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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라, 이문열! '87년 이전이 그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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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솔직하라, 이문열! '87년 이전이 그립다'고"

[박동천 칼럼] 이문열식 언어 퇴행

"'기득권'의 카르텔이라 할 것이 만들어졌고 '기득권'의 구조화가 자리잡았다. 대의민주정은 지쳐있다. '조·중·동'에서의 오해와 착시를 활용한 여론 조작과 다수 위장은 '안보 위기'란 허구를 만들어 냈다. '독재 회귀 세력'이 계기를 잡아 한곳에 모여 다수를 조작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나치스가 등장한 배경이 연상되어 우려도 된다. 보다 상위의 공동선(共同善)을 개발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쉽지 않고, 기득권 세력의 자제와 그리고 헌법 체계를 수호할 효율적인 수단과 방도를 찾아야한다."

누가 한 말일까? 단어 몇 개만 빼면 이문열이 한 말이다. 이문열이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했다는 소리에서 "불복"을 "기득권"으로, "인터넷 광장"을 "조·중·동"으로, "집단지성"을 "안보 위기"로, "대선 불복 세력"을 "독재 회귀 세력"으로 바꾼 결과다. 비교를 위해 이문열이 한 말도 여기 옮긴다.

"불복의 카르텔이라 할 것이 만들어졌고 불복의 구조화가 자리잡았다. 대의민주정은 지쳐있다. 인터넷광장에서의 오해와 착시를 활용한 여론조작과 다수위장은 집단지성이란 허구를 만들어 냈다. 대선불복세력이 계기를 잡아 한곳에 모여 다수를 조작한 것 같다. 예를들어 나치스가 등장한 배경이 연상되어 우려도 된다. 보다 상위의 공동선(共同善)을 개발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쉽지 않고, 불복세력의 자제와 그리고 헌법체계를 수호할 효율적인 수단과 방도를 찾아야한다." (<프레시안>, '남재희 칼럼' 2009년 2월 20일)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수준의 언행은 이제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역겨움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지적과 성토를 당하고도 끝내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 많은 이문열을 가르칠 생각은 전혀 없다. 참혹한 경험도 나보다 더 많이 해봤을 테고 사치스런 경험도 나보다 더 많이 해봤을 테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에게는 잘 안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문열의 퇴행적인 언어 습관이 우리 사회의 풍토병으로 번지지 않도록 약간의 걸림돌 노릇은 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저런 어법 뒤에 숨은 협박과 교만을 폭로할 필요가 있고, 사실은 그러한 협박과 교만 자체가 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나아가 그런 절망은 일종의 정신분열증 때문임을 밝히고자 한다.

협박과 교만 : 말이라기보다는 고함소리다

▲ 절망에 사로잡혀 혼란하고 난잡한 이문열의 언사에서 잡음에 해당하는 것들을 골라내고 그나마 사람의 목소리로 여과해서 보면 "정권의 자제와 소외계급의 인내"라는 말이 남는다. 하지만 이 역시 "너부터 인내해야 내가 자제한다"고 하면 협박이 돼서 말은 없어진다. ⓒ연합뉴스
고함소리도 물론 일종의 언어인 것까지는 맞는다. 그러나 그것을 언어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몸짓이나 눈짓을 일종의 말로 여기는 것과 같은 의미일 뿐이다. 몸짓, 눈짓, 소리 등을 통한 소통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대단히 흔한 일로 인간적 존엄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인간적 존엄성이란 소리보다는 내용을 통한 소통과 특별히 연관되는 것이다.

이문열이 걱정하는 "불복의 카르텔"이 의미 내용의 소통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려면 노무현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은 "대선 불복 세력"도 함께 겨냥하는 방향으로 얘기가 진행되었어야만 한다. 당시 대선 불복 세력을 대표했던 이문열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은 격이니, 말이 되지 못하고 소리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을 통한 소통의 여지를 끊어버리고 상대에게만 손가락질을 하다 보면 다음 순서는 진흙탕 싸움이다. 자기가 불복했던 것을 깡그리 잊고 오히려 남에게 불복한다고만 떠드는 것은 이치로 따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무력으로 싸워보자는 것인데, 여기에도 속셈이 없지 않다. 정권을 차지한 김에 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곧 "불복"으로 몰아서 여차하면 소탕하겠다는 협박이다.

현재의 정권이 임기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감히 입에 올릴 소리가 아니다. 반대의 권리가 자유사회의 기본 원리임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가식이라도 할 필요를 느낀다면, 혹시 유혹이 일어나더라도 애써 떨쳐버려야 할 소리다. 다시는 정권이 바뀌지 않으리라고 자만하고 있다는 증좌다.

절망 : 양육강식 밖에는 보지 못한다

보통 돈이나 지위나 명성을 좀 가진 자들은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안다. 운이 좋았다거나, 그 와중에 알게 모르게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비행과 불의와 착오들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망각이야말로 절망에 빠졌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이문열은 책을 꽤나 많이 팔았고,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지성인의 한 명으로 분류되어 관훈클럽에 초청까지 받았으니, 통속적인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이 틀림없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생존경쟁에서는 사자도 살아남고 코끼리도 살아남고 늑대도 살아남고 바퀴벌레도 살아남고 아메바도 살아남고 박테리아도 살아남는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흘리면서 교만을 부리고 남을 협박한다는 것은 마치 자기가 "백수의 왕" 사자 또는 설령 거기까지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호가호위"하는 여우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승자를 찬양하는 이미지 자체가 사람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이문열의 몸에도 맘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고 "영광"을 느낄까, 아니면 단지 공복을 채운 만족만을 느낄까? 사자가 영광을 느낀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3억4000만 년 동안 살아남은 바퀴벌레들도 "지구에서 가장 오래 된 곤충"이라는 영광을 느낀다고 주장할 준비를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생존이란 가치가 아니다. 생존은 바람처럼 그저 왔다 가는 것이다. 가치는 살아남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았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따지는 관점은 철저하게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성공했다는 것은 투쟁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일 뿐이다. 성공담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면, 역경을 이겨낸 소망이나 성공한 후의 선행 등, 선한 의지가 표명되기 때문이다. "어떻게"에 관해서 자랑할 것보다 숨길 것이 더 많은 사람일수록 생존 그 자체를 자랑하려고 한다. 그런데 생존 말고는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이 곧 절망의 표현이다. 설사 성공으로 가는 도중에 소망보다 탐욕밖에 없었더라도, 설령 성공한 다음에도 선행보다 전횡만을 일삼았더라도, 그래도 생존밖에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남아 있다면, 조금이라도 가치의 소중함을 느끼는 영혼이 아직 깃들어 있다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이라도 무엇을 잘 했으며 무엇을 잘못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사적인 의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띤다. 잘/잘못의 구분은 오로지 인간사회를 전제로 했을 때만, 다시 말해서 의식적인 개선의 가능성을 전제로 삼을 때에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문열의 모든 글이 약간의 현학으로 시작하다가는 종내 아무 뜻도 없는 암흑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그의 몸에 속속들이 절망이 배어있어서, 영혼이 깃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 : 언어 분열은 곧 정신 분열이다

그는 반대를 "불복"이라고 부르면서, "헌법 체계를 수호할 효율적인 수단과 방도"를 말했다. "불복"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가려서 반영하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는 "효율적인 수단"이란 결국 효과적인 억압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헌법 체계"가 될까?

그가 생각하는 "헌법 체계"란 결국 87년 이전 체제, 자기가 "홍위병"이라고 불렀던 좌파불순분자들이 합법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했던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동경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복의 카르텔"과 "집단지성이라는 허구"를 공격할 때에는 협박을 서슴지 않던 이문열이 왜 "'87년 이전이 그립다"고는 솔직하게 말을 못할까? 왜 그런 뜻을 "헌법체계"라고, 스스로 내용을 잘 모르는 둔사를 써서 에둘러 표현할까?

내 눈에는 여기서 교활함보다는 혼란이 더 많이 보인다. 박정희와 전두환 체제의 일부 국면을 이문열은 동경하면서도, 스스로에게도 역겨움을 주는 다른 국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단, 무엇을 동경하면서 무엇이 역겨운지를 가려낼 능력도 없고 찬찬히 따져볼 용기도 없을 뿐이다. 정신 분열이란 항상 능력 부족과 용기 부족이 겹쳐서 발생한다.

"헌법 체계"라는 말이 그냥 헛소리가 아니고 조금이라도 다른 체계와 변별력을 가지는 개념이려면, 그것은 전횡이나 억압과는 반대말이 되어야 한다. 노무현에게 반대한 것은 불복이 아니고, 이명박에게 반대하는 것만 "불복"이라는 소리는 언어에 조금이라도 내용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억압과 전횡으로 일관했던 박정희와 전두환 체제는 헌법이 권력 아래서 신음했던 시대, 다시 말해 헌법전은 있었지만 온전히 기능하지 못했던 시대라고 말해야 이치의 물꼬가 트이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선 태종을 효과적인 군주였다고 본다. 하지만 누가 그 시대를 "헌법 체계"라고 부른다면 틀렸다고 비판할 것이고, 그래도 계속 우기면 무식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박정희를 좋아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런 체제에다가 "헌법 체계"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곤란하다. 이문열은 아마 분명히 의식은 못하면서도, 어렴풋이나마 이런 괴리가 있다는 냄새를 맡은 것 같다. 그래서 생기는 혼란을 난잡한 언어에 실어서 절반은 감추고 절반은 표명한 셈이다.

치유책 : 이문열 말고 선량한 시민들을 위해

헌법이란 정치에 관해 공정한 규칙이 되어야 이름과 내용이 부합할 수 있다. 명실상부한 헌법이라야 권위를 가지고, 권위가 있어야 효과를 낸다. 공정한 규칙이 갖춰야 할 핵심 요소는 반대의 권리다. 다시 말해 정권에 대한 반대는 "불복"이 아니라 권리인 것이다. "불복"이란 공권력의 정당한 강제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문열은 이와 관련해서 매우 기본적인 사항부터 놓치고 있다.

길거리 시위나 집회는 그 자체가 법으로 보장된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다. 용산 참사에 대해 올바른 진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는 범죄가 아니다. 나도 작년의 촛불 집회는 과녁이 불분명하다고 봤다. 하지만 합리적인 이유가 있든 없든, 기분이 나쁘면 표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문열이 관훈클럽에서 한국어에 상해를 입혀도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기 때문에 범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불복"이니 뭐니 할 여지가 없다. 반대를 "불복"과 동일시하는 체제는 헌법은 없고 권력만 있는 체제로서, 조선 태종, 박정희, 히틀러, 김정일 체제등이 비근한 사례다.

다음으로, 그는 "불복 세력의 자제"를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의 언어는 다시 절망에 빠져서 왜곡을 거듭한다. 우선, 자제라는 말은 보통 신사가 상대의 신사도에 호소할 때 쓰는 말이다. 상대를 협박하면서 "자제하라"고 하면, 상대가 설령 자제를 하더라도 강제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자제란 기본권이 채워진 위에 추가적인 욕구를 억제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기본권이 채워지지 못해서 발생하는 욕구를 눌러야 하는 상황은 인내 또는 인고라고 부르는 것이 소통을 지향하는 어법이다. 따라서 만약 자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마땅히 권력과 부와 지위를 가진 쪽에게 해당하는 일이 되는 것이고, 사회평화를 위해서 사회적 약자에게 호소할 것이란 인내 아니면 인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절망에 사로잡혀 혼란하고 난잡한 이문열의 언사에서 잡음에 해당하는 것들을 골라내고 그나마 사람의 목소리로 여과해서 보면 "정권의 자제와 소외계급의 인내"라는 말이 남는다. 하지만 이 역시 "너부터 인내해야 내가 자제한다"고 하면 협박이 돼서 말은 없어진다. 정권이 먼저 자제하고, 그 다음에도 간곡한 충정이 있어야 소외계급의 인내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이 자제와 인내의 차이고, 그것이 정의다.

이 모든 얘기를 이문열더러 듣기를 기대하고 한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우연히라도 엿듣고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다만 환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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