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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이 어디까지 갈진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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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행이 어디까지 갈진 아무도 모른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나윤선과 휘루 (上)

어긋나는 장면들이었다. 음악을 대할 때나 세상일을 바라볼 때 자주 마주해야 하는 어긋남과 엇갈림을 근래 소소한 사건들에서도 보았다. KBS가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폐지했다. 자의든 타의든 등을 떠미는 손은 분명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사고의 플러그를 뽑아버리는 건 몇몇 언론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걸 수렵(수렴의 오타가 아니다)해버리는 슬로건에 동조함으로써 그의 하차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촛불모양의 발광봉을 흔들고 있었던 사람들 역시 그 자리에서 보았다.

또 얼마 전에는 한 가수가 '예술의 전당'에서의 공연이 불허되자 항의성 의사표시를 한 일이 있었다. 얼핏 그 대중가수의 편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예술의 전당의 운영과 기능에 대한 부분을 뒤로 미룬다면, 한국의 거의 모든 주민이 알아보는 인기가수는 어디에서든 공연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 대중음악인을 대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의 열창 모습을 떠올리긴 쉽지만 그만의 노래를 적어내기는 쉽지 않다. 모 인기드라마의 최종회에 대한 기사들이 그의 이름과 함께 적은 <거위의 꿈>은 사실 이적이 작곡하여 발표했던 곡을 인순이가 다시 불렀을 뿐이다. 뭔가 어긋나 있었다.

음악에 이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모던락은 연주와 사운드가 단순하다는 식의 선입견이 생겼다거나, 인간과 자연의 조화, 나아가 합일에 대한 사상과 닿아있는 뉴에이지가 듣기 편한 경음악 정도로 오해받기도 한다. 일부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장르의 인상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매너리즘이나 낭만주의라는 말 역시 부정적인 문장 안에 상투적으로 삽입되면서 본래와는 다른 인상이 씌워지곤 했다. 싱어 송라이터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단어 자체의 단순의미보다는 음악을 스스로 장악하는, 즉 기타 하나와 목소리만으로도 음악을 완성하는 포크 뮤지션들을 일컬어왔다. 일반에 통용되는 의미는 보다 포괄적이다. 불일치 대신 일치함이 분명하고, 작품과 음악인을 바라보는 명확하고 쉬운 근거를 제시하기에 편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서라면 주목할만한 여성 싱어 송라이터들이 적지 않다. 젠더로 구분하는 구태의연한 기준이 아니라 특유의 세계를 제시한 이름들만 꼽아가며 주먹을 여러 번 쥐었다 펼 수도 있다. 나윤선은 그 중 하나였고, 이제 휘루를 더한다.

한국 재즈와 나윤선

▲ 주목할만한 여성 싱어 송라이터들이 적지 않다. 나윤선은 그 중 하나였고, 이제 휘루를 더한다. ⓒ나윤선
재즈의 이미지 역시 조금은 어긋나 있었다.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의 배경음악, 도회적이고 세련된 취향의 표식, 고도로 전문화된 고급음악처럼 포장된 시절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희소가치를 차지하려는 허영과 사치, 그리고 과시를 소비로 유도한다. 주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한다는 자부심은 하위문화의 특징이고, 치장은 열등감의 표출이다. 나름의 문화와 철학에서 나온 펑크와 고딕을 스모키 화장 따위의 조각으로 나누어 파는 건 시장의 속성이다. 1990년대 몰아닥친 재즈 붐에도 그런 면이 없지만은 않았다. 그 이후 단어조합부터 검토와 숙고가 필요했던 '월드뮤직'이 그 자리에 동석했다.

덕분에 재즈가 특별한 지위를 얻긴 했지만 그것은 일면일 뿐이다. 서양고전음악이 귀족의 응접실과 교회를 배경으로 발전했지만, 재즈는 블루스와 락처럼 노예가 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미국의 경제구조 재편과 함께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고된 발길과 궤적을 같이 한다. 그들의 정서와 감각이 유럽의 기교와 만나 탄생한 재즈의 정신은 자유로움이지 엘리트주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재즈가 그런 식으로만 소비되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얘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일제강점기에 팝송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니 재즈와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지금의 의미에 가까운 재즈 역시 1970년대 후반부터 몇몇 연주인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수준에 다다른 창작 앨범들이 안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그런데 그 성과가 놀랄만하다. 나윤선과 말로, 그리고 웅산 등의 여성 재즈싱어들과 서영도와 모그 등 훌륭한 연주자들이 창작앨범을 내놓고 있다. 자연스레 모방을 넘어 혁신적인 시도가 나타났고, 재즈로서만이 아닌 대중음악으로서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창작에 대한 중시, 바로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많은 곡을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했던 세종을 다룬 TV드라마의 배경음악이 유럽의 민속음악 풍으로 채워지고 있는 나라에서, 예산족과 박재천·미연 듀오는 재즈와 국악의 공통분모를 키워가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사물놀이와 마당놀이를 통하여 대중화된 국악 퓨전의 역사와도 교차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다지 많지 않은 음악인들과 몇 장의 음반들의 성취는 신기해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국경 안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세계 재즈 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대중음악에서 국경과 국적을 넘나드는 경향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것은 또한 다른 방향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상은은 일본 음악인들과의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고, 하찌와 하세가와 등의 일본인들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놓았다. 한국에 거주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연주자 크리스 바가의 예는 더 이상 특이하지 않다. 인디음악계에 그러한 경우는 더욱 많아서 미국인 형제들의 밴드 '코즈모3'는 홍대 씬을 터전삼아 활동하고, 펑크밴드 '썩 스터프'를 특별하게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지금은 밴드를 떠난 외국인 기타리스트의 연주였다.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밴드 '스탑크랙다운'은 그 시작과 끝 모두의 거점을 한국에 두고 있다. '로로스'의 제인처럼 다른 국적을 가진 음악인들은 더욱 많다.

정체성을 경직된 관점에서 규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섞임'은 긍정적이다. 한국 주민이 '가르키다'와 '틀리다'는 말을 자주 오용하는 것처럼, 틀린 상투어까지 원어민처럼 사용하는 듯한 음악이 가능해졌다. 무국적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다. 기독교과 불교 역시 외래 종교였고, 코스모스와 아카시아는 물론 토끼풀과 달맞이꽃마저 귀화식물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긋나고 엇갈렸던 선들의 횡단보도는 음악지형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지형에서도 중요하다. 나윤선의 여섯 번째 정규앨범 [Voyage] 역시 이 선 위에 놓여있다.

겹침과 만남, 그리고 조화

▲ 나윤선의 [Voyage]
이전까지 함께 했던 연주자들과 프랑스 레이블과의 장기계약에 관한 이견 등의 이유로 결별한 후 새 동지들과 함께 한 [Voyage]는 독일의 재즈 레이블 액트(ACT)를 통하여 세계에 소개된다. 과거 한국에서도 유명 레코드사의 이름만 빌려 음반을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근래에는 해외의 유명 레이블의 이름을 빌리곤 했다. 나윤선의 경우는 다르다. 단지 해외진출이니 하는 부차적인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윤선이 갖게 된 어떤 위치를 생각해볼 수 있는 팩트이다. 그를 한국에서는 보편적이라 하고 해외에선 동양적이라 하는 모양인데, 이 모호한 규정은 각각 유사성과 차별성에 대한 나름의 판단일 뿐이다.

사실 그의 노래는 폭발적이라거나 소울이 넘친다거나 하는 수식을 동반하지 않는다. 몸을 튜닝된 악기처럼 다듬어놓은 경지에 오른 중견 가수들과도 다르다. 차라리 '클래지콰이'의 곡에서조차 존재감을 갖는 이승열처럼 색을 통해 지위를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처음부터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튜어디스 지망생처럼 항상 복장을 갖추며 옷에 몸을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인식은 행동에 따른다. 그렇게 이론을 정립하고 응용과 실험이라는 나름의 연구과정이 필요하다. 조금 알면 겁을 내지만, 냄비가 뜨겁다는 사실을 알고 만지면 다치지 않는다. 연주와 창작에서도 거쳐야할 이 속박은 후에 공책을 채우는 양분이 된다.

[Voyage]의 심플한 편성은 이와 관련 있다. 오로지 단조로운 어쿠스틱 베이스만이 보조하는 <Calypso Blues> 등 여러 곡들은 비워서 자리를 마련하고, 여백의 밑바닥을 따라 나윤선의 낮은 울림이 조용히 물을 채워간다. 이러한 편성은 나윤선을 부각시키는 슬기이자 오래된 음악기법이다. 물론 <Please, Don't Be Sad>는 풍성한 연주를 품었으며, 울프 바케니우스의 기타와 유니즌 경연을 펼치는 <Frevo>는 나윤선의 노래마저 악기로 수렴하는 기악곡에 가깝다. 그러나 기량을 뽐내는 전횡은 미뤄지고, 가락과 장단이 겸손하게 섞여든다.

보조물이나 부산물이 승격하여 주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 노이즈가 음악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연주 역시 한때 그러했다. 하지만 [Voyage]는 서로에게 양보한다. 충분한 반복이 일관성을 만들고 장식으로서의 변주를 넘어 다양한 흐름을 이끄는 연주가 노래와 호흡한다. 음악은 단순한 방식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단순하게 보이는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장인들의 작품에서 그러한 풍경을 보게 된다. 협연 이상 관계를 맺는 어쿠스틱한 이 앨범 역시 줄은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때론 느슨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 장력과 중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유능한 음악인들과 작업해왔기에 나윤선의 작업에서 그들의 가이드가 느껴진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수록 곡 절반의 작곡자는 나윤선이다. <My Bye>, <Come, Come> <Inner Prayer>는 송라이터로서의 존재감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얼마나 많은 습작을 통하여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음표에 결박되지 않은 노래와 가사가 있기에 연주의 자리도 함께 만들어진다. 또한 다른 이의 곡들, 낫 킹 콜과 톰 웨이츠, 그리고 미국의 전통요를 부를 때엔 싱어로서의 욕심도 풀어낸다. 적요한 음성이 타전하는 무드와 나지막한 연주가 출렁이는 <Voyage>는 이 모두를 집약하고 있다.

나윤선은 프로듀서이자 연주자인 라스 다니엘손 등과 함께 하기 위해 스웨덴 예테보리로 향했다. 예테보리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헤비메틀의 새로운 장을 연 주역들로서 한국을 여러 번 찾기도 한 다크 트랭퀼리티(Dark Tranquillity)와 인 플레임스(In Flames)의 고향도 그 곳이다. 신대륙이라도 발견한양 뒤늦게 북유럽 음악을 부각시키는 이들이 있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멋진 음악들이 가득했고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아온 지역이다. 아마 그들은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취급당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그 북구의 공기와 한국의 숨소리가 크지 않은 도시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것이다.

장르성은 국경을 넘어 오래도록 소통할 수 있는 끈이다. 그 장르의 덕목을 지키면서 보편성을 담아내기란 쉽지 않다. 지난 앨범 [Memory Lane]에서 보았듯이 나윤선은 대중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중성은 성공사례가 반복되면서 만들어진 공식과 대중의 기호를 좇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지만, 대중에게 다가가면서도 그들을 자기편으로 한걸음 끌어당기는 것을 지칭해야 마땅한다. 충분히 깊고 충분히 대중적인 이 앨범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Voyage]는 특수한 기법으로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냈으며, 음악성과 대중성, 동과 서, 작곡가와 싱어, 연주와 목소리가 결합하는 괜찮은 방식을 제시했다. 섣불리, 그리고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이러한 조화는 나윤선이 여성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나윤선이 한국 재즈의 전부는 아니다. 2008년에도 앞서 말한 다른 뮤지션들의 노작들을 여럿 만났다. 어쩌면 정서적 크로스오버를 즐기는 그는 울타리 너머 세계 재즈의 일원으로 더 영예로운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훗날 한국 재즈의 부흥기에 나윤선도 활동했다, 라고 기록되리란 사실이다. 더구나 나윤선의 여행(voyage)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신호가 잡힐 때까지 주파수를 유지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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