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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자릿수 대기업이 위험"…답이 없다

전문가들 "정부 최종 대부자 역할 미루면 안돼"

올해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한 해를 보낼 것이라는 전망이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위기징후가 금융시장에서 실물로 번져 고용대란이 예고되는 데다 실물 위기가 다시 금융권 부실로 되돌아오는 양상도 구체화하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주요 투자기관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올해 한국경제가 주요 20개 국가 중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리라고 전망하고 나섰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대기업마저 무너지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될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왔다.

전문가들은 그 동안 정부의 결단 부족으로 집행되지 못한 구조조정을 신속하게 실시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위기에 특히 취약한 서민대책이 시급하다고도 했다. 이를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다면 IMF의 '경고'가 현실화할 것이라는 얘기다.

내수·수출 모두 사망선고

우선 국내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여겨지던 수출길이 완전히 막혔다. 2일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은 전년동월대비 32.8%나 줄어든 216억9000만 달러에 그쳤다. 수출입 통계 집계가 시작된 지난 1980년 이후 최대 감소폭이다.

수입마저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1998년 7월의 -43.9% 이후 가장 큰 폭인 32.1% 감소율을 기록, 246억6000만 달러에 그쳤다. 수출길이 막힌 기업의 공장가동률이 줄면서 수입규모가 대폭 축소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올해 무역수지는 새해 첫달부터 29억7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수출 감소율이 32.2%에 달해 3개월 연속 30%대 감소율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세계경기 동반 침체에 따른 중국 경제 경착륙이 한국 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고위간부는 "지난 두 달 동안 한국의 전체 수출 감소율보다 대중수출 감소율이 훨씬 크다. 중국경제 경착륙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우리가 지난 10여 년간 향유했던 '차이나 플레이' 시대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이러다가는 실물경제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수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올해 자동차 내수시장 예상대수는 105만대로 외환위기 당시인 80만대 이후 최저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자영업자 수는 8년 만에 600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자영업자 수는 경기 하강기에 줄어들고 호황기에 늘어나는 경기순응적 특성을 보인다.

중소·중견기업 부문은 쌍용차와 C&그룹 등 유력기업이 무너지면서 연쇄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1분기 중소기업 신용위험지수 전망치는 59를 기록,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지난 1999년 1분기 이후 가장 높았다.

"중소기업 다음은 대기업 차례"

내수와 수출 붕괴는 새해 들며 기업, 가계의 두 경로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경제 혈맥인 금융시장을 거쳐 정부 재정의 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의 빠른 속도로 국가 경제 기틀이 무너져내리는 모양새다.

기업부문 위기는 중소기업을 넘어 대기업집단에까지 번지는 모양새다. 건설업체의 경우 부동산 시장이 좀처럼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도 올해 예정된 대규모 공급계획이 수정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주택가격 추가 하락-대규모 미분양-우발채무(미실현 채무) 급증으로 이어져 건설사 재무구조를 갉아먹는다.

한 시중 금융사 관계자는 "아직 대형 건설사 재무제표는 비교적 건전한 편이지만 우발채무를 감안할 경우 부채비율이 급격히 늘어난다. 게다가 현금이 제대로 돌지 않는 현상은 이미 대형건설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중소기업 뿐 아니라 일부 대기업의 자금 흐름에도 '빨간 불'이 켜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IMF 위기로 구조조정이 단행되기 전 대우 그룹의 입간판. ⓒ연합
대기업집단의 대표적 수출산업인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등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9400억 원에 달하는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삼성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전한 LG전자 역시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은 4분기 대비 30% 정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 대표 통신업체인 KT는 4분기 당기순손실을 기록했으며 쌍용차는 여전히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에서 관리하는 우리나라 43개 대기업집단의 현금흐름을 보면 이 중 두자릿수의 그룹에서 불안정한 현금흐름 추이가 나타났다"며 "이미 중소, 중견기업 부문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들 대기업 중 한 두 곳이라도 쓰러진다면 예상보다 경제가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가계에도 지진이 났다. 기업이 위기 앞에 몸집을 줄이기로 하면서 고용이 불안정해진 데 따른 직격탄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물가가 또 다시 복병으로 등장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안정세를 보이는가 싶던 유가는 최근 들어 다시 폭등세를 기록, 서울 주요 주유소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00원선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사립대 납입금(7.1%), 공동주택관리비(5.9%), 삼겹살(11.6%) 등 서민생활에 밀접한 연관을 가진 물가지수가 줄줄이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특히 수입물가지수가 전년동월대비 22포인트 오른 140을 기록하면서 수입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올라 앞으로도 물가 상승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정부와 한은이 기업부문 자금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로 시중에 돈을 푼 것도 물가상승 자극요인이 되고 있다.

금융위기-실물위기-금융위기 '악순환'

가계와 기업이라는 두 경제주체의 위기는 금융위기를 심화시키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18개 은행 중 7곳이 정부가 마련한 20조 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 도움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기업은행, 외환은행은 물론 '빅3'로 꼽힌 우리금융지주 산하 우리은행도 포함돼 있다. 우리은행은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본비율(BIS)이 금감원 권고치인 9%에 크게 못 미치는 7% 수준에 불과해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2조 원가량을 수혈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의 경영난을 반영하듯 지난해 4분기 국내 은행의 순이익은 7조9000억 원에 그쳐 전년대비 47.4% 급감했다. 한해 사이에 이익 규모가 반토막난 것이다. 이는 카드채위기 여파가 막바지에 이르렀던 지난 2003년 1조9000억 원 이후 최저 수준이다.

이와 관련, 주재성 금감원 은행업서비스국장은 "경기 상황과 기업 구조조정, 시중금리 하락 등을 감안할 때 올해 수익 전망도 결코 밝지 않다"고 지적했다. 앞으로도 대출 부실화와 기업 구조조정 여파가 은행권에 강한 압박을 가하리라는 경고다.

정부 "약발 안 받네…"

이처럼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일로인 데다 IMF가 올해 한국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2.0%에서 -4.0%로 대폭 수정하자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IMF의 발표 직후 곧바로 기자회견을 실시하는 등 시장 불안 달래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의 재정집행이 과감히 이뤄지고 있어 위기를 빠른 속도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실제 현장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정부와 한은이 지난해 하반기 이후 잇따라 발표한 원화 및 외화유동성 공급과 지급보증 계획 등은 전혀 효력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와 각종 금융기관이 시중에 풀기로 계획한 자금 규모는 총 390조4000억 원에 이른다. 올해 연간 예산 284조5000억 원의 1.4배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금융권에 따르면 3일 현재 집행된 자금만 약 132조2000억 원이다.

하지만 이들 자금은 당초 정부 의도와는 달리 전혀 실물 유동성 회복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은행은 여전히 정부에서 받은 돈을 움켜만 쥐고 있을 뿐, 자금 조달에 비상이 걸린 중소기업은 지속적으로 쓰러지는 모양새다.

오히려 돈을 굴릴 곳을 찾지 못한 시중자금은 머니마켓펀드(MMF) 등 초단기자금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 3일 자산운용협회와 굿모닝신한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MMF에는 18조8028억 원가량이 순유입됐다.

금융계에서는 신규 유입액의 상당 부분이 정부가 푼 돈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준금리가 낮아지자 시중은행이 한은에서 싸게 빌린 돈을 실물시장에 대출로 풀지 않고 MMF에 쌓아두는 것이다. 기준금리가 2.5%인 반면 MMF의 평균수익률은 3%대다.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한 한 중소기업 간부는 "은행의 지원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은행이 자금사정이 탄탄한 기업에만 돈을 대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구조조정·저소득층 지원 정책변화 불가피

이처럼 정부 정책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일각에서는 IMF의 -4% 성장률마저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당초 예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외환위기 당시도 97년 말에는 1% 성장률을 전망했다가 98년 1월 -1%로 바꿨고 결국 -6.9%까지 미끄러졌다"며 "지금은 당시와 달리 세계적인 공황이 닥쳤고 IT붐이라는 돌파구도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동락 하나대투증권 연구위원은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회사채 금리와 국고채 간 스프레드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신용관련 위험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뜻"이라고 했다.

결국 해결책은 조속한 구조조정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더 이상 구조조정을 미룬다면 감당하기 힘든 파국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에 따른 가장 큰 부작용으로 예상되는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김 교수는 "정부가 구조조정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돈을 아무리 많이 풀어도 실물로 흘러가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 이는 불확실성을 더욱 확대시켜 성장률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며 "지금은 정부가 뒤에 숨은 채 은행에 구조조정을 맡길 때가 아니다. 외환위기 당시처럼 국회 동의를 받아 대규모 공적자금을 집행해야 한다. 정부가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야 할 때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또 "구조조정에 따라 고용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이는 정부 재정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며 "효과적 고용문제 대응을 위해서는 한시적으로라도 'MB노믹스'를 내년 이후로 미뤄야 한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유한한 정책수단과 자원으로 두 가지 상충되는 목표(MB노믹스와 고용안정)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올해는 모든 경제정책 목표를 위기 극복에 집중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익명의 증권사 간부는 서민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는 "지금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곳이 소득 5분위 기준으로 하위 40% 서민층이다. 이미 일반 가계의 현금흐름이 굉장이 어려운 상태"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서민경제가 완전 무너질 수 있고 이는 사회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 정부 경제정책이 서민가계 살리기에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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