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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말라"

[유럽에서의 사색] 용산의 억울한 죽음들을 애도하며

무슨 장렬한 영화 한편을 보는 것보다 더 기막힌 일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 작년 1월 숭례문이 불이 탔을 때, '이거 국운이 쇠하는 징후가 아닌가' 이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다시 솟아난다. 안타까움을 넘어 불길하기까지 하다.

숭례문이 불에 타 하릴없이 스러지는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그 자리 그 잔해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이번에는 힘없는 민초들이 폭도로 몰려 불에 타 죽었다. 그냥 자연 발생한 화재가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양보하라는 명령에 대해 적법한 보상을 해 달라고 외쳤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없었던 공권력의 주먹이 부른 타살이었다.

현재 언론과 당국은 온통 '법적인 책임소재'를 찾는 일에 혈안이다. 누가 먼저 불을 지폈느니, 공권력의 투입이 적법했느니…. 그간 지겹도록 경험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정치경제적인 스캔들이나 인재를 동반한 재해, 그 밖에 사회적 위기를 초래한 사건들의 원인은 법적인 책임 소재를 찾아내는 것에 궁극의 해답이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이번 참사가 한국 사회 전반, 더 구체적으로는 도시 개발 행정에 있어서 민주적 의사 결정과 주민 참여를 중시하는 제도와 문화의 결여가 그 핵심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며, 이번 사태에 대한 해결책도 주민 참여를 보장하는 시정(市政)의 제도적 기제를 두텁게 마련하는 것이라고 주장코자 한다.

도시 개발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오늘날 현대 도시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투자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관광 자원이 되며 더불어 사회간접자본으로서 요긴한 기능을 하는가? 그 가치는 당연히 추구되어야 한다. 부인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개발자들이 어떤 철학을 갖고 개발의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의 손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상할 것인가에 대한 세심한 논의와 배려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과정에 대한 꼼꼼한 셈법이 없이 추진되는 개발 행정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삶의 비극을 안기며 많은 비용과 희생을 동반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가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건 바로 그러한 총체적 셈법을 위한 제도적 기제들이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란 진화할수록 필연적으로 복잡해지고 분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덩치가 커지는 현대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의 문제는 바로 거버먼트(government)니 거버넌스(governance)니 하는 사고의 핵심적인 문제제기이다. 여기에서 바로 공익(共益)은 그러한 행위 수단을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가치이자, 그러한 행위 선택이 궁극의 목표로 삼는 가치이기도 하다.

사회학자들은 공익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socially constructed)'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 운영의 ABC는 공익을 국가가 독점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적 가치 실현이라고 하는 이상적 목표에 부합할 뿐 아니라, 행정 공학적으로도 궁극적으로 더욱 효율성을 높이는 수단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공익을 정의하고 실현하는 주체는 오로지 국가'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왔다. 박정희 시대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는 그야말로 절대이성을 넘어서 초이성적 존재로 군림해 왔다. 국가가 하기로 결정한 일은 그 누구도 항거하지 못하는 시대를 거의 사십년 가까이 보내 왔다.

지난 10년은 잠시 그러한 초이성적 권위에 대한 성찰과 견제가 발흥을 했던 시기였다. 잠시의 백일몽과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다시 이전의 초이성적 국가의 시대로 회귀하는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바로 그러한 흐름과 직결되어 있다.

국가가 공익을 독점한다는 사고에 기반을 둔 군부의 전제적 통치는 한국 현대사에 수많은 사회적 비극들을 양산해 왔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묵당해야 했고, 도시에서는 빈민들의 생존권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했다. 심지어 군인들이 그들의 존립 기반인 국민을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일도 국가가 추구하는 공익의 일환이라는 식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국가가 공익을 독점하면서 생기는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왜곡을 수정하려는 수많은 시도들도 자발적으로 분출되어 왔다. 1970년 전태일과 같은 인물은 공익을 사회적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를 분신이라는 상징적 수단을 통해 표시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는 산화한 그의 행위 선택은 왜곡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를 담은 이타적 자살 행위였다. 달리 말하면, 법적 수단이 진정한 공익을 위한 방향으로 이용되도록 행정 행위를 시정하라는, 시스템 수정을 촉구하는, 구조 개혁적 메시지를 담지한 것이었다.

1980년 광주의 도청을 사수하며 산화했던 윤상원과 그의 시민군 동료들도 공권력의 이용 방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발적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질문을 던진 또 다른 사례였다. 그들의 죽음은 계엄령이라는 일상화된 전시(戰時)적 상황이 결국은 국민의 안위가 아니라 부도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행사한 국가권력에 의해 반(反)공익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서울 시내 한 복판의 한 건물 옥상에서 산화한 철거민들의 저항과 죽음은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그들이 전태일나 윤상원과 같은 적극적인 사회적 소통을 지향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못할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번에 유명을 달리한 이들을 '열사'라고 부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무어라 명명하든 그들의 죽음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사회적 메시지에 대한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명약관화한 것은 그것에 대한 해석을 "가슴 아프고 유감스러운 일(이명박)"이라느니, "과격 시위 악순환 끊는 계기로 삼자(김은혜)"는 식으로 하고 마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누가 파면이 되고 누가 해임이 되고 얼마의 형을 받고 하는 식의 결정 역시–분명 중요하지만–가장 핵심은 아니다.

필자는 용산에서 산화한 철거민들이 한국 사회에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공익을 독점하는 국가'의 신화를 과감히 버리라는 것에 있다고 본다. 도시 개발행정과 관련해서 현존하는 제도적 기제들과 그것을 집행하는 관행상의 치명적인 허점과 공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고 전면적으로 재성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추진자가 아무리 원대한 가치 창출의 꿈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개발 프로그램의 실현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고 배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스터플랜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선진국과 중진국 그리고 후진국의 차이는 바로 '무능한 리더십-권위적 리더십-민주적 리더십'의 세 가지 이념형이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행정이든 경영이든 한 리더의 불도저식 추진력은 비전도 없고 추진력도 없는 무능한 리더십 내지는 리더십의 부재보다는 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권위적 리더십은 민주적 리더십, 비권위적 리더십에 의해 비해서는 질이 낮은 부끄러운 모습이다.

현 정부는 안타깝게도 선진국을 외치고 있지만 채택하고 있는 방법론은 여전히 선진국형 방법론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사건을 만들었던 핵심 원인이었고, 그 이후의 해석 과정과 대처 과정에서 보여주는 모습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후진적 방법론을 통해 선진화를 이루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가가 국민의 생존권을 우선시하고 그것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민주적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면, 그래서 철거민들이 그러한 제도의 혜택을 받아 자신들의 문제를 '제도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면, 용산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법 시위의 근절? 물론 되어야 한다. 없는 이들의 생존을 위한 ABC가 갖추어지고 그들이 빼앗길 때, 하다못해 '찍소리'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불법시위를 하라고 시너와 짱돌을 한 다발 안겨줘도 무용지물일 것이다.

도시 개발 행정의 민주적 거버넌스의 심화를 실현하는 제도적 정비와 강화가 절실하다. 피해자들이 개발 과정에서 요구하는 생존권 보장의 요구를 존중하는 방식, 그에 대한 비용을 창의적으로 마련하고 실현해내도록 공익 실현의 방법론을 선진적으로 재구축하는 방식을 마련하는 일이야말로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과제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선진화의 핵심 내용이어야 한다.

▲ 20일 용산 참사가 일어난 곳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이들이 산화한 자리에는 이제 곧 높은 빌딩이 들어설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것인가? ⓒ프레시안

철거민들이 산화한 자리에 이제 곧 높은 빌딩이 들어설 것이다. 그 자리에 들어설 빌딩을 떠올리니 문득 파라오의 압제 하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노예들의 피와 절규가 선연한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오버랩된다. 용산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경찰 특공대의 모습을 지켜보자니, 30년 전 광주에서 도청을 사수하기 위해 시민적 용기를 보였던 이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던 공수부대가 되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그들 모두 시민적, 민주적, 소통적 공익의 실현을 거부하려는 정신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매일반이지 않나.

마지막으로 우리를 더욱 화나게 하다 못 해 슬프게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러한 모든 '제도적 인프라'가 결여된 상태에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벌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방어적 폭력'을 아무런 맥락적 성찰 없이, 폭도로 매도하는 '아메바적인 언론 폭력'이 바로 그것이다.

30년 전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았던 그 언론사의 그 데스크의 후예들은 21세기 서울 한 가운데에서 불에 타 죽어야 했던 철거민들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적 폭력'을 함부로 휘두른다. 국제사회에 하소연하기조차 부끄러운, 서글픈 코미디보다도 더 서글픈 우리네 자화상의 가장 일그러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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