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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시, 이명박과 달랐다"

[박동천 칼럼] 로드니 킹 사건과 용산 참사

용산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20일간 열심히 노력한 검찰이 결과를 발표했다. 약간의 장식은 첨가되었지만 골자는 묘하게도 19일 전 조갑제닷컴에 떴던 내용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전국철거민연합이라는 배후 조직이 있었고, 망루에서 화염병을 들고 농성한 사람들은 시민들에 대해 현존하는 위협이었기 때문에 진압이 불가피했으며, 불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농성자가 던진 화염병 때문에 시작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용산의 참사 보도를 처음 접할 때부터 드레퓌스 사건과 워터게이트 사건, 박종철 사건과 로드니 킹 사건이 생각났다. 앞의 세 사건에 관해서는 전에 기고한 글에 이미 썼으므로, 이번에는 로드니 킹 사건을 한번 훑어본다. (☞관련 기사 : "왜곡과 은폐의 악순환…지금이 끊을 기회다" )

▲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대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의 원인이 된 로드니 킹 폭행 사건. 1991년 3월에 고속도로에서 경찰 네 명이 흑인 로드니 킹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찍힌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면서 큰 논란이 되었다. ⓒ로이터=뉴시스

1992년 4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대에 폭동이 일어났다. 그날 네 명의 경관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무죄 평결이 났기 때문이다. 재판은 1991년 3월에 고속도로에서 경찰의 정지명령에 불응하고 도주하다가 체포된 흑인 로드니 킹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을 사용한 혐의 때문이었다. 현장 주변에 살던 한 시민이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증거였다. 하지만 백인 열 명, 라티노 한 명, 아시아계 한 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한 명의 경관에게만 유죄를 인정하고 세 명은 무죄라고 평결했다.

오후 3시 15분에 평결이 발표되었는데, 3시 45분께부터 법원 청사 앞에 300명 정도의 평화 시민이 모여 항의했다. 군중이 점점 많아지자 경관 수십 명이 통제를 시도했지만 수에서 밀려 물러났다. 6시 45분경부터는 군중이 폭도로 돌변해 상점들을 습격하고 자동차와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백인, 백인처럼 생긴 라티노들이 처음에는 공격 대상이었지만, 나중에는 한인상점들도 주요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래서 한인들은 이 재난을 "4·29"라고 부른다.

방위군, 육군 7사단, 해병 1사단 등, 군 병력이 출동하고 통행 금지가 선포되고도 6일 만에야 가라앉은 이 폭동으로 53명이 피살되고, 2000명이 부상했으며, 3600건의 화재가 발생하고, 1만 명이 체포되었다. 재산 피해액은 당시 화폐로 8-10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당시 대통령 조지 부시는 "무정부 상태를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군대를 출동시켜 사태를 가라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원인이 된 경관들에 대한 재심 여부를 연방대배심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조치했다. 연방정부가 개입하여 다시 열린 재판은 1993년 4월 17일 두 명의 경관에게 유죄를 평결했고, 나머지 두 명은 무죄 방면했다. 이 날, 혹시 폭동이 다시 일어날까봐 방위군까지 보강된 상태에서 인근지역 전체 경찰이 비상대기했다. 폭동은 재발하지 않았다.

경찰 지휘 계통에는 문책이 없었다.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지 않은 일선 경관들의 잘못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죄로 풀려난 경관 두 명도 옷을 벗었다. 한 명은 스스로 사직했고 다른 한 명은 파면되었다. 로드니 킹은 380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후로도 뺑소니와 같은 각종 범죄로 11번이나 체포된 경력이 있다.

LA 폭동, 또는 4·29 폭동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일어났을까? 1993년 4월처럼 방위군으로 보강된 경찰 병력이 좍 깔려서 항의 시위를 사전에 억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미국의 보수를 대표했던 '아버지' 부시조차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조차도 한 명에게만 죄를 물은 평결에 문제가 있다고 봤기 때문에 대배심을 소집한 것이다.

로드니 킹이 죄가 없어서 경관의 폭행이 문제된 것은 아니다. 로드니 킹은 1991년의 그날 도주하기 전부터 형기를 마치지 않은 가석방 수형자의 신분이었다. 과속으로 걸리면 가석방이 취소되기 때문에 도주한 것이다. 더구나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추격전 끝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게 된 다음에도, 경찰의 체포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경관들의 약을 올렸다. 테이저 총을 맞고도 다시 일어나 장난을 계속하자 곤봉으로 제압당한 것인데, 문제는 제압을 위해 충분한 정도를 지나 심하게 분풀이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맘속에서 이 그림이 자꾸만 용산과 포개져서 왜 그런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좀 따져봤다. 차이점과 공통점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1. 로드니 킹의 경우 경찰의 과잉폭력이 찍힌 비디오가 있지만, 용산의 경우는 현장 상황에 관해 정확한 물증이 없다. 유가족 측은 현장에서 폭행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검찰수사는 단지 사체에 구타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쳤고, 진압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2. 로드니 킹의 경우 LA경찰은 폭행에 가담한 네 명의 경관을 조직 차원에서 보호하지 않았다. 적어도 폭동 후 재심에서 LA경찰은 그들이 업무수칙을 어겼다는 데에 관해 다투지 않았다. "경찰 조직의 동요"가 우려된다는 보수파의 목소리도 거의 없었다. 폭동을 "떼법"이라고 비판하지도 않았다. 용산의 경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의 조사단은 서울경찰 지휘부가 업무수칙을 어겼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검찰은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하면서도, "경찰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답했다. 한나라당은 그동안 의혹을 제기해 온 "반정부 세력들이 경찰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조사단이 가장 진상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풀리지 않은 의혹을 파헤쳐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단, 그들에게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증거 수집에 한계가 있다. 반면에 검찰과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금까지 "진상 규명 우선"을 소리높이 외쳤지만, 김석기 내정자 자진사퇴라는 정치적 해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는 의구심이 든다.

3. 결과적으로 1992년 재판과 1993년 재판은 경관 한 명을 벌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1992년 재판에서 두 명에게 유죄 평결이 났다면 폭동이 없었을까? 단언하기는 어렵다. 폭동은 분명히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흑인 사회의 불만이 폭발된 면이 크다. 용산의 경우, 누적된 불만은 사회계급적인 문제라서 인종갈등처럼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용역의 폭력 여부에는 눈을 감고 경찰의 강경 진압을 불가피하다고 보면서, "제도 개선을 통한 재발 방지"를 말하는 정부의 입장은 그동안 누적되어 온 서민들의 불만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지표로 보인다. 마치 로드니 킹이 폭행당한 것은 순응하지 않는 범인을 체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고, 흑인 사회가 느끼는 일반적인 불만은 앞으로 제도 개선으로 해결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세입자의 불만은 제도 개선으로 고친다고 하면서 그런 제도를 요구하느라 농성한 사람들은 그저 범죄자라고만 몰아붙인다는 것은, 결국 기어이 떠들어서 제도를 개선하게 만든 사실이 괘씸하다는 뜻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도와 관행에서 고쳐야 할 만큼 잘못된 점이 있는 정도에 비례해서 농성자들의 실정법 위반은 정상이 참작되어야 비례가 맞다. 또한 당연히 용역업체들의 불법행위 역시 남김없이 진상을 밝혀서 처벌할 대목이 있으면 처벌해야 정부의 권위가 살아날 것이다.

4. LA폭동은 비디오테이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비디오테이프가 없었다면 애당초 경관들이 재판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로드니 킹은 어쨌든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비디오테이프가 나오기 전에도 물론 경관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았지만, 발설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용산에 관해서는 그런 정도의 증거는 아직 없는 것 같다. 검찰이 발표한 진상은 "진실, 모든 진실, 오직 진실"이라는 기준에 비출 때, "모든 진실"에 부합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화인에 관해서도 추정만 할 뿐 특정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검찰이 발표한 진상 밖에 어떤 진상이 있는지는 오직 증거가 갖춰진 다음에나 말할 수 있겠다. 조사단이 재판 과정에서 어떤 증거를 제시할지 궁금하다. 재판 전에라도 그들이 수집한 역증거의 설득력에 따라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한나라당이 거부할 명분이 사라질 수도 있다.

6. LA폭동은 많은 피해를 낳았지만, 인종 갈등을 증폭하기보다는 약간이나마 치유하는 쪽으로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상에 관한 의혹은 남지 않았고, 로드니 킹이 범죄자라고 해서 그의 인권을 짓밟아도 괜찮다는 식의 무도한 주장이 횡행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의 진상에 관해 우리사회는 앞으로 한참 다퉈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먼저 앞으로 벌어질 지루한 공방에 지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도록 스스로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염병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잘못이 농성자에게 있다는 이야기는 틀린 소리임을 많은 사람들이 꿰뚫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7. LA와 용산의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정치적 교훈은 사회적 불만을 경찰력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경찰력이 강하게 막으면 일시적으로 효과는 있어 보이지만, 결국 터질 때 더 크게 터질 뿐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뿐 아니라 전체주의나 군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체주의나 군주정이 혁명을 막지 않아서 민주주의가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국 네오콘의 원조에 해당하는 조지 부시도 폭동을 그저 폭도 탓으로만 돌리기보다는 재심을 통해 부족했던 정의를 메우려고 했다. 정의 없이는 질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명박 정부가 깨닫기를 나는 아직도 바라고 있다. 정부가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 서울 거리에 촛불뿐이 아니라 화염병과 최루가스가 난무하는 광경이 재연될 확률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8. 따라서 불필요한 사회적 마찰을 줄이고 이 문제를 평화롭게 절차주의적으로 해결할 최선의 방법은 국회가 진상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국정조사 발동이 검찰에게 수모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봉건적인 사고방식이다. 권력기관들 사이에 누가 더 잘났느냐는 관심보다는 이런 비극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신뢰의 끈을 강화하는 과제가 훨씬 엄중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이런 요구를 "정치 공방"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사실은 이런 종류의 문제를 진상과 정의의 원리에 따라서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담당해야 할 첫 번째 책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스스로 정당으로 자처한다면 이 책무를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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