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 제77조(의사일정의 변경) 의원 20인이상의 연서에 의한 동의로 본회의의 의결이 있거나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의장은 회기 전체 의사일정의 일부를 변경하거나 당일 의사일정의 안건 추가 및 순서 변경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의 동의에는 이유서를 첨부하여야 하며, 그 동의에 대하여는 토론을 하지 아니하고 표결한다.
요즘 국회법 제77조가 화제다. 지난 25일 고흥길 문방위원장이 "국회법 제77조에 따라 미디어법 22개를 상정한다"고 기습 상정을 하면서 이 조항을 지켰는지 논란이 벌어지더니 이번에는 국회의장이 여야 협의 없이 예정된 본회의를 일방적으로 취소해 "국회법 77조 위반"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잃어버린 10년' 못지않게 듣고 있는 말이 '법과 질서 바로세우기'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기관의 최고 수장이, 특히 지난 연말 민주당의 국회 회의장 점거 사태를 국회법 위반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던 장본인이 스스로 국회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구에게 국회법을 지키라 말할 수 있나.
이날 본회의에서 처리할 안건이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의장 측의 설명이지만, 다음 본회의로 미루면 이조차도 쟁점법안에 연계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정상적 처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민주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할 가능성을 우려한 기색도 역력하다. 실제로 본회의가 이날 열리면 민주당이 회기 종료일까지 점거농성에 돌입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돈 건 사실이다.
이는 국회의 정상적 운영에 차질을 빚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만큼, 국회의 원활한 운영을 책임진 의장으로서는 염두에 두어야 할 변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법안을 의결하기 위해 예정된 본회의를 취소하기 전에 야당과 만나 '점거농성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는 노력이 선행됐어야 옳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본회의가 열리면 무작정 밀고 들어가 눌러앉겠다는 막무가내를 부렸다면 김 의장의 선택이 불가피한 조치로서 그나마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김 의장은 이러한 사전 노력 없이 한나라당의 본회의 취소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정치적 결정이란 의심을 사게 된다. '막판 날치기를 위한 것이다', '이상득 의원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등의 정치적 추측이 나오는 건 김 의장이 자초한 셈이다.
게다가 국회 사무처가 점심시간에 국회의사당 출입문들을 기습적으로 걸어 잠그며 출입통제를 하는 등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김 의장의 '기울어진 선택'과 무관치 않아보인다.
정치적 중립을 위해 국회의장은 당적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공평한 중재자가 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최소한 정직한 중재자는 돼야 한다. 여야 합의에 의한 의사일정을 일방적 판단에 따라 취소해버린 건 분명 과한 조치다.
'신뢰의 위기'는 경제분야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여야 간의 신뢰,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머리띠라도 동여매야 할 국회의장의 이날 처신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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