, 한가한 여유를 과시하기 위해서든지,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고 마냥 욕이나 퍼붓기 위해서든지, 특별한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인들의 "지역주의"를 탓하는 것은 적어도 순간적인 여흥이나 분풀이는 된다는 점에서 순기능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사회의 진보를 말한다고 하면서 정치인들을 도매금으로 공격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성인인가 바보인가? 나는 바보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이 내거는 정책은 모르지만 그냥 맘에 들어서 표를 주겠다는 유권자에게 "당신은 멍청하니까 투표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후보가 있다면, 정직한 사람인가 바보인가? 나는 바보라고 말할 것이다. 노무현은 나름대로 정직을 과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광주에 가서 자기가 받은 몰표가 지지표라기보다는 지역감정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지지표와 지역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구분하는가?

지역주의, 지역감정이라는 단어들은 본질적으로 변별력이 없는 껍데기뿐인 수사다. 여기에 변별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달성에서 받은 박근혜의 득표, 동작에서 받은 정몽준의 표 가운데서 어디까지를 정책이나 정당이나 인품을 지지한 표로 보고 어디부터를 지역감정이라고 할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2007년 선거에서 이회창이 충청도에서 받은 표와 이인제가 충청도에서 받은 표 중에서 어떤 것이 소위 "선진국"형 정책투표고 어떤 것이 지역감정 때문인지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기준은 꿈에도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머리가 나쁜지, 아니면 상상력이 부족한지를 누가 좀 가르쳐주면 정말로 고맙겠다.

에스파냐 공산당이 "트로츠키주의자"를 색출하는 마녀사냥에 나선 결과, 에스파냐 통합노동자당은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안정효는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 미군과 전쟁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언례에게 뒤집어씌운 결과 공동체가 파괴된 모습을 드러냈다. "지역주의"를 성토하는 담론은 한국정치현실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정제해서 적극적인 대책으로 이어가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그저 무책임한 유행어에 휩쓸리다보니 시민들의 맘속에 지역변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프레임을 고착시키고 말았다. 지역의 경계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끌어올려버린 셈이다. 마녀사냥은 연대해야 할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이간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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