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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의 시대…진실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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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의 시대…진실을 놓치지 않는 방법은?"

[철학자의 서재]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매체와 미학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소개되어서 사람들에게 다시 주목을 받게 된 존 케이지의 그 유명한 음악 '4분 33초'는 피아니스트가 아무런 연주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존 케이지가 피아니스트에게 준 악보에는 단 하나의 음표도 없었기 때문이며, 그 악보에는 그저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으라는 명령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피아니스트는 당연히 아무런 연주도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이 해프닝을 스캔들로 받아들일 테지만, 이 해프닝은 실로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 사람들에게 별 주목을 받지 않은 의미 중 하나는 악보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존 케이지는 이른 바 '뚜껑을 열고 닫으라'는 식의 수행 악보를 사용하여, 이전에 음표로 이루어진 악보의 의미를 희화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음악 관행 자체를 비웃고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음악가들은 오선지에 기록될 수 있는 음만을 음악적인 음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평면적인 오선지에 기록할 수 있는 보표, 즉 문자만이 의미있는 소리라는 구텐베르그적 패러다임에 종속된 것이다. 전통적인 음악은 오로지 기록될 수 있는 음만을 음악으로 본 것이다. 존 케이지의 해프닝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 음악의 관행을 꼬집는 것이었으며, 전통적인 악보를 파괴함으로써 그 음악적 관행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존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준 영감은 바로 이것이다. 원래 음악을 공부하였던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이러한 발상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가 존 케이지에게서 본 것은 전혀 악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뒤집어 보자면 원래 우리가 듣고 있는 일상적인 소리들은 악보와는 전혀 무관한 소리들이라는 사실이다. 일상은 우리가 전혀 결합이 안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기이한 소리들의 결합으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전철이 지나갈 때 흔들리는 소리와 구세군의 종소리는 악보상으로는 전혀 화음이 불가능하지만 분명 결합하여 하나의 공명을 형성한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와 같은 매체가 자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버린다.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정원에 마치 열매가 열린 것처럼 텔레비전 수상기를 배치한다. 이러한 배치는 말 그대로 부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러한 부자연스러움은 우리의 전통적인 관행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매체는 자연과 어울리지 않으며, 인위적인 것이며,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전통적인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남준이 보기에 매체는 오히려 일상과 가까우며 인위적인 것이 아닌 또 다른 자연이며, 전통적인 관행 때문에 묻혀 있던 일상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꺼내는 것이다. 그는 매체를 통해서 오히려 전통적인 편견과 이데올로기에 갇혔던 감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매체미학이 궁금하다면?

▲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심혜련 지음, 살림 펴냄) ⓒ프레시안
매체미학이 궁금하다면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심혜련 지음, 살림 펴냄) 필독을 추천한다. 이 책은 매체미학에 관한 국내 최초의 포괄적인 연구서이자 소개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장은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라고 명명되는 오늘날 매체예술은 기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예술과 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적인 주장을 필자는 영화로부터 미학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말하자면 매체미학에 관한 이론으로부터 구체적인 담론에 이르기까지 사이버스페이스(디지털) 시대의 미학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론가들의 면면만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독일에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력에 맞게 벤야민의 이론으로부터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뿐만 아니라 비릴리오나 빌렘 플루서에 이르기까지 매체미학과 관련한 주요 사상가들의 핵심적인 사상을 이 책에서 아우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사상은 매체의 문제가 부각된 이후 새롭게 조명되거나 다른 각도에서 연구되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이다. 또한 매체미학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릴리오나 플루서의 이론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매체예술에 관해서는 올리버 그라우의 <가상현실 예술>을 빼놓을 수 없는데,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이들의 핵심적인 사상을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녹여서 소개하고 있다. 그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매체미학의 주요 담론들을 섭렵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오늘날 매체예술의 등장과 더불어 예술담론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부각된 개념들이나 쟁점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동영상의 등장과 그에 따른 인간의 새로운 지각방식, 영화 이미지의 수용 방식, 디지털 이미지의 수용 방식 등 전통적인 예술 이미지와 매체예술 이미지의 수용 방식에 대한 차이를 상이한 패러다임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가운데서도 필자는 벤야민의 통찰을 수용하여 오늘날 매체예술 이미지에 대한 관객의 지각을 '분산적 지각'이라는 말로 종합한다. 필자의 이러한 제안은 오늘날 매체미학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유효한 가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한 매체예술과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논의되는 '상호작용'의 문제도 필자는 결코 놓치지 않고 있다. 상호작용의 문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전제하는 것으로 예술을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매체의 본래적인 기능이 두(혹은 셋 이상의) 대화자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보자면, 매체예술은 예술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과 역할에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목은 상호작용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이 책에서 필자는 매체예술이 지향하는 상호작용의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지 보다 구체적이고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매체미학은 미학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필자의 주장은 이러하다. 디지털 시대의 매체예술 혹은 매체미학이 완전히 새로운 미학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독일어의 미학(Ästhetik)은 희랍어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스테시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감성, 감응(Empfindung), 지각(Wahrnemung)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로 하면, 일종의 감성적 지각이자 감응적 지각이다. 따라서 본래 뜻에 적합하게 Ästhetik을 번역하면, 미학(美學)이 아니라 감성학(感性學)이 되어야 한다."

미학을 최초로 학문화 하였던 18세기 독일 철학자 바움가르텐(Baumgarten)은 미학을 철학과 구분하면서, 철학이 개념의 학문이라면 미학은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그가 최초로 미학이라는 학문을 정립할 때에 미학이라는 개념은 희랍어의 '아이스테시스'라는 말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은 독일관념론을 거치면서 점차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별도의 체계를 지닌 학문으로 독립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적이 감성과 독립되어 미학이 별도의 관념적인 영역으로 고립되는 과정은 근대의 예술 작품이 일상현실로부터 독립하여 엄격한 체계적인 영역으로 굳어지는 과정과 같은 궤도를 달리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매체미학은 일상적인 경험과 유리된 미학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적인 감성적 경험을 회복시키는 의미를 지닌다는 노베르트 볼츠(Norbert Bolz)의 주장을 필자는 매우 강력하게 수용하고 있다. 볼츠의 이러한 주장은 볼프강 벨슈(Wolfgang Welsch)나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와 같은 현재 독일 미학의 담론을 주도하는 미학이론가들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매체예술의 작품들을 거론하면서 예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예증들도 이 책을 보는 또 다른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디지털 매체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만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 <올드보이>를 분석하는 필자의 글에서 나타나듯이 오늘날의 발달된 매체는 푸코가 말하던 파놉티콘의 권력 감시망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한 우려를 완전히 도외시한 채 매체에 대한 낙관론만을 전개하는 것은 균형감을 상실한 논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매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에 의존하면서도 결코 매체가 줄 수 있는 위험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매체의 위력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디지털 매체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러다이트 운동처럼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매체미학이 필요한 것은 매체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매체예술로부터 발견하고 이러한 발견을 바탕으로 매체를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교훈을 매우 잘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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