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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도 '괴물'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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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도 '괴물'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철학자의 서재] <뚝딱 뚝딱 인권 짓기>

현 정부의 반인권적 의식

인권단체 활동가만큼 이명박 정부에 할 말이 많은 이들도 드물 것이다. 이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부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하겠다고 함으로써 인권단체 활동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정부가 대부분의 인권 침해를 자행하는 현실에서 그러한 인권 침해를 감시해야 할 국가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를 행정부 수반의 산하에 두겠다는 발상은 현 정부가, 속된 말로 하면, '인권'의 '인'이 아니라 'ㅇ'도 모른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인권 의식의 부재가 어떤 코미디를 야기하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과거에 장애인 시설에 대한 국고 보조금을 착복한 혐의로 감사원에 고발조치 당했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시설 내 장애인에게 불임을 전제로 결혼을 허락하고 임신한 장애인 여성에게는 낙태를 강요했던 목사를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러한 현 정부의 인권 의식 부재는 사회적 사건들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실시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성적에 따른 줄서기를 강요했다. 또한 광우병으로부터의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 국민적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임으로써 국민의 '생명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였다. 그리고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철거민들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학살하고서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굵직한 것만 거론해도 이 정도이니, 현 정부가 계속 집권한다면 앞으로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심란하기만 하다. 앞으로도 '의료 민영화', '수돗물 민영화' 등을 통해 의료권과 안전한 수돗물을 마실 권리조차 침탈당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나는 이러한 정치적·제도적 측면에서의 퇴보는 앞으로 다시 바르게 되돌릴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제도의 변화에 비해서 인간 의식의 변화는 쉽지 않다. 이 정권이 유지되는 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서 인권 의식이 퇴보하지는 않을까?

우선 나 자신부터가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보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인권 침해가 만연해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어느덧 무감각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화가 나는 현실이 연속되니 화내는 것이 괴로워서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어지간한 일에는 화조차 나지 않게 되어간다.

이성보다는 감성

20대 대학생 때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가 "나이 40에 불혹(不惑)했다"라는 구절에 위안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화를 잘 내는 성격인 내게 '불혹'은 쉽게 화내지 않는 것으로 오독되었다. 공자는 내게 수양만 잘 하면 40의 나이에는 좀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하지만 지금 40을 훌쩍 뛰어넘은 나이의 나는 여전히 화를 잘 낸다. 그렇다면 공자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인가?

물론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한 내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논어>를 들춰보니 당시의 현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공자가 곳곳에 보인다. 사실 '불혹'은 분노하지 않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오히려 불합리한 외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불합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불혹'의 뜻에 가깝다.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하지 않아서야 어찌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쓰는 말 가운데 '인권 감수성'이라는 게 있다. 참 멋진 말이다. '감수성'이라.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외적인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로서, '감성'이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감성'이 '이성'과 대응되는 개념이면서도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비해 감수성은 왠지 좀더 부드럽고 풍부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일까? 이러한 감수성은 인권과 매우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인권이고, 이것들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는 우선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행동이다. 달리 말하면, 인권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유가 사상가 맹자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일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 그가 당시 권력자들에게 왕도정치 실현을 설파하면서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차마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의 보편성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으니, 왕이 이 마음을 확장하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결국 왕도정치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권력자로 하여금 감수성을 회복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이성적 사회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철학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이라 하는데, 이성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 어찌 철학 뿐이랴. 근대 이후에 철학으로부터 분기한 다른 여타 학문도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성으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분석함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감성이나 감수성이 차지할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출발점이란 우리가 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며, 그 현실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의 답은 무엇인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하는, 그런 출발점이다. 그러한 출발점에는 감수성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영하의 날씨에 어떤 이들은 얇은 옷만을 입고서도 얼굴이 발갛게 상기될 정도로 따뜻하게 사는데, 어떤 이는 이불만큼 두터운 옷을 껴입고서도 길거리에서 떠는 세상. 이런 세상에 어떤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일 뿐이며, 그러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이런 차가운 이성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가슴, 즉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도 현실적인 삶에 찌들어 이미 많이 변색되고 말았다. 때묻은 감수성을 어떻게든 다시금 맑게 회복시켜야 한다. <뚝딱 뚝딱 인권 짓기>(인권운동사랑방 지음, 윤정주 그림, 야간비행 펴냄)는 그러한 감수성 회복을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감수성을 회복시켜주는 책

▲ <뚝딱 뚝딱 인권 짓기>(인권운동사랑방 지음, 윤정주 그림, 야간비행 펴냄) ⓒ프레시안
이 책에서는 어린이들이 접근하기 쉬운 만화라는 형식을 이용한다. 초등학생 민수와 그 주변의 친구들이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인권을 생각하고 알아가게끔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끔찍한' 현실을 어린이 눈높이에서 담담하게 그려내는 것은 이 책이 지닌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실제 현장에서 어린이들과 접하면서 고민한 필자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엿보기 위해서 책의 한 부분을 옮겨보자. 우선 어린이가 자신이 고민을 토로하는 글이 있다. "우리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셔요. 매일 소주 두 병씩 마셔요. 그리고는 막 화내고 엄마랑 싸우고 어떤 때는 엄마랑 나랑 내 동생이랑 때리기도 해요. 술 취하지 않았을 때는 너무너무 좋은 아빠인데 일단 술만 취하고 나면 완전히 미친 괴물이 돼요. 밤이 오면 아빠가 또 때릴까 봐 가슴이 막 뛰면서 무섭고 엄마랑 동생을 때리는 걸 볼 때는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어린이 글에 대한 답변에서는 "(…) 가족들 모두에게는 지금 당장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잘못을 바로잡는 용기가 필요해요. (…) 용기를 갖고 아빠에게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만연해 있으면서도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쉬쉬하는 가정 폭력 문제에 대해서 어린이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이처럼 구체적 답을 제시하는 형식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주고 답란은 빈칸으로 남김으로써 어린이가 스스로 그 답을 작성하도록 하는 형식이 주를 이룬다. 누군가가 강요한 답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 스스로 인권을 생각해보고 정의를 내리도록 도와주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생이 된 조카에게 좋은 책을 소개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인권 교육 서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조카에게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책을 읽어보고서 나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책은 소위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의 인권을 침해했는가를, 그리고 그들에게 모종의 폭력을 가함으로써 상처를 줬는가를 모르고 살아왔음을 일깨워준 것이다. 내가 나와 '다른' 모습, 취향, 위치에 있는 이들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가? 그리고 나이 한두 살 더 많다고, 좀 더 배웠다고 남들에게 저지른 폭력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처럼 이 책은 나에게 무뎌진 내 인권 감수성을 바라보도록 했고, 나 자신을 반성할 기회를 주었다. 일상에서 내 행동 가운데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스스로 반성할 수 있도록 해줬다. '자기 반성'이란 나 자신을 대상화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사회에 대한 것, 즉 '사회 비판'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세우고 살았지만 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 채로 두고 살아오지는 않았던가? 자기 반성 없는 사회 비판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권 의식은 나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주장과 동시에 나와 동등한 존재로서의 타인의 권리에 대한 인정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나 자신이 이러한 의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내 행동이 이러한 원칙에 걸맞은 것인가에 대한 자기 반성이 우선해야 한다. 그리하여 때묻은 내 인권 감수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내 인권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 큰 몫을 했으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인권 감수성을 회복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카에게 권하기 위해서 이 책을 구입했지만, 솔직히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하기가 꺼려진다.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한다는 것은 '삼촌은 네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처럼 살기를 바란단다'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내가 조카에게 자신 있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 먼저 떳떳해야 할 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카에게 이 책을 권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조카에게 권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자기반성을 통해서 인권 감수성을 깨어있게 할 것이며, 분노를 일으키는 현실을 회피하거나 그것에서 도망치지 않고 사회비판을 하겠다는, 나 자신과 내 조카에 대한 약속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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