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출발점 80년 전 오늘 태화관에 모인 33인의 민족 대표는 모두 종교단체를 통해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일제의 단속을 피해 은밀한 조직 작업을 펼치기에는 아직 탄압이 덜하던 종교 활동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33인 중 개신교가 16인, 천도교가 15인, 불교가 2인이었다. 개신교와 천도교가 전국적 조직으로 참여한 반면 불교계에서는 한용운과 백용성이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이어진 만세운동에도 천도교와 개신교계에서는 전국에서 조직적 참여가 있었다. 천주교는 일본 통치를 지지하던 교구장 뮈텔 주교가 만세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학시킬 정도로 강경한 탄압을 행했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독립운동에 열렬히 호응했다. 유림(儒林)도 3월 1일의 독립 선언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서는 뚜렷한 역할을 맡았다. 당시 유림 인사 중 독립운동과 관련, 주목되는 인물이 둘 있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다. 김윤식은 구한말의 거물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한 경력을 거치는 가운데 친일 세력과 협조한 대목도 있지만 국체 수호에는 확실한 입장을 취했다. 합방 당시에도 반대를 적극 주장한 유일한 고관이었고 3·1운동을 앞두고 고종이 죽었을 때도 '전(前) 한국 황제'란 위호(位號)에서 '전'자를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충성은 대한'제국'에 그쳤을 뿐, 대한'민국'에는 이르지 못했다. 반면 김창숙은 3·1운동에 호응해 '유림단' 운동을 일으키고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해방 후에도 민족 분단을 막으려 애쓰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맞서는 등 시대 상황이 필요로 하는 유학자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꾸준히 추구했다. 독립운동으로서 3·1운동의 큰 의미는 '제국'의 부활에서 '민국'의 건설로 목표를 옮긴 데 있다. 합방 직후의 울분이 억눌릴 대로 억눌린 뒤, 세계 정세를 파악한 신지식인들이 민족국가의 건설 방향을 새로 설정한 것이다. 이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다. 3·1운동이 지향한 민족국가는 해방 전은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실현되지 못했기에 그 이념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제2의 건국'을 논함은 그 이념이 발전적 변화의 때를 맞았다는 것일까.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필요한 과제라는 생각도 들지만 숙제를 안 한 채 개학을 맞는 학동처럼 불안한 마음이다. |
▲ 청와대 비서관이 며칠 전 독립기념관에 가서 친일에 대한 '유연한' 관점을 피력했다는 뉴스를 이제 막 봤다. 간디의 저항 방식을 폄훼하고 이승만이 "국내외 현실을 잘 아는" 대통령이어서 다행이었다니, 항일 운동이란 게 현실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제가 강요했던 수탈을 위한 근대화를 이렇게도 고마워하는 자들이라면, 내년 합방 100주 년을 경축하자고 나설까봐 걱정된다. ⓒ연합뉴스 |
고 김수환 추기경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을 받았던 일화를 적은 송재소 교수의 글을(☞바로 읽기 : 심산 김창숙과 김수환 스테파노) 며칠 전 읽으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추기경께서 선생의 묘에 절을 올리며 "살아계셨다면 찾아가 절하고 뵐 분인데 돌아가셨으니 묘에라도 절을 올려야 마땅하다"고 한 말씀에서 그 진솔한 풍모를 다시 한 번 본다. 추기경의 이런 알뜰한 공경을 받은 심산 선생이 어떤 분이었던가.
10년 전 위 글을 쓸 때 나는 심산 선생에 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으나 겉보기만으로도 매우 인상적인 경력이었다. 그때도 그분에 관해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동안의 게으름을 스스로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뉴라이트 비판>을 계기로 요즘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모으면서 그분의 생각을 살펴볼 마음이 새삼스럽게 바짝 든다. 전통 학문을 전력으로 추구하면서 또한 시대 변화에 그처럼 능동적으로 대응했다는 사실이 얼핏 모순으로 느껴질 만큼 특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망국을 앞둔 시기, 이른바 개항기 인물의 정치적 태도를 개화파와 수구파로 통상 구분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태진 교수가 <고종 시대의 재조명>(태학사 펴냄)에서 이런 분류가 일본인들의 정탐 보고서에서 시작된 용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거니와, '개화'란 말은 당시의 외래 문명을 고급 문명으로 보는 관념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틀에 묶인 관념이다. '수구'는 개화의 반대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 말이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서부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병운동까지, 개화를 반대한 모든 움직임이 '수구'란 이름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일체의 변화를 눈감고 거부하는 진짜 '수구'였을까?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에 중국이 제2차 중영전쟁으로 유린당했다. 전통적 천하 체제의 기둥인 중국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웬만한 안목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때까지 없었던 변화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의 강도 높은 개혁이 10년 가까이 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개인적 역량에만 있었겠는가? 국가가 비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위기의식이 개혁의 합의를 쉽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1876년의 개항 이후 변화의 불가피함에 대한 인식은 계속 심화되고 확산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변화를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문자 그대로의 '수구'는 존재하기도 힘들고 더러 있더라도 정치적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변화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쟁점이었다. 일본인들이 인정한 '개화파'는 일본의 조선 '진출'에 협조적인 방향을 추구한 자들이었고, 다른 방향을 추구한 인물들은 '수구파'로 낙인찍혔다.
이미 갑신정변(1884) 때부터 소위 개화파는 근대화의 수행을 위해 국가 정체성을 포기하는 성향을 보였다. 이와 반대로 변화를 추구하되 변화의 주체가 연속성을 지키는 길을 찾은 사람들은 수구파로 몰렸다. '보수파'란 이름이 더 어울릴 이 사람들을 일본인 학자들이 '수구'로 폄훼한 것은 일본의 야욕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한 변화의 주체는 조선 왕조였다. 왕조의 내부는 근대화의 필요에 따라 뜯어고치더라도 왕조라는 그릇은 그대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이 그릇은 근대화의 충격을 견뎌낼 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그래서 깨지고 말았다. 새 그릇을 만들어 새로운 주체로 키우려는 움직임이 망국 10년째 되던 해에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3·1운동이었다.
영남 선비 김창숙은 1905년 상경해서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옥고를 겪었다. 이때 그는 조선 왕조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 대표들의 진정서를 만들어가지고 상하이로 망명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체포, 압송되었으나 출옥 후에도 항일 의지를 꺾지 않았고, 해방 후에는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고, 이승만 독재를 비판해 1951년에는 '하야 경고서'를 이승만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유학은 전통 체제의 이념을 공급해 온 전통 학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 새로운 이념이 필요할 때 그에 부응할 수 있는 적응력과 유연성을 가진 학문임을 누구보다 잘 보여준 것이 심산 선생이다. 가톨릭이 보수적 종교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인권 보호에 앞장설 수 있음을 보여준 김 추기경의 심산 선생 우러르는 마음이 각별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담 한 가지. 위 칼럼은 모 신문 1999년 3월 1일자에 무기명으로 실은 것이다. 그 신문의 옴부즈맨 칼럼을 맡고 있던 김병익 선생이 며칠 후의 칼럼에서 그 날짜 신문에 3·1운동 80주년과 관계된 기사가 그 한 꼭지뿐이었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지적을 받고 보니 기막힌 사실이다. 3·1운동의 의미에서 되새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도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으니 정략적 동기에서 나온 몰상식한 역사관이 활개를 치게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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