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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문제: 마녀사냥 프레임

[박동천의 집중탐구⑩] 거대담론과 가짜문제

제2부 가짜문제: 마녀사냥 프레임

제1장 거대담론과 가짜문제

진보운동이 거대담론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자각은 나온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런 자각은 이념보다는 삶의 문제에서 진보의 아젠다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로 통한다. 그런데 내가 제2부에서 지금부터 논의하려고 하는 가짜문제 현상은 얼핏 거대담론에 대한 비판과 혼동될 여지가 많다. 그래서 거대담론에 관한 내 입장과 가짜문제에 관한 내 입장을 좀 세밀하게 분별해둘 필요가 있다.

거대담론이란 예컨대 자본주의 비판이라든지, 역사의 보편적 진행, 또는 민주주의의 발전법칙, 금융자유화의 귀결, 근대문명의 궁극적 결과, 등등, 이외에도 무수한 주제들에 관한 무수한 이론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담론만으로는 진보정치가 지탱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거대담론이 없다면 진보정치가 지탱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한 가지 예로서, 정치라는 것을 무엇으로 볼지를 생각해보자. 인간사회를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의 체계로 이해하고 그 이상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본다면, 정치란 그저 자기가 살기 위해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죽이는 사업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사회의 진보란 애당초 개념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각자 재주껏 살아남는 경쟁이 있을 뿐이고, 경쟁에서 패배한 자는 사라지거나 죽을 뿐이다.

진보적인 관심은 이와 같은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 위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즉, 동물과 같은 약육강식의 비유가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일면에 있다면, 그런 비유가 통할 수 없는 여지도 일면에 있는 삶의 형태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공동체", "공익", "정의", "평화", "공동번영", "상호이익", "복지", 등등의 개념들이 약육강식의 비유를 극복하려는 시도 가운데서 태어난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정파의 구분을 초월하는 차원의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정파의 구분을 초월하는 차원의 가치"라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기나 한지,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등은 전형적으로 거대담론에 속하는 문제다.

다른 예로서, 안정효의 소설을 원작으로 장길수 감독이 1991년에 만든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모티브를 가지고 논의해보자. 미군 병사에게 겁탈당한 과부가 결국 기지촌으로 흘러들어가 몸을 팔게 되었을 때 두 가지 서술이 가능하다. 원래 행실이 그 모양이라서 팔자대로 양공주가 되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공동체의 주류가 부당하게 침해당한 피해자를 돕기는커녕 혹시 자기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봐 도리어 내쫓은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명백히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의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불행을 당한 과부를 내쫓은 행위는 이미 전쟁으로 인해 마을 공동체가 파괴된 상태임을 보여준다는 관점이다.

겁탈당한 과부를 오히려 손가락질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미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강자에 대한 순응주의가 있다. 마을에서 소외 계급에 속했던 과부 언례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상적"인 나머지 여성들이 겁탈당하지 않겠다는 계산이 있는 것이다. 문형선(Katherine H. S. Moon)은 『동맹 속의 섹스』(이정주 역, 2002, 삼인)에서 한국 정부와 기지촌 여성의 관계를 같은 각도에서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고려나 조선에서 대륙의 침략자들에게 일부 여성을 공물로 바침으로써 나머지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려던 전통이 이어졌다는 고발이다.

앞에서 여러 번 거론했듯이, 어떤 문제를 직접 당사자에게만 국한시켜서 바라본다는 것은 곧 진보를 향한 관심이 없다는 징표가 된다. 김주열의 죽음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4월혁명에 반대했거나 동참하지 않았기가 쉽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연봉이 2,000만원 남짓인 비정규직 인원을 130명 해고하면서 동시에 900억원짜리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한다는 대조적인 소식에 대해서,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냐"고 노동조합을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터무니없는 보상금을 처음부터 노리고 들어갔기 때문에 죽어도 할 말이 없다고 보는 시각과 모두 동류항이다.

반면에 언례의 처지를 대한민국 국가의 성격으로 연결하는 시각, 김주열의 죽음에서 정권의 무도함을 읽는 시각, 정몽구 회장의 처사에서 노동자 연대의 필요를 절감하는 시각, 용산 참사를 보면서 한국사회의 도덕적 현주소를 목격하는 시각은 모두 뭔가 사회구조에서 원인의 뿌리를 찾는다. 일상의 문제를 일상적 시각에서만 보려하지 않고, 일상을 초월한 보다 넓고 높은 안목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대담론의 본질이다.
▲ 용산 참사를 보면서 한국사회의 도덕적 현주소를 목격하는 시각은 모두 뭔가 사회구조에서 원인의 뿌리를 찾는다. 일상의 문제를 일상적 시각에서만 보려하지 않고, 일상을 초월한 보다 넓고 높은 안목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대담론의 본질이다. ⓒ프레시안

그러므로 거대담론은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고, 단지 사회적 관심, 구조적 관심, 이론적 관심이 표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필수조건에 해당한다. 편협한 일상성을 뚫고 나가 거대담론의 지평으로 시선이 이동하지 않는다면 진보를 향한 관심 자체가 싹틀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담론은 모두 옳다거나, 모두 현실에서 적실성을 가진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방향의 분별력을 위해서는 우선 "모두"와 "어떤"이 긍정문에 사용될 때와 부정문에 사용될 때 달라지는 양상의 차이에 관한 기초적인 논리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대담론은 진보적 관심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나는 말했다. 이 말은 모든 거대담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론이 아니라, 모든 거대담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모든 거대담론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지적은 "어떤 거대담론은 옳다"는 말로서, 여기에는 당연히 "거대담론 중에는 틀린 것도 있다"는 의미가 함축된다. 거대담론 자체를 경원하면서 의제에서 배척해서는 진보를 원천적으로 포기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거대담론을 일단 의제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차원의 논의에서는 거대담론을 일반적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다뤄야 한다. 거대담론 가운데 아예 말도 안 되므로 더 이상 논의한다는 것이 곧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도 있을 것이고, 논의를 하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며, 아무리 논쟁을 해도 결론이 잘 안 나오는 것도 있을 것이다. 어떤 거대담론이 각각에 해당하는지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고, 오직 개별적인 이론이나 구상이나 노선을 앞에 내놓고서야 비로소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문제다. 개별적인 이론이나 구상을 가지고 논의해야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지, 현실에 적용하려면 어떤 비용이나 과정이 필요할지를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가 있게 된다.

이와 달리 가짜문제는 병폐가 아닌 것을 병폐로 잘못 인식하거나, 병폐 자체는 대략 어렴풋이 인식했더라도 원인을 잘못 진단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가짜문제는 거대담론과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단 거대담론 중에서도 가짜문제를 추구하느라 방향을 잘못 잡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거대담론에서만 가짜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가짜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중세 서양의 스콜라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제를 두고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학자들이 논쟁을 벌였다. 오늘날 신의 존재증명을 심각한 화두로 삼는 철학자나 신학자는 별로 없다. 그 사이에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고, 오히려 "신"이라는 개념과 "존재증명"이라는 개념이 서로 만나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과거에 비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깊게 이해하고 수긍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지는 않다.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화두는 해결된 것도 아니고 폐기된 것도 아닌 채, 다만 신을 믿지 않는 것을 반드시 병폐라고는 여기지 않는 방향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더 이상 유행하는 문제의 목록에서 탈락한 것이다.

무신론자들이라면 이는 병폐가 아닌 것을 병폐로 여겨서 발생한 가짜문제라고 할 것이다. 또는 나름대로 신앙인으로서 남들의 불신앙을 문제라고 보지만, "존재증명"을 통해 불신앙이 치유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 "존재증명문제"는 가짜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에 관해 내게 반론하고 싶은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 문제의 알맹이 쪽으로 더 이상 파고들기는 어렵기 때문에, 안전하게 표현해서 신의 존재증명이란 가짜문제에 가깝다고 해두자. 그래도 이런 문제에 관한 중세의 논의가 마냥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명제와 명제 사이의 연관 및 논쟁을 위한 공정한 질서에 관한 많은 깨달음들이 부산물로 얻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주제로 삼아서 발생한 가짜문제의 예로는 조선시대 군자당/소인당의 논쟁을 들 수 있다. 주자 성리학은 대체로 하나의 진리, 즉 천리를 추구하며, 나아가 깨달은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지행합일을 이상으로 여긴다. 따라서 같은 공부를 통해 하나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라면 가치관과 목표도 같아져야 일관적일 듯하다. 따라서 특정인들이 자기들끼리만 패거리, 즉 붕당을 짓는다면 그 자체가 곧 스스로 소인배임을 드러내는 증좌로 여겼다.

그런데 현실의 잡다한 사안들을 처리할 때 같은 경전을 외우고 익힌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나와 의견이 다른 너를 두고, 나는 말하길 네가 공부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소인배라고 하고, 너는 말하길 내가 공부가 부족하거나 소인배라고 손가락질을 하게 되었다. 서로 자기편이 천리를 대변하는 군자편이라고 믿으면서, 차이가 발생하는 탓을 상대방에게 돌린 것이다. 군자가 소인의 의견에 맞춘다면 진리가 오류에게 영합하는 셈이니, 마땅히 오류가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순환일 뿐이다. 군자/소인의 구분에서 누가 군자냐는 질문이 철저하게 파당적인 경계 안에서 폐쇄적이기 때문에, 군자와 소인을 분별한다는 개념적인 장치는 당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강화하고, 나아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서로를 죽이는 일까지도 발생하고 말았다. 이는 전형적인 가짜문제에 해당한다. 당파성 자체를 병폐로 파악한 데서 비롯된 가짜문제다. 단, 이것이 가짜문제임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소는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고치는 셈이 된다.

영국과 미국의 경험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양에서도 당파, 붕당, 패거리, 파당, 도당, 등은 고대부터 18세기말까지 정치에서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폐단으로 간주되었다. 단적으로 17세기 영국에서 정당이 발생할 때, 이름이 각각 토리와 휘그로 붙은 것만 봐도 이런 사정이 나타난다. 토리(Tory)란 아일랜드에서 범죄자를 가리키던 토리예(toraidhe)에서 나온 말로서, 혁명기 왕당파가 가톨릭 편이라서 아일랜드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개신교(영국교회) 측 의회파에서 이를 빈정거리는 뜻으로 붙인 명칭이다. 휘그(Whig)란 마부 또는 시골뜨기를 가리키던 스코틀랜드어 휘거모어(whiggamore)에서 나온 말로, 후일 제임스 2세로 왕위에 올랐다가 명예혁명으로 쫓겨나게 될 요크 공작의 왕위계승권을 배제하려는 세력을 가리켜 요크 공작 지지파들이 비아냥거리면서 붙인 명칭이다.

영국 초기 정당의 명칭은 19세기 중엽까지 이처럼 반대파에 의해서 부정적인 의미로 붙여진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상대를 비하하기 위한 명칭이었는데, 세월이 100년 이상 지나면서는 익숙해져서 자신을 토리나 휘그로 부르는 용례들도 생겼다. 그러나 토리나 휘그라는 명칭의 저변에는 당파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만이 깔려있고, 긍정적인 인식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조선의 군자당/소인당처럼, "나는 당파가 아닌데 저들이 당파를 만들었으니 나쁜 놈들"이라는 심사가 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정당들이 자신의 당파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공표한 것은 1830년대에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보다 세련된 명패를 달기 시작하면서이다.

당파, 즉 정당을 병폐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사실 고대 로마의 공화정 질서 안에 함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라든지 로크의 『관용론』처럼 표현의 자유를 개명된 정치를 위한 최우선적 사회조직원리로 보는 입장에도 함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발상의 전환을 가장 명시적인 형태로 표명한 사람은 나중에 미국 4대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제임스 매디슨이다.

아메리카합중국의 건국이 준비되던 시기에 매디슨은 당파성이 문제라고는 봤지만 당파성을 없앨 수는 없다고 봤다. 그래서 당파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특정 당파가 전횡을 일삼을 수 있는 환경이 문제라고 시선을 돌렸다. 그리하여 특정 당파의 전횡을 예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당파의 수가 무수하게 늘어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그는 1780년대 후반 신문에 기고한 일련의 논설문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예컨대 제10호)에 담아 표명했다. 상대세력의 당파성을 우려하면서 서로 공격하느라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 당파정치가 도리어 강화되는 경향을 직시하고, 당파 자체보다는 전횡을 예방하는 쪽으로 발상을 바꾼 것이다.

물론 그가 생각한 패거리에는 정당의 형태를 갖춘 세력들만이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라는 정부의 기능, 각 기능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부서와 권한들, 각 주정부와 시정부 및 그 내부의 다양한 세력들, 정부 이외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언론기관이나 기업체, 온갖 종류의 단체와 조직들이 다 포함된다. 정부 부서끼리도 상호 견제를 할 수 있어야 전횡이 방지되고, 나아가 시민사회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실상 온전히 미국 헌법에 반영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에는 당파성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18세기에 매디슨이 도달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아직도 소수에 불과하다. "단결"을 미덕으로 보는 프레임에 따라 "분열"을 개탄하는 원시적이고 순진한 반응은 어디서나 눈에 띄지만, 기존의 프레임이 상황 타개에 도움이 되지 못할 때 우회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에 대단히 소극적이다. 단결을 미덕으로 보는 기존의 발상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좀더 끌어가보기 전에 고개를 흔들고 일축해 버리는 것이다. 단결이 아니면 분열이라는 이분법을 고수하려는 무의식적 고정관념이 인식의 틀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 한다는 (또는 안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고가 개방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하고 닫혀있다, 즉 보수적이라는 뜻이다. 이 차원의 보수성은 현실정치 차원의 보수/진보 스펙트럼과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고도 두껍게 분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지역주의에 대해 한국사회 정치의식을 풍미하고 있는 개탄은 내용과 형식에서 공히 당파성에 관한 원시적 반응을 닮았다. 이제 이어지는 네 개의 장에서 지역주의에 대한 개탄이 왜 가짜문제인지, 그 결과로 어떤 병폐들이 도리어 강화되고 있는지, 이와 관련해서 진짜문제는 무엇이라고 봐야 하는지 등을 상세하게 따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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