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폭력을 다시 생각한다

[손호철 칼럼] MB악법과 속도전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문제

90년대 말, 한총련 지도부가 경찰 프락치로 의심되는 젊은 청년을 잡아서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가해 죽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적과 싸우기 위해 적을 닮아간,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싸우면서 스스로 이근안이 되어버린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사회 운동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대항폭력(레닌식의 폭력혁명)도, 비폭력(간디식)도 아니고, 모든 폭력에 발본적으로 반대하고 투쟁하는 반폭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노예제에 저항했던 스파르타쿠스의 난으로부터 만적의 난, 안중근 열사의 저격, 5.18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사회적 약자들의 폭력을 사용한 저항들은 잘못된 것이고 포기해야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 한 채 문제를 덮어두어 왔다.

그런데 최근의 정세는 역사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국내적으로는 MB악법 저지과정에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행사한 '폭력'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국회 폭력방지 특별법이 그러하다. 국제적으로는 나치의 피해자에서 이제 사실상 '중동의 나치'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가자지역 공격이 그러하다.

사실 한나라당의 국회폭력방지 특별법 추진은 폭력을 다시 생각해보고 말고 할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냥 그간의 한나라당의 행태만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히 대응하고도 남는다. 야당시절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행사한 폭력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이번 사태의 빌미가 된 외교통상위원회의 한미 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상정만 해도 그렇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외통위 회의실을 안에서 걸어 잠그면서 민주당의 최규식 의원이 갇혔고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최 의원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상당기간 감금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최근 폭력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최 의원이 이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을 불법감금죄로 검찰에 고발을 한 상태이다. 한마디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폭력 비판은 "내가 하면 로맨스(민주투쟁), 남이 하면 스캔들(민주주의에 대한 해머질)"라는 이중잣대에 다름 아니다.
▲ 지난해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실 앞에서 한미 FTA 비준안 상정에 반대하는 강기정.백원우 의원 등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출입을 저지당하자 몸싸움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한나라당의 코미디 같은 행태를 넘어서 이 법안이 장기적인으로 갖는 함의 등을 고려할 때 폭력이라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유용한 것이 세계적인 폭력연구, 평화연구의 권위자인 유한 갈퉁의 주장이다. 그는 평화란 단순히 해머질이나 로켓포 공격과 같은 직접적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흔히 사람들이 폭력하면 떠올리는 직접적 폭력이상의 심각한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이라는 폭력은 노예제라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한 대항폭력이었을 뿐이며 안중근 열사의 저격이라는 폭력역시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한 대항폭력이었다. 결국 진정한 평화란 직접적 폭력만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번 입법전쟁 과정에서 생겨난 폭력문제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해머질 등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행사한 폭력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구조적인 폭력이다. 한나라당이 강행처리하려고 했던 MB 악법의 내용 속에 내장되어 있는 심각한 구조적 폭력들, 나아가 이 같은 법안을 제대로 된 심의과정조차 거치지 않고 날치기 통과시키려고 했던 속도전, 돌격전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한 채 직접적인 폭력만을 문제 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일본제국주의라는 구조적 폭력을 보지 못 한 채 안중근의 저격을 살인이라는 폭력으로 몰고 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실 최근 한나라당의 국회 폭력방지 특별법에 대항해 민주당이 주장하고 있는 필리버스터도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소수파가 의회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합법적인 수단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도록 제도화한 이 제도는 소수파가 해머질과 같은 직접적인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수의 횡포라는 구조적 폭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로 많은 선진국들이 이를 채택하고 있다. 우리도 이 같은 제도를 빨리 도입하는 것이 다수의 횡포라는 구조적 폭력과 이를 막기 위한 대항폭력이라는 직접적 폭력을 모두 제재할 수 있는 길이다.

가자사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먼저 자신들에 대해 로켓 공격을 했으므로 자신들의 가자지구 공격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바마까지 "만일 누군가 나의 두 딸이 잠자고 있는 내 집에 로켓탄을 쐈다면 나는 그같은 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모든 방안을 추구했을 것이고 이스라엘도 같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고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오바마는 하마스의 로켓탄 공격이라는 직접적인 폭력만을 보고 있을 뿐 그 뒤에 은폐되어 있는 구조적 폭력, 즉 이스라엘이 그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저질러온 폭력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 비판적 논평자가 한 지적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오바마가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 집이 전에 그곳에 평화롭게 살고 있던 집주인을 갑자기 쫓아내고 빼앗은 것으로 옛 주인은 두 딸과 함께 추위에 떨며 개집에서 살아야 해 집을 되찾기 위해 로켓탄을 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로켓포라는 폭력만이 잘못된 것인가?

문득 인종차별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고발해온 진보적인 흑인 레게가수 피터 토시의 노래가 떠오른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직접적 폭력이 없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이 해결된 정의, 즉 진정한 평화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