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J가 입을 열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를 '의도적으로' 파탄내고 있다. 민주당-민노당-시민사회세력이 반이명박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어법의 격렬함이나 내용의 민감성이 아무리 '작심하고' 한 발언이라 하나 전직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이다. 예상대로 한나라당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지만 사실 정작 급하게 된 건 민주당이다. 민주당 지도부를 불러다 해도 뭣한 얘기를 민노당 대표에게 퍼부은 DJ의 심경이 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강한 질책'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정세균 대표가 청와대 여·야3당 대표 회동에 불참키로 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민주당, 민노당, 창조한국당이 '남북관계 위기타개를 위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반이명박 연대를 가시화 한 것도 그렇고, 민주당내외의 개혁적 인사들을 망라한 민주연대와 개혁성향의원들의 모임인 '국민과 함께하는 9인 모임'이 정세균 대표 체제에 대한 비판과 민주당 개혁성 강화를 기치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모두 DJ의 훈수와 연동해서 해석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2.
'한국의 이념 논쟁 - 한국의 보수를 말한다' 토론회에서는 "뉴라이트는 죽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뉴라이트 일부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운동이 지나치게 정치화 권력화 됐다.
뉴라이트는 자유주의를 한국 보수이념의 독자적 범주로 살려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장기적으로 지속될만한 토대를 만들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진보의 위기가 시작된 것처럼 한국의 보수에게도 같은 일이 되풀이 될 수 있다.
국민들은 낡은 가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가 주는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다."
정치화·권력화 된 뉴라이트 운동으로 지목된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즉각 반박하고 나섰지만 이로써 한국 보수 세력의 현 좌표를 점검해 볼 몇가지 근거들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셈이다.
3.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과 남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수석 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4시간 가까이 수석들을 다그쳤다고 한다.
"매일 같은 보고만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
외교 쪽에만 집중하는 것 같은데 안보 분야도 꼼꼼하게 챙겨야 하지 않느냐.
정부의 잇단 대책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반응하지 않는데 뭔가 잘못 파악하고 있거나 노력이 미흡한 게 아니냐."
청와대는 대통령의 말씀이 연말 개편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이 대통령으로부터 좋은 평점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4.
글로벌경제위기와 오바마의 등장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한다. 시장질서도 경제운영 매카니즘도 정치리더십도 대중과의 소통도 낡은 질서, 낡은 시스템, 낡은 스타일, 낡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방식을 먼저 들여오고 먼저 체득하고 먼저 구현하고 먼저 구사하는 자가 앞서가고 승리한다는 선언이다.
DJ의 훈수도 뉴라이트 들끼리의 공방도 대통령의 질책도 모두 '낡은 것'들이다. DJ의 훈수에 따라 급조되고 있는 '전선'들도, 새삼스러울 것 없는 뉴라이트들의 패권주의적 행태도, 휘몰아치는 대통령의 만기친람 스타일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여권핵심부 인사들의 궁색한 모습들도 그렇다. 대중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데 온통 '낡은 것'들만 난무하므로 마음을 닫고 돌아서고 떠나는 것 아니겠는가.
'새로운 것'은 아무래도 이미 흘러간 자, 이미 너무 많이 갖고 있는 자들의 몫은 아니지 싶다. 이들에게 미래란 현재의 안정적 연장에 다름 아니겠기에. 그래서 '새로운 것'을 미래세대와 차기 주자들의 몫이라 본다면, 정치적으로 의미 있게 검토해야 할 범주는 논리적으로는 역시 박근혜, 정몽준, 김문수 등 집권당의 유력주자 그룹, 집권당내 소장개혁파 그룹, 민주당 주자그룹, 그리고 정치권 밖의 예비주자 그룹으로 좁혀질 듯하다.
5.
정치권 밖의 예비주자 그룹을 얘기하기에는 너무 이른감이 없지 않다. 상당한 정치적 훈련과 검증을 받지 않은 '신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 가능성 여부를 떠나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겠다.
박근혜, 정몽준, 김문수에게서 국민은 과연 어떤 '새로운 것'을 보고 있을까. 박근혜의 감성정치가 새로울까 정몽준의 어눌한 귀족정치가 새로울까 김문수의 터프한 현장정치가 새로울까.
집권당 소장개혁파는 이들이 생물학적으로 젊고, 상대적으로 개혁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위의 세 사람보다는 더 '새로울'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이들이 그동안 무엇을 그렇게 '새롭게'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이다. '새로운 것'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까, 아니면 보여줄 '새로운 것'이 채 준비되지 않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생물학적으로 젊고 그래서 좀 더 '새로울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 '새로운 것'과는 기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통설이 맞는 것일까.
민주당 주자들, 그 중에서도 소장 개혁파 주자들에게 지금은 몇 십 년에 한번 올 만한 절호의 기회다. YS, DJ 가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단숨에 천하를 평정한 지 어언 40년이 지났다.
아직도 DJ의 훈수정치가 통하고, YS의 DJ 비난이 뉴스가 되는 세상이긴 하나 이들은 이미 저만치 흘러간 장강의 앞 물결들이다. 대중이 목 빼고 기다리는 장강의 새 물결을 과연 누가 선도할 것인가. 생물학적 세대 유사성이나 제스처 수준의 이미지 유사성 말고 오바마가 구현하고 있는 '새로운 것'의 합리적 핵심을 누가 제대로 간취해낼 것인가.
6.
새벽이 오기 전에 어둠이 더 깊어진다고들 하는데 작금의 '낡은 것들'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의 전조였으면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한 가닥 희망도 없이 온통 '낡은 것들'로 둘러싸인 채 혹독한 겨울을 나기에는 이 겨울이 너무 춥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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