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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의 편인가?"

[조선 질경이 이소선] <6> 그 어머니와 그 아들

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그날은 당신이 모든 것을 잃은 날이지만
천지보다 더 소중한 아드님을 잃은 날이지만
한 아들의 착하고 어진 어머니에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된 날이다
우리들 모두의 어머니가 된 날이다
포근히 끌어안는 큰 가슴이 된 날이다
빛줄기가 되고 외침이 되어서 엎어지고
쓰러진 천만 노동자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보듬어 안는 우리들의 큰 어머니가 된 날이다.


위의 글은 시인 신경림이 20년 전, 이소선 어머니의 회갑을 기념하는 문집에 쓴 송시(頌詩)의 마지막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면서 평화시장에서 분신자살한 바로 그날을 말하는 것이다.

'그날'은 기원전과 기원후가 다르듯이 '그날 이전'과 '그날 이후'를 다르게 만든 날이다. 어찌 이소선 어머니 하나뿐이랴. 청계천 평화시장 인근에서 전태일과 같이 일했던 그 친구들이 달라지게 만든 날이었고, 전태일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게 만든 날이었다. 죽어서나마 전태일의 대학생친구가 되었던 장기표가 그랬고,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가 또한 그랬다. 그날 숯검덩이가 되어 있으면서 전태일이 남긴 마지막 말이 어머니를 바꾸고, 청계천 피복노조 친구들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날 태일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이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이루어 달라면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왜 죽는고 하면, 나는 더 이상 볼 수 없어요! 가냘픈 생명체가 계속 병들어 가니까,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안 보이는 벽살이 우리를 가두고 옥죄고 있어서, 그 단단한 벽을 허물기 위해 나는 작은, 아주 작은 바늘구멍이라도 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 작은 구멍을 자꾸 키워 가난한 사람, 근로자를 어두운 곳에 가두고 옭아매는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없는 사람도 살고, 근로자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죽음을 서러워하거나 원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머니보다 조금 일찍 죽는 것뿐이니까요. 나를 낳아서 키워준 우리 어머니는 우리 친구들하고 같이하면 슬프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을 거예요."

태일이는 이어서 자기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하더니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해 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나는 전태일의 이 마지막 말에 전태일의 모든 것, 살아남은 사람에게의 간곡한 당부, 그의 일생에 걸친 사상과 정신이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태일의 이 말이 한국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바로 노동조합설립을 비롯한 8개항 요구 조건을 내세우며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그 사이에 대학생 친구들이 달려왔고, 대학생 친구를 갖고 싶다던 전태일의 절규가 알려지자 그 말이 또한 대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어머니는 돈의 유혹도, 그 어떤 회유와 압력도 뿌리쳤다. 태일이가 그렇게도 원하던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었던 힘도 전태일의 그 말에서 나왔고, 곧 이어진 그 엄청난 탄압에 맞서 불굴의 투지로 싸워 이겨낸 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와 그 친구들은 과연 전태일이 못다 이룬 일을 이루었고,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를 통하여 청계노조는 단순히 노동조합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노학연대를 맨 먼저 실행, 한국노동운동의 선구자로 재야민주세력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노동운동의 중심이자 상징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청계노조가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역설적으로 당국의 탄압이 큰 역할을 하였다. "민주화란 인간이 그 자신 운명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로부터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일익(一翼)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계노조는 민주화투쟁의 전 과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태일이가 그렇게도 원하던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었던 힘도 전태일의 그 말에서 나왔고, 곧 이어진 그 엄청난 탄압에 맞서 불굴의 투지로 싸워 이겨낸 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와 그 친구들은 과연 전태일이 못다 이룬 일을 이루었고,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합뉴스

창동 어머니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어머니에게는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요",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한 말은 어머니와 그 친구들에게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말로 뼈 속 깊이 각인 되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 친구들은 "어머니, 우리 친구들이 있으니 우리들을 믿고 태일이의 뜻을 살립시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그래, 너희들이 다 내 아들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전태일의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살아생전 전태일이 조금씩 넓힌 집, 쌍문동 208번지 전태일의 집은 언제나 이들 노동자들로 북적됐다. 점차 찾아오는 사람들이 청계노조 관계자들을 넘어, 이 땅의 모든 노동운동가들로 확대되었다. 김문수 같은 대학생들도 드나들었다. 집을 넓히면서 전태일이 "나중에 우리 친구들이 많이 와서 밤새 노동운동을 이야기하려면 넓어야 한다"고 했던 그의 예언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장기표와 조영래 같은 수배자들도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을 틈타 어머니를 만나고 갔다. <전태일 평전>은 이 같은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반찬 없는 밥이지만 그들을 거두어 먹이기 위하여 어머니는 중부시장에 가서 헌옷가지를 사다가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팔아 생계비와 노동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전태일의 동생들, 순옥이와 순덕, 전태삼의 가족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 모든 수발을 다 들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이 집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창동 어머니'로 통했다. '창동 어머니'는 그 당시 노동운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였고, 그래서 찾아가 기댈 언덕이었다.

나는 그 무렵, 이화여대의 이효재 교수가 자신의 봉급을 쪼개 어머니를 돕는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감격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노라'하는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찾아가 어머니를 돕자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당시는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정치적으로도 너무나도 엄혹했다. 그러나 해위 윤보선 선생을 비롯해서 민주화운동관련 인사들이 청계피복노조와 어머니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구속자가족협의회에도 나오셨다.

어머니에게는 아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회한(悔恨)이 있었다. 우리의 속담에 "남편은 죽으면 산에다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태일에게 살아생전에 다하지 못한 '어머니 노릇'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다. 해마다 전태일이 죽은 11월이 되면, 어머니 몸에서는 신열이 나고 가슴은 답답하고 마음은 죄책감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된다.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과 씨름하는 것을 몹시 불길하게 생각했다. 11월 12일, 그가 집을 나가면서, 근로기준법 책을 찾을 때 사흘 동안이나 감추어 두었던 그 책을 마지못해 솥단지에서 꺼내 주었다. 또 어머니에게 근로기준법에 대해서 공부하자는 걸 불길한 예감 때문에 들어주지 않았다. 나가면서 13일 오후 1시에 국민은행 앞으로 나와서 자신이 하는 일을 구경하라고 간곡히 말하는 것도 듣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전태일이 11월 12일, 집을 나가면서 한 일련의 행동은 평소와 달리 이상했던 것이다.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이 그 동생들에게 말했고, 옷차림에도 그날따라 유난히 신경을 썼다. 어머니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끝내 전태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한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전태일의 유언과, 전태일이 평소 근로기준법에 대해 한 말들을 되씹으면서 당신보다는 태일이가 한참 먼저 세상을 알고, 노동운동을 깨우쳤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전태일이 못다 이룬 것을 이루는 것이 당신에게 남겨진 '어머니 노릇'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어머니의 삶은 전태일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것, 그 한가지로 모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분신만은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분노에 못 이겨 분신으로 저항한 사람들의 머리맡에 달려가 "내가 전태일의 어머니다. 죽을 결심을 할 바에야 살아서도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는데 왜 스스로 죽느냐"고 나무랐고, 죽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면서 당신이 먼저 앞장섰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전태일을 놓고서도 "나하고 살지, 왜 죽냐. 살아서 함께하지" 했다.

어머니는 분신 그 자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부모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분신만은 극구 말렸다. "죽고 싶어도 절대로 죽지 말고, 제발 그 힘과 그 마음으로 힘차게 싸우라"고 역설했다. 분신에 한이 맺힌 것이다.

전태일의 사상

▲ "전태일은 너무도 선명한 모습으로 그리고 최초로 독재적 억압과 수탈에 분신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가장 강경한 투사로 역사 속에 기억되고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연합뉴스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것이 70년대 초엽의 일이었고, 그 이후는 유신정변과 5, 6공을 거치면서 군사독재가 날로 혹독해지는 시절이었다. 전태일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의 역사를 열어놓고 갔다. 그 자신 하나의 밀알이 된 것이다. 이어 30여년에 걸친 군사독재 기간을 통하여 수 십 명이 분신 또는 자살의 길을 선택했다. 전태일은 너무도 선명한 모습으로 그리고 최초로 독재적 억압과 수탈에 분신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가장 강경한 투사로 역사 속에 기억되고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죽어가면서 그 어머니에게 말했듯이 전태일은 노동자를 옥죄고 있는 벽이 너무 두꺼워 그 벽에 작은 구멍을 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것이다. 그 작은 구멍을 키울 책무는 그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맡기고 갔다. 그는 그 작은 구멍을 통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한 줄기 햇빛과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나이어린 시다 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서 청계천에서 창동까지 걸어서 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의 남겨진 일기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혹사당하는 어린 여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전태일은 진실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전태일은 분신자결에 앞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절규한다. 바로 이 말은 70년대 노동운동을 상징하고 있다. 전태일은 너무도 오랫동안 그것을 갈망해 왔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불사르게 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전태일은 서로 간에 사랑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갈구했다. '금전대의 부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희망과 윤리를 생각하는 인간사회를 동경했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인간주의, 인간해방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지 결코 누구를 증오하거나 타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하게 보장되며,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인간적인 정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회였다. 전태일은 죽어가면서 어머니한테도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요! 가냘픈 생명체가 계속 병들어 가니까, 하루하루 병들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단단한 벽에 작은 구멍을 내기 위해 목숨을 버린 다고 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어린 시다여공들을 사랑하고 연민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전태일 사상 연구>의 저자 오경환이 말한 것처럼 전태일의 사상은 "인간정신의 지순한 총회일 뿐 아니라, 인간 사랑의 정수"인 것이다.

전태일은 항상 자기를 "전체의 일부인 나"로 파악했고,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고 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의 죽음 뒤에야 그 뜻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소선 어머니는 1990년 11월, 3만여 명이 모인 전태일 20주기 추모 노동자대회에서 "여기 모인 노동자 여러분, 모두가 전태일이다. 아니 전태일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면서 그들을 격려했다. "우리는 승리했다"면서 노동운동의 성장을 확인했다.

70~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서 "전태일을 계승하자"는 것이 일관된 하나의 구호였다. 특히 강경투쟁을 부르짖을 때 그와 같은 구호는 더욱 크게 외쳐졌다. 분신한 전태일을 계승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투쟁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분신과 자살이 이어졌다. 적어도 인간선언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70년대와 80년대는 그런 외침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요,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전태일을 올바로 계승하는 방법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었다. 진정 전태일이 외치고 바란 것이 무엇인지, 그 뜻을 계승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부터라도 다시 고뇌할 문제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거듭 말하지만, 한 젊은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 자살한 것쯤으로 넘어갈 뻔한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한 것은 어머니와 청계천 노동자들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힘과 지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어머니이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장기표의 '어머니의 고난에 찬 삶, 그리고 고난에 찬 삶을 살고 있는 이웃을 지극히 사랑하는데서 얻은 것'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과연 어머니에게 일찌기 꿈 많은 처녀시절이 당신에게는 저항의 시절이었고, 결혼이후에도 어려운 살림, 사업실패, 남편의 횡포, 아들의 가출, 무작정 상경, 화재 등을 겪었고, 전태일의 죽음 이후에도 수많은 투쟁, 연행, 폭행, 구속의 연속이었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이를 다 이겨냈다. 그것도 아주 대담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어머니에게는 많은 일화가 있다. 어머니를 새삼스럽게 다시 쳐다보게 하는 일을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84년 11월, 만경택시기사 박종만 씨가 분신자살 했을 때, 민주화운동진영 사람들이 시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병원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는 철통같이 경찰이 에워싸고 있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당시의 야당의원이 나서서 자신이 시신을 탈취해 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테니, 농성을 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해 왔을 때 어머니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가 더 이상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기본적으로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서 그러한 말을 하느냐. 당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이처럼 노동자가 억울하게 죽도록 만든 기업주나 당국에 항의하고자 하는 우리의 뜻에 동조해서 여기에 왔는가. 아니면 우리를 설득해서 해산시키려고 왔는가. 지금 경찰이 시신을 포위하고서 문상마저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항의도 하지 않다가 지금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당신은 권력의 앞잡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해던가. 4월 혁명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4월 혁명상'을 어머니가 수상할 때, 어머니는 결코 당신 혼자 받으실 수 없는 상이라면서 단 아래에 와 있던 유가협 식구들을 전부 단상으로 끌어올려 함께 상을 받았다. 이 얼마나 멋지고 가슴 뿌듯한 이야기인가. 그런 일을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던 것이다. 기지와 대범을 두루 갖추었다. 어머니는 무뚝뚝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뛰어난 통찰력, 예리한 기지, 범접할 수 없는 대담성 그리고 모든 사람을 감싸는 따스함이 있다. 특히 어머니의 즉흥연설은 문익환 목사도, 장기표조차도 감탄을 금치못할 지경이다. 또 기억력도 뛰어나서 마석 모란공원에 가면 민주열사 묘소를 하나하나 돌면서, 이것은 누구, 저것은 누구를 정확하게 가려내면서 누구는 죽기 전에 어떤 일을 했고, 누구는 어떤 말을 했으며, 아무개는 어떻게 살해되었으며, 아무개는 가족들이 돌보지 않아 외롭다는 것까지 소상히 꿰고 있다.

나는 어머니를 남들처럼 가까이 모시지도, 자주 만나 뵙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김지하 어머니, 정금성 여사를 통해서 70년대부터 어머니와 청계천 피복노조의 근황을 늘 듣고 있었고, 어머니의 투쟁이 곧 범국민적인 민주화투쟁이 되게 하고, 그 투쟁소식을 해외에 알리는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또 누구보다도 어머니와 가까운 장기표를 통해서 어머니의 타고난 인품과 무용담 같은 투쟁소식을 접했다. 1978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쫓기던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썼을 때, 나는 그 원고를 일본에 보내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 어느 한국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출판케 했다. 이 책을 토대로 일본에서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전태일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는데, 어머니의 자식을 잃은 고통과 그 이후의 역할을 크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책도 영화도 일본에서 최초로 출판되고 제작된 것이다. 전태일과 그 어머니의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전태일 평전>의 최초의 독자였던 것이다.

나는 이소선 어머니가 일찍부터 구속자가족협의회에 나오셔서 특히 인혁당 사건 가족들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은 실제로 그때 인혁당 가족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힘이 되었다. 그와 같은 관심과 애정표시는 당시로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처럼 당당하고 담대한 사람만이 그런 행동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을 하나하나 찾아가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며, 유가협을 결성, 이끌어 온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 없는 유가협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런 우리들의 이소선 어머니가 올해로 팔순을 맞이하였다. 옆에 서있는 우리들의 감개가 이렇게 새로울진대,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몸소 다 겪어 오신 어머니의 감회는 또 얼마나 벅차고 무량할까 싶다. 그러나 어머니는 팔순소리는 입에서 꺼내지도 말라고 하시면서 다만, 그동안 당신을 도와주고 가르쳐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애사를 발간하여 팔순을 기념해 드리려는 전태일기념사업회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생각컨대 올해는 살아있다면 전태일이 환갑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전태일의 환갑과 어머니의 팔순을 함께 잔치로 벌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그 효심에 어머니의 팔순을 얼마나 걸팡지게 차려 드렸을까. 아무쪼록 어머니의 여생이 편안, 건강하시길 빌어마지 않는다. 순옥이는 또 얼마나 오빠가 다 이루지 못한 일을 잘 이루어내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가. 이제 전태일이 못다 이룬 일은 순옥이를 비롯한 그 가족, 전태일의 청계친구들, 그리고 이땅의 천만노동자들이 이루어 가도록 이제는 좀 쉬셨으면 좋겠다.

2006년이던가, YTN에서 <민주화 30년>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때, 첫 번째로 <전태일편>을 다루었는데,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전태일에게 다하지 못한 '어머니 노릇'에 대한 회한을 갖고 계셨던 것을 기억한다. 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를 빼놓고 어떻게 대한민국 노동운동 사를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는 어머니와 아들, 두 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전태일을 계승한다"고 아무나 너무 쉽게, 또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태일처럼 나보다 더 어리고 가냘픈 노동자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말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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