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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잊지 말아요, 작은 민들레처럼"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나윤선과 휘루 (下)

음악계에서도 해마다 연말이면 결산을 한다. 정성어린 노고가 담긴 수백 장의 음반들 사이에서 수십 장만 가려내는 작업에는 책임감 있는 노동과 뻔뻔한 즐거움이 함께 따른다. 실력파 음악인들의 작품 발표주기가 겹친 2007년에 수작들이 유난히 많았다면, 어느 정도 공백이 발생한 2008년에는 수위를 차지할 앨범 상당수가 데뷔작일 정도로 신인들이 부각되는 양상이다. 음악의 또 다른 변들을 제공한 '로로스'와 '비둘기우유'가 있는가 하면, 아직 검증을 거치지 전이지만 한국어 가사의 강점과 유머러스하고 키치한 분방함을 포착해낸 '장기하와 얼굴들'은 지상파 코미디 프로그램이 패러디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자칭인지 아니면 본의 아닌 악칭인지 숙고해봐야 할 말이지만 여성 싱어 송라이터들 역시 주목받았다. 남녀의 다름은 순전히 '길러짐'이라는 주장 대신 다름의 인정이 자연스러워진 단계에 왔고, 특유의 음악적 어법으로 자기세계를 만들어가는 이들 역시 여럿 등장했다. 오래 전에 밴드가 중심이던 때에는 하나같이 건반이나 베이스기타만 맡다가 일렉트로닉·라운지·시부야계로 불리는 스타일이 유입되면서 여성보컬 붐이 일기도 했다.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래한 듯한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많이 녹음한다) 통속에 투항하여 퇴행을 반복하는 소녀감성의 '밴드-가요'도 나타났다. 분명 탈색과 순수는 다르다.

진부함과 실험이 병존하는 어색한 동거는 성공과 자부심이라는 두 가지 욕망실현의 충돌을 드러낸다. 심지어 외모를 앞세운 마케팅까지 등장했다. 물론 '얼굴들'의 기대효과는 무시할 수 없고, 모든 걸 압도하던 방송영향력이 약화된 대신 페스티벌과 인터넷, 자생적인 인디 씬의 힘이 커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목집중이 유용하기는 해도 본질적 가치를 지연시킨다는 우려 역시 설득력이 있다. 비평 역시 기획가수들에 대해 말할 때 실연객체에 대한 심정과 기획주체에 대한 비판을 뒤섞고, 복합적인 문화상품에 대한 전략분석으로 치우치면 모니터링에 머물고 만다. 이렇게 밝은 조명을 들여놓으면 없었던 그늘이 만들어진다.

기획물 또는 규격품의 성공확률이 높지만 자연스러운 산물과 시대의 만남에는 비하지 못한다. 이 때 음악이 진화한다고 해도 무리는 있을지언정 물의를 사지는 않을 것이다. 배당금은 확률에 반비례하고, 공연장에서도 준비된 괴성과 자연스러운 환호의 가치는 다르다. 그런데 시장적 가치를 따지는 박약함이 발명해낸 대중성이라는 개념이 창작을 압박하니 문제이다. 지문이 닳도록 강조해야할 부분이다. 언제고 밟아가야 할 과정 틈새에 다행히 음악사조에 긍정적인 붐이 형성되면 젊고 유능한 음악인들이 몰리고, 이어 좋은 작품들이 양산된다. 연말이 다가올 때까지 좀 허전하게 관망했던 올해에도 저울은 막바지에 기울어졌다.

2008 또 하나의 발견, 휘루

▲ 어떤 앨범이 좋은가 하는 것 역시 노래 하나가 마지막 추의 역할을 하곤 한다. 이 '추 이야기'의 주인공인 [민들레 코러스]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부터 관심구걸과는 거리를 둔다. ⓒ프레시안
작은 추 하나가 얹혀진 것이다. 그것이 유난히 무거워서라기보다 원래 저울은 그런 식으로 기울어진다. 공교롭게도 11월과 12월에 수작과 기대작이 줄을 잇고 있어 가히 '겨울 대공습'이라 해도 될 수준이다. 어떤 앨범이 좋은가 하는 것 역시 노래 하나가 마지막 추의 역할을 하곤 한다. 이 '추 이야기'의 주인공인 [민들레 코러스]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부터 관심구걸과는 거리를 둔다. 성공 따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통과 의미 이전에 창작행위에 우선 즐거움이 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무엇도 그 고통과 기쁨에 비할 수 없다. 무엇을 좋아하는 이유를 해석하려들지만, 창작은 그 자체로 원초적이고 완성적인 삶의 조건이다.

국악을 전공한 휘루는 인디 씬에 들어와 10년 동안 해금 연주자로, 작곡가로, '3호선버터플라이'의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영화 <…ing>의 삽입곡 <그녀에게>를 작곡하여 불렀고, '크라잉넛'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했으며, 심수봉과 '크라잉넛'이 <물밑의 속삭임>에서 만나도록 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주먹'을 만들고 푸는 손가락들 중 하나는 아니었다. 수명이 연장되기도 했지만 사회진출을 준비하고 자리를 잡는 소요기간이 길어진 탓인지 어느 분야건 일가를 이루는 데에도 점점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채소를 삭힌다고 다 김치가 되거나 물고기를 삭힌다고 홍어처럼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90년대에 머물러있는 음악인들에게 길은 더 좁아졌다. 어떤 선에 멈춰 몰두하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게으름의 변명이 되어선 곤란하게 되었다. 휘루 역시 나름의 성장통기를 거치며 마음의 키를 키웠을 텐데, 조급하게 잰걸음을 재촉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길을 낸다. 인디는 징검다리가 아님에도 브랜드가치가 낮다고 판단해 함께 엮이길 싫어하는 음악인들까지 있고, 여기에도 회사의 계산된 압박은 존재한다. 그런데 휘루는 홀로 '소공녀뮤직'을 설립하고 작은 녹음공간들에서 음반을 만든다. 여기에 떨림이 숨어있다.

'콩나물시루'를 아는 세대가 보기에 요즘 교실은 휑하다 싶을 정도로 넓어졌지만 아이들이 더 넉넉해지진 않았다. 지혜교육이 아니라 지식·도태교육 속에서 성적 때문에 몸을 던져버리는, 훗날 황당한 사회상으로 바라볼지도 모를 비극이 새삼스럽지 않은 곳을 떠나고 싶다고들 한다. 또 문화예술인으로 '한국적 현실'에 가뜩이나 상심해 있었던 음악인은 근래에 들어 분노조차 상실케 하는 절망과 무력감에 여길 떠나고 싶어졌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벗어남이 아니라 도망침이고 놓아버림이 아니라 잃음이 아닐까. 남들도 그런 식이었다면 그들이 찾아갈 곳조차 없었다. 팍팍했던 동네를 체험한 서른 몇의 여성이 스스로 '음반 내줄 곳'을 마련하고 낳은 [민들레 코러스]에서 '놓인 곳에서 가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전통악기와 대중음악의 접목은 오래되었고, 일렉트로닉과 힙합 등에서 활발하게 시도되고 있다. 휘루 역시 해금을 수놓듯 박음질한다. 또 프렛리스 베이스가, 트럼펫이, 그리고 느와르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송곳>에는 트롬본이 함께한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각들이 자연스레 녹아드는 가운데 <행글라이더 요정들>의 침울함에서 <그녀에게>의 사뿐거림까지 다양한 무드가 공존한다. 장르적으로도 <오늘밤>의 일렉트로닉과 <바람 부는 날>의 포크를 아우르고 있다. 보틀넥 주법이 숙어처럼 파형을 그리는 <Dark Sun>을 듣다 고경천의 타건이 귓바퀴를 타고 미끄러질 즈음 볼륨을 높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정석에 충실하다보면 평면적이 되고 실험에 집중하다가는 난장이 장난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다행히 미러볼처럼 다채로운 악기와 리듬의 운용이 번잡하게 얽히지 않는다. 너무 공을 들인 그림에는 잔선이 많아지는데, 곡마다 주안점을 달리함으로써 말끔한 결과물이 되었다. 오래된 감성이 새로운 음악적 기법들에 실리고, 장르적인 기법과 구성적인 양식 저변에 한 방향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극단까지 가본 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나 싶은 휘루는 나윤선와 반대로 보편적 기법들로 특수한 감성을 담아낸다. 그래서 휘루가 실험이라는 행위에 몰두했다면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일관성은 정서와 정직함에서 나온다. 시대마다 다른 코러스 스타일이 있어서 화음을 넣는 중창이 있었는가하면 사뿐한 장식 스타일도 있었다. 방법 자체가 정서를 담아내는데 [민들레 코러스]의 적적한 코러스에도 귀기울일만하다. 특히 어눌한 노래가 이러한 분위기를 담보한다. 목소리는 성대와 입술이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해주고 억양은 기분은 물론 의지와 의도까지 내비친다고 한다. 내벽의 색을 어떻게 칠하는가에 따라 같은 불빛도 달라지고 조명이 기분까지 좌우하기 마련, 이 음반에선 휘루의 가창이 그 역할을 한다.

특유의 경제적 발성법을 터득한 말꾼과 노래꾼과 달리 형편없는 성량과 심약한 발성으로 노래하는 휘루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한 실 같다. 전문 싱어가 되지 않은 건 잘한 일이고 다행이랄까. 그런데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흩어져버릴 듯한 노래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작곡 자체가 좋고, 과잉치장보다 정직함이 오래 울려서이며, [민들레 코러스]를 관류하는 정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미래였다 예외 없이 이내 과거가 될 현재에 대한 상념과 사라진 건물과 함께 했던 재현 불가능해진 행위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 자리는 잊혀짐이 채운다. 그렇게 손으로 바람을 담거나 햇살을 모아 쥘 수 없음을 알면서도 <Dark Sun>과 <아침에 너를>은 부서지듯 사라질 순간들을 기억해두려 애쓴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목숨이라도 잃는 날이면 "추락사고로 30분 동안 운행이 지연되었습니다"는 뉴스와 함께 그의 인생은 30분만큼으로 축약된다. 살아있으면서 항상 죽고 있기에 순간에 연연함은 사실의 인식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기어코, 그리고 갑자기 끝나버리기에 생은 아름답고 혐오스러우며 애달프고 절절하다. 휘루는 그 아쉬움을 이렇게 저렇게 둘러댄다. 인생이 짧긴 해도 생각보단 길어서 굳은살을 얻는 덕에 느긋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러면서 저마다 나이만큼의 현을 가지게 된다. [민들레 코러스]는 그 몇 가닥의 현이 울리는 차분한 비망록(메모)으로 읽힌다. 추상적인 생각과 음악적 욕구가 제시한 문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이한 답안지라고 하면 더 적절하겠다.

놓인 곳에서 스스로 가꾸다

▲ 멀리 있던 큼지막한 것들을 수축시키고 농밀하게 응축한 나윤선의 [Voyage]가 대중음악의 시침(時針)이라면, 휘루의 [민들레 코러스]는 종자보관소인 인디의 단면을 가리키는 분침(分針)이다. ⓒwhiru.com

진지함에 대한 거부와 파편적인 도시생활을 배경으로 한 예쁘장한 개인주의가 요즘말로 대세이긴 하다. 아마추어 캠퍼스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풋풋하고 '잘 만든' 연애노래들의 인기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회상이 음악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 앨범 역시 퇴행적인 감상과잉의 산물인가 싶겠지만 '미스티블루' '어른아이' '벨에포크' '디어클라우드' 등과는 다른 선상에 있다. 흙길 많던 때에 발을 낚아채던 돌부리, 혹은 주마등과 두꺼비집 같은 것들은 체험되지 못한 채 말해지고, 사연과 공기를 간직한 건축물과 골목이 유산이 되지 못한 채 해체되는 시절, 생명과 탄생보다 좀 더 낮은 의미의 꽃 '민들레' 코러스는 소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을 격이 있는 선율에 실어 보내고 있다. "잊지 말아요, 작은 민들레처럼."

이 앨범 전반부의 설렘은 잠시 [김현철 1집](1989)을 떠올리다가 점차 흐를수록 이지형의 [Radio Dayz](2006)와 비교된다. 이지형의 <Baby Baby>처럼 드럼으로 시작하는 <아침에 너를>은 6분 넘게 계속되는 동안에도 점점 팔이 무거워지거나 하지 않는다. '크라잉넛'의 이상면은 펑크로커이기보다는 기타연주자이고 싶은 욕심을 멜로디와 리프로 콸콸 쏟아낸다. 긴 곡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지만, 틀과 힘을 드러내는 남성형의 진행과 숫기 강한 즉흥성이 70, 80년대 가요풍의 여성보컬과 독특하게 어우러진다. 복고는 색다르게 세련된 것일 때 유효하고 매력적이다. 마지막 추에 대한 다른 답은 이 마지막 트랙에 있다.

얼마 전 만난 공연기획사의 대표는 하는 일이 광산채굴 같다며 성공이 아니라 내면을 생각해야 될 때라고 했다. 신기루처럼 보인다고 실재하지 않는데도 검은 연료와 바코드의 시대에는 거역할 수 없다며-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며 날것 대신 껍데기와 규모에 집착하고 빚으로 소비하고 있다. 속도를 유지해야하는 도로에선 다친 동물을 도와주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낮에 길을 잃었다. 빠르게 와 빠르게 사라지는 물살에 휩쓸린 늙고 병든 체제가 보기에 느리고 깊은 삶이 앞서가는 것일 터, 능동적 느림이 언젠간 멋지다는 소리를 듣게 되지 않을까. 너무 두터워져 잇닿아버린 담 아래 심어놓은 식물처럼 천천히 오래 지속되는 음악은 그래서 귀하다. 그리고 소리와 음악은 쌓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토양에 자리 잡아 어떻게 뿌리내리는가에 따라 다르게 자란다. 멀리 있던 큼지막한 것들을 수축시키고 농밀하게 응축한 나윤선의 [Voyage]가 대중음악의 시침(時針)이라면, 휘루의 [민들레 코러스]는 종자보관소인 인디의 단면을 가리키는 분침(分針)이다. 합침과 다른 겹침, 집중이 아닌 연결이 화두인 때에 막힌 담 아래 마당에서 각각 만남과 가꿈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가능성의 다른 이름은 불안이지만, 불안은 힘이기도 하다. 그 잠재성을 확인하는 데에 시간을 좀 들여도 괜찮을 듯싶다. 지난 사연은 잊혀지고 나무가 나이테를 늘이는 동안 세상이 옷을 벗고 사람은 두툼한 옷을 여미는 계절, 지문 결 따라 퍼진 흙 알갱이를 비벼볼 수 있을 듯한 두 장의 음반이 여리거나 혹은 어린 마음과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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