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앉아서 일하거나 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스티커를 신용카드에 붙여 놓고 있다. 이제껏 계산원들이 이게 뭐냐고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없었지만, 몇몇은 신용카드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얼굴에 빙긋 미소를 짓기도 했다.
업무 시간의 90% 이상을 서서 일해
▲ "서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의 로고. ⓒ프레시안 |
캠페인단의 조사에 따르면, "유통 서비스 여성 노동자의 41.5%가 건강을 위해 개선되어야 할 과제 1순위로 아픈 다리 문제 해결을 꼽을 정도로 서서 일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또 서서 일하는 서비스직 여성 노동자가 1일 8시간 서서 일하는 것을 기준으로 할 때 3~5년 사이의 근무 기간에서 정맥류 발생 위험은 3년 미만 근무할 때보다 8배, 5년 이상 근무할 때에는 12배나 높게 나타났다."
하지정맥류와 근골격계 질환 초래
정맥(靜脈)은 몸의 각 부분에서 혈액을 모아 심장으로 보내는 혈관이다. 정맥에 피가 괴어 혈관이 부풀어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하게 보이는 것을 정맥류(靜脈瘤)라 한다. 보기에도 흉하지만 오래 방치하면 작은 핏떡, 즉 혈전(血栓)이 생겨 혈관을 막아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캠페인단은 "하지정맥류는 미용상의 문제로 심리적 위축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질병이 진행될 경우 통증을 초래하고, 혈관 합병증의 원인이 되는 심각한 질환"이라면서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발생하는 하지정맥류는 일하는 동안 잠시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더라도 발생 위험을 줄일 수 있고, 질병 악화를 멈출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장시간 서서 하는 노동은 허리, 척추, 다리, 발목, 발에 붙은 뼈와 근육을 손상시켜 근골격계 질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노동부, "노동자 앉을 의자 비치해야"
이런 문제점 때문에 2008년 9월 노동부까지 나서 '서서 일하는 근로자를 위한 건강 가이드'를 만들기도 했다.
이 가이드를 보면, △노동자가 작업 중 때때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해당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입좌식) 의자를 비치하고(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277조 '의자의 비치'), △신체 부위 부담 경감 및 원활한 혈액 순환을 위하여 발 받침대, 피로 예방 매트를 설치하고, △굽이 높은 신발은 착용하지 않으며, △작업대 설계는 업무 특성 및 노동자의 신체 특성을 고려하여 구부림, 뻗침, 비트는 업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작업대를 설계하고, △피로 예방을 위한 직절한 휴식 시간을 부여하고, 스트레칭을 실시해야 한다고 돼 있다.
▲ 영국 맨체스터의 한 대형 할인점 계산대에 계산원이 앉는 의자가 비치되어 있다. ⓒ프레시안 |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자 경비원이 달려와 함부로 찍는다고 나무란다. 미안함을 전하고 한국의 대형 할인점에는 계산원을 위한 의자가 없어서 그런다고 말해주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Get out of here." 아무튼 인상적인 것은 의자에 접고 펴는 식의 등받이가 부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홈플러스, 모든 매장에 계산원 의자 설치키로
삼성테스코(주)가 운영하는 홈플러스가 국내 대형 할인점 최초로 계산대에서 서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위해 이달 말까지 전국 111개 점포에 모두 2220개의 의자를 설치한다고 15일 밝혔다.
<연합뉴스>를 보면, "홈플러스는 지난해부터 6개 점포에 계산대 의자를 설치하여 시범 운영했으며, 자체 분석 결과 계산대 의자가 직원들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건강 보호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 올해부터 전 점포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KOSHA)의 심사 기준에 합격한 인체 공학적 의자를 설치한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식 계산대 외에도 각 점포에서 운영 중인 푸드코트, 행사 매장의 계산대에도 의자를 설치해 홈플러스 매장 어디든 서서 계산하는 직원이 없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 홈플러스 매장에 설치된 계산원용 의자. 그런데 등받이가 없다. ⓒ뉴시스 |
'등받이' 없는 의자
대형 할인점과 부대시설에서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의자를 설치하겠다는 홈플러스의 결정은 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고, 다른 유통업체들이 본받아야할 일이다. 하지만, 의자를 설치하는 일 자체에 급급해 인체 공학적 계산을 충분히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접고 펴는 등받이가 달린 맨체스터 한 대형 할인점의 계산대 의자. ⓒ프레시안 |
산업의학과 산업공학의 측면에서 볼 때 대형 할인점 계산원용 의자에 등받이를 설치하는 것은 대단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기본기의 문제이다.
여대생은 앉고, 여성 노동자는 서야 하나?
이런 점에서 홈플러스 매장의 의자 비치는 밥은 밥이로되 뜸이 제대로 들지 않은 선 밥이라 할 수 있다. 손님에게 선 밥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홈플러스 이승한 사장의 매니지먼트 아티스트, 즉 예술 경영은 20%가 부족하다. 뭔가 살짝 모자란 것을 2% 부족하다고 하는데,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종업원이 앉을 의자에 대한 인체 공학적 계산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서 20% 부족한 예술 경영인 것이다.
유명 대학의 여대생들에게 하루 종일 서서 강의를 들으라고 그랬으면 온 나라에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 유명 대형 할인점에서 일하는 중년의 여성 계산원은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게 당연하게 인식되어 왔다. 대형 백화점에서 일하는 여대생과 같은 또래의 여성 노동자는 또 어떤가?
노·사·민·정 사업으로 대형 할인점 의자 표준화를
작년 7월 캠페인단이 출범한 이래 이런저런 성과들이 만들어져왔고, 마침내 홈플러스가 국내 대형 할인점 가운데 최초로 모든 매장에 의자를 비치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경제난으로 모두가 어려운 때에 반갑고 상큼한 소식이다.
시장만능 이념에 사로잡힌 무능한 대통령을 닮아 실천 의지나 능력도 없으면서 거창한 목표만 내세운 '노·사·민·정 합의'보다 현장의 노사가 주도하는 이런 작은 실천이야 말로 훨씬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만든다.
이참에 한 가지 욕심이 생긴다. 홈플러스로 인해 전국으로 확산될 게 분명한 대형 할인점 계산원 의자의 전국 표준화 사업을 노·사·민·정 '합의'로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노동조합 쪽에선 의자 캠페인을 주도한 민주노총 서비스노조연맹(여기에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가 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사측에서는 선발 주자로서 경험을 가진 홈플러스와 아직 의자를 설치하지 않은 이마트 등의 대형유통업체들이, 정부에선 노동부 주도 하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그리고 민간에서는 관련 의사단체나 학회가 참여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말만 많고 실천은 없는 때에 민주노총 서비스노조연맹이 주도한 캠페인단은 물론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도 금메달감이다. 두 단체에 축하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기고 싶은 게 필자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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