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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가 갈매기 새끼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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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가 갈매기 새끼를 만났을 때

[철학자의 서재]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이억배 그림, 유왕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프레시안
동화책으로 철학을 말하다

서울 소재의 모대학교에서 <독서와 토론>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다. 그 과목의 취지는 수강생들에게 인문학과 관련된 기본 교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책을 읽고 핵심 요지와 주제를 나름대로 이해한 후, 다른 학생들과 그것에 대해 토론함으로써 그들의 생각과 자기 생각의 차이를 통해서 심화된 이해를 도모한다는 것이 그 과목의 의도였던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스스로 학생들의 눈높이를 적절하게 예측하지 못했고, 학생들이 책을 읽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느꼈다. 가령 한 번은 최인훈의 <광장>이란 작품을 선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요즘 대학생들의 문학적인 감성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짐짓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학생들의 전공 영역이나 학년에 따라서 작품 이해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의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지만,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과 관련하여 동시대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감성적인 공감대의 영역 자체가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고 개탄스러웠다.

각설하고 그 현상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분석될 수 있었겠지만, 당장 시급히 필요했던 것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적절한 토론 주제를 뽑아 낼 수 있는 책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재미있고 쉬우면서도 빨리 읽을 수 있어서 이런 요구에 안성맞춤이었고, 나 역시 오랜만에 가볍게 읽는 독서의 즐거움을 얻은 책이기도 했다.

칠레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가 쓴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이억배 그림, 유왕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는 동화책이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 몇 안 되는 인물들, 동물 주인공들을 통해 의인화된 관계, 재미있는 삽화 등과 같은 요소들은 이 책이 동화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 준다. 그러면서도 이 책이 여느 동화책과는 조금 다르다면, 그것은 글로 쓰인 텍스트를 읽지 않고도,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잘 그려진 삽화들을 이 책이 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 이 책은 동화책이긴 하지만 '철학 동화'라는 장르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동물 주인공들의 진지한 윤리 의식과 세계관, 환경에 대한 성숙한 태도, 세계와 삶을 긍정하는 논리 등은 책을 읽고 난 후, 작가가 말하려는 문제의식과 의도를 선명하게 정리할 수 있게 해 준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이야기 구조 및 인물들의 갈등이나 문제 해결 방식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느덧 동화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넘어서 철학으로 인도된다. 여기서 '철학'이란,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분명치 않지만 뭔가 심오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주제에 관한 문제의식과 가치관을 담고 있으며, 자기주장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의미이다.

하기야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도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빌어 그 동굴 이야기 자체와 같으면서도 다른 어떤 것(이데아)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은 늘 비유와 가까운 관계에 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플라톤의 경우에는, 이데아를 설명할 목적으로 비유를 차용했지만, 세풀베다는 체계적인 철학 학습이 없이도,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서 철학을 전개했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아울러 책에서 소개된 세풀베다의 삶에 관한 짧은 약력은 그의 문제의식이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치열한 삶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세풀베다는 우리에게는 다소 과격하다는 인상을 주는 그린피스 회원으로서 환경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동화 속에서도 그는 환경문제를 주요한 주제 중 하나로서 다루고 있다.

아기 갈매기의 어미가 수컷 고양이라고?

검은 고양이 '소르바스'가 아기 갈매기의 생모 '캥가'와 조우한 곳은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테라스였다. 캥가는 먼 바다에서 동료 갈매기들과 함께 생활하던 중, 운이 나쁘게도 배에서 흘러나온 기름 범벅이 된 진창에 갇혀 생명을 위협받는 곤경에 처한다. 사력을 다해 기름바다에서 탈출한 캥가는 지쳐 쓰러지는 순간 소르바스를 만난다.

타자와의 조우는 언제나 우연이라는 형식을 빌려 시작된다. 캥가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알을 낳고 소르바스에게 세 가지 약속을 들어줄 것을 다짐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알을 먹지 말 것, 새끼를 부화시킬 것, 새끼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것.

이 세 가지 약속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캥가는 이 약속이 지켜지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예감했으면서도,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소르바스에게 보았을 것이다. 소르바스 역시 자신이 떠안은 약속의 이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그저 절망에 빠진 타자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그런데 소르바스가 타자의 고통에 눈감지 않은 것은 자기 자신도 다른 이들에게 외면 받은 타자였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르바스는 홀로 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리라는 걸 알고, 동료 고양이들과 연대하여 약속의 이행을 모색한다.

차별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소르바스 역시 자기의 책임과는 무관하게 차별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색' 고양이로 태어나 사람들에게 분양되기 힘들 것이라고 소르바스의 어미는 걱정했다. 단순한 색의 차이가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될 때 그것은 억압의 기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차이는 언제나 차별을 낳을 수 있지만, 차별이 극복될 때 고유한 차이의 의미가 회복한다.

소르바스는 털 색깔의 단순한 차이 때문에 자신을 차별하는 현실의 폭력에 저항하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고귀한 성품을 얻을 수 있었다.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성품보다 자기 자신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도야한 성품이 더 고귀한 성품이 아닐까? 또 고귀한 성품은 잘 갖추어진 환경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고난을 함께 해결하고 극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성숙한 마음이자 마음의 성장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기 갈매기 아포르뚜나다('행운아'라는 뜻으로 고양이들이 이름을 붙여 주었다.)는 소르바스의 따스한 품속에서 그렇게 태어났다. 수컷 고양이를 어미로 생각하는 아포르뚜나다가 겪게 될 정체성의 위기는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아포르뚜나다는 자기도 그냥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말 할 정도로, 무리 속에서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포르뚜나다의 성장통은, '고양이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키우고 있다'는 불안과 타자를 부정하는 계기를 통해 드러난다. 근원적인 동질성이 깨지는 고통은 불안을 낳고, 흔들린 신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함을 작가는 보여준다. 다름을 느끼는 아포르뚜나다의 불안과 고통 및 그를 통한 성장의 과정이 드디어는 기쁨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공통적인 체험이다. 하지만 아포르뚜나다와 소르바스의 경우, 다름은 같아짐을 통해서 해소될 수 없으며, 오직 다름을 통해서만 조화될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소르바스는 말한다. "네가 우리처럼 되고 싶다는 말이 우리들을 신나게 했어. 그러나 너는 우리와는 달라. 하지만 네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하지." 또 소르바스는 갈매기가 날 수 있다는 것이 고양이들에게는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아포르뚜나다에게 말해 줌으로써, 풀이 죽은 아포르뚜나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소르바스가 생각한 최고의 행복은 아기 갈매기가 자신의 도움으로 하늘을 나는 것이고, 자기와 보냈던 행복한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한 순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 있는 최후의 약속이 있다. 고양이들은 아포르뚜나다에게 하늘을 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고양이들은 아무리 지혜를 모아도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그들은 갈매기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기만 했을 뿐 어떻게 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방법을 알기 위해, 고양이들은 늘 그랬듯이 다시 백과사전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백과사전은 갈매기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설명하고 있지만 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 소르바스는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갈매기를 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고양이들을 설득한다.

여기서 선택된 사람은 다름 아닌 시인이다. 지적인 이해력의 한계에 봉착할 때,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적인 상상력의 힘이 아닐까? 시적인 상상력은 백과사전이 알려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앎과 다양한 세계의 이해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실 시인은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저 하늘의 별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일지도 모른다. 시인과 소르바스, 아포르뚜나다, 이 세 인물은 서로의 노력과 협력으로 마지막 과제를 수행한다. 성당 꼭대기에서 불안에 떠는 아포르뚜나다를 날게 한 것은 소르바스의 애정 어린 격려에 고무된 아포르뚜나다 자신의 의지와 용기였다. "넌 날 수 있어. 저 넓은 창공이 네 세상이 될 거야."

우리 곁의 아포르뚜나다 그리고 우리 안의 소르바스

저자 세풀베다는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해서는 환경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의무라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동화에 나타난 동물 캐릭터들은 동화적인 캐릭터인 동시에 현실적인 사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생카가 희생당한 것은 인간의 환경오염이 빚은 재앙 때문이지만, 생카는 오히려 인간을 위한 또 한 번의 기회로 아포르뚜나다를 남겨 놓았다. 즉 인간이 아포르뚜나다를 생존하게 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을 위해서도 행운이며, 또 그런 기회를 아직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포르뚜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계속 생존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지구라는 집의 다른 거주민들과 생태학적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 생태학적 관계망의 한정된 범위를 넘어서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동물 캐릭터들의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소르바스와 아포르뚜나다는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보편적인 윤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적인 교감으로서 소통은 지배와 예속의 위계적인 관계를 떠나서, 쌍방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에서 동류의식과 공감, 자신과 대등한 존재라는 인정 관계, 연대의식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차이와 차별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우리 곁에는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타자의 인정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아포르뚜나다가 있다. 정규직과 비규정규직의 양극화된 노동현실, 이주 노동자들, 다국적 가정, 성 소수자들이 그들이다.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차별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조화를 모색하려는 자세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숭고한 소르바스의 마음씨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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