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장난도 아니고…"
누구보다 인권단체들이 치열하게 투쟁 중이다. 그중 제일 속이 타는 건 장애단체들이다. 인권위 인력을 축소하면 천신만고 끝에 제정한 장애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권위 지역사무소 폐쇄방침을 접한 부산, 광주, 대구의 시민사회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개소식에 참석한지 2~3년도 안 됐는데 폐소식을 하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는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당연히 강도 높은 상경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평소 인권위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른바 협력 속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인권단체들이 '인권위 지킴이'를 자임하며 똘똘 뭉친 셈이다.
국제사회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인다. 지난 2월 25일 유엔인권최고대표(인권고등판무관)은 직접 외교통상부장관과 행전안전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공개되지 않아서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인권위에 거는 국제적 기대와 인권위가 획득한 국제적 위상을 거론하며 인권위 축소강행은 인권위와 정부의 국제적 평판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 인권위를 모범기구로 칭송하며 벤치마킹을 주문해온 아시아 각국의 주요 인권단체와 아시아 중심의 국제인권단체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조만간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에 한국 인권위 사태를 조사할 다국적 진상조사단 파견 및 한국정부의 독립성 침해시도에 대한 특별심사절차 회부를 공식 요청할 태세다. 이렇게 되면 한국정부는 향후 국제 인권사회에서 독립성 침해사례의 악명 높은 주인공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인권단체는 지난 2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원회 축소방침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시스 |
인권위 축소론은 건전한 법리와 상식에 반한다
법학계가 집단적으로 1개 국가기관의 축소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사를 밝힌 점도 몹시 이례적이다. 유엔인권최고대표의 항의서한이 전달된 날은 무려 252명의 법학교수들이 인권위 축소 반대 성명서를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인권법 전임교수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한국법학풍토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법학교수들이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권위 축소론은 건전한 법리와 상식에 반한다.
법학교수들은 특히, 인권위법 제18조에서 '조직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할 수 있도록 위임한 것은 인권위 자체의 법규 제정권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뿐, 대통령이나 정부가 제멋대로 인권위 조직과 인원을 감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권위 직제를 대통령령으로 규정해놓은 취지는 인권위가 헌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일 뿐, 인권위의 직제와 인력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손대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인권위의 독립성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정부한테 밉보이는 순간 인권위의 인력과 예산이 바로 반토막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지난 3월 2일에는 16명의 전직 국가인권위원들이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선진화를 추구하는 현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선진화의 핵심목표 중 하나가 인권보장에 있느니만큼 인권위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호소를 담았다. 이들은 내년도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 의장국으로 추대될 한국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을 정부가 앞장서서 깎아내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은근한 질책도 곁들였다.
싸움의 승부는 이미 나있다
국내외 다양한 구성원들이 이렇듯 인권위 축소방침에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인권위가 지난 7년간 국내외에서 상당히 괜찮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인권위는 초기부터 국제인권공동체에서 독립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아서 국제인권 외교무대에서도 한몫을 단단히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권위는 벌써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PF)의 의장국을 역임한데 이어 현재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CC)의 부의장국이자 국제조정위원회 승인심사소위의 아태지역 대표위원국으로 활동 중이며, 내년에는 기구축소와 같은 특별한 사정만 없으면 ICC 의장국으로 피선될 것이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안부, 아니 청와대는 3월 중 국무회의에서 인권위직제 개정안을 통과시켜 인권위 축소방침을 밀어붙이겠다고 공언한다. 특히 이달곤 행안부 장관이 지난 19일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강행의지를 밝힌 점이 매우 우려된다. 어물쩡 넘어가도 그만인 청문회에서 이렇게 답변한 이상 청와대의 강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3월 중 이명박 정권과 국내외 인권공동체가 인권위 축소여부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싸움의 승부는 이미 나있다. 정부 방침에 찬성의견을 밝히는 사람은 국내외를 통틀어 단 한 사람도 없는 반면 국내외에서 반대의견이 쏟아지고 있다면 승부는 보나마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혼자서 법령상의 형식적 권한을 알량한 핑계 삼아 축소방침을 강행한다면 이보다 더 반지성적이고 반인권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명박 정권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도대체 민생경제가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할 일 많은 정부가 이렇게 승산 없고 실익 없는 싸움에 매달려도 되는지, 한숨만 나온다.
아무리 미워도 이러진 않았다
왜 국내외가 다 자랑스러워하는 인권위를 유독 이명박 정권은 미워하는가. 아마도 가까이는 촛불시위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고 멀게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소극성, 공권력 행사에 대한 엄격성 등 인권위의 접근방식이 체질적으로 거슬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인권위가 정부의 입지를 난처하게 만든 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더 심했다. 대표적인 예로, 인권위는 김대중 정부 시절 테러방지법 제정을 무산시키고 교육정보시스템(NEIS) 도입에 반대했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비정규직법안에서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주고 여의도 농민집회 사망사고와 관련해 경찰청장의 징계를 권고했다. 당시의 정권도 이명박 정권 못지않게 인권위에 미움과 분노를 보였지만 인력감축을 겁주진 않았다. 인권위가 독립성을 지키는 이상 인권위는 어느 정권에게나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설령 인권위의 업무수행방식에 대한 현 정부의 불만과 부담에도 일리가 있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해 팔다리를 자르는 보복성 방식으로 불만을 해소하여야 하는가. 이것이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것인가. 도대체 이런 방침을 세우면서 인권의 실질적 주체인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를 한순간이라도 헤아려본 적이 있는가. 이래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위원장과 인권위원의 임기가 종료돼 자연스레 인권위를 재구성할 것 아닌가. 인권위의 인력을 대폭 줄여서 무력화하면 이명박 정권이 임명할 인권위원장은 어떻게 일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이토록 단견일 수 있으며 이토록 자가당착일 수 있는가. 이건 누가 봐도 벼룩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향후 경제공황상태에서 쏟아질 실업자, 사회경제적 약자의 열악한 지위를 생각하면 정부는 이 '연약한 지체들'의 인권을 지켜줄 책무를 갖는 인권위에 인력감축이 아니라 더 정력적으로 일해줄 것을 주문하며 필요하면 인력증원도 마다않겠노라고 약속해야 옳다. 구구하게 말할 것 없다. 법학교수들이 성명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대로, 다른 국가기관의 인력은 2%도 감축하지 않으면서 유독 인권위만 30% 감축하라는 건 촛불시위 '과잉진압' 결정에 대한 보복성 표적감축이 아닐 수 없다.
▲ "다른 국가기관의 인력은 2%도 감축하지 않으면서 유독 인권위만 30% 감축하라는 건 촛불시위 '과잉진압' 결정에 대한 보복성 표적감축이 아닐 수 없다." 국회에 출석한 이달곤 행안부 장관. ⓒ뉴시스 |
1년 새 유엔에서 항의서한 두 번 받는 '불명예 기록'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시절의 인권위 장악시도와 최근의 인권위 무력화 시도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한껏 망신살이 뻗쳤다. 이렇게 가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제인권공동체에서 기피인물로 낙인찍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이미 당시 루이스 아버 유엔인권최고대표의 항의서한을 받은 바 있다. 인수위가 인권위의 위상을 대통령 직속으로 변경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이 대통령은 필레이 유엔인권최고대표로부터 다시 한 번 인권위의 인력감축에 항의하는 공식서한을 받음으로써 불과 1년 동안 유엔인권최고대표에게 두 번이나 항의서한을 받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다.
국가인권기구는 좀 별난 구석이 많은 이색적인 국가기관이다. 무엇보다도 헌법기관이 아니면서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관이라는 점이 그렇다. 인권위의 독립적 위상은 인권단체들이 입법과정에서 무려 3년 넘게 법무부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획득한 국민들의 귀중한 공유재산이다. 덕분에 현재 대통령, 총리, 장관은 인권위에 대해 어떤 지시나 명령도 할 수 없다. 반면 인권위는 대통령, 총리, 장관에게 인권관련 법제와 정책의 개선을 권고하는 것은 물론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는 장관, 청장, 기타 공무원에 대한 해임 기타 징계 조치를 권고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인권위의 활동을 지켜보는 국제기관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유엔원칙, 일명 파리원칙(Paris Principles)에 대한 부합여부를 정기적으로 심사받는다. 전세계의 모든 국가인권기구들은 파리원칙이 요구하는 독립성과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매5년마다 심사받는다. 파리원칙의 이행수준에 따라 등급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발언권과 의결권이 달라진다. A등급 인권기구만이 유엔인권이사회 발언권과 국제조정위원회 의결권을 갖는다. 매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1~2개 국가인권기구는 A급에서 B급으로 하향 조정되는 수모를 겪는다. 독립성이나 실효성을 침해한 자국정부의 형편없는 조치들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 인권단체들은 곧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에 한국인권위에 대한 특별심사 회부를 요청할 것이다. 만약 국제조정위원회가 특별심사 회부결정을 내리면 한국인권위의 A등급 지위는 조만간 B등급으로 격하될 것이 틀림없다. 인권의 관점에서 B급 정부를 만난 탓에 A급 인권위가 B급 인권위로 강등되게 생긴 셈인다. 해서 이명박 정부에 묻는다. 이러한 상황을 뻔히 알고도 축소고집을 부릴 것인가. 하루속히 축소방침 철회 방침을 세워서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그래야 위와 같은 수치스런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는다.
인권위에 대한 무지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못한다
한국인권위는 현재 국제조정위원회의 부의장국이자 국제조정위원회 등급심사소위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대표국이다. 등급심사소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주에서 각1개국씩 모두 4개 인권기구대표로 구성된다. 최근에 특별심사절차에 회부된 경우는 네팔,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등인데 모두 정부의 독립성 침해조치 때문이었다. 예컨대, 나이지리아에선 정부가 정당한 이유 없이 사무총장을 경질한 것이 문제됐다. 스리랑카의 경우 대통령의 무리한 인권위원 임명이 화근이었다. 네팔에서는 친위쿠데타 직후 국왕이 인권위원 모두를 친쿠데타 왕당파로 교체한 데 대해 국제사회가 딴지를 걸었다.
한국 인권위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독립성과 실효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의 모범적 인권기구가 인력과 업무를 1/3이나 줄여야 하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아시아의 주요 인권단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나마 한국 인권위가 있어서 모범과 위안을 삼을 수 있었는데 이제 이것마저 형편없이 쪼그라들면 아시아의 국가인권기구 중에 반듯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는 한탄이다. 그래서 국가인권기구 감시를 위한 아시아 인권단체네트워크(ANNI, Asian Network on NHRIs)는 지금 초비상이다. 한국 인권위를 살리는 일은 이처럼 비단 한국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시아의 일이자 세계의 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 정동기 민정수석, 이달곤 행안부장관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어긋나는 인권위의 결정 몇 개를 기억하고 있을 뿐 인권위가 과연 무엇을 하는 기관이며 어떤 점에서 위상과 역할이 독특한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국제사회와 시민사회가 일제히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권위에 대한 무지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 정부는 인권위 축소방침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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