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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스스로 '미네르바의 예언'을 실현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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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스스로 '미네르바의 예언'을 실현할 셈인가"

[기고] 익히 보아왔던, 그리고 예외없이 실패했던 '관치금융'의 망령

이제 한국경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골짜기로 들어서고 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이 유동성 부족(illiquidity)에서 지급 불능(insolvency)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펀더멘탈은 건전한데 단지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여 원리금을 정상적으로 상환할 수 없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상호저축은행, 건설사, 조선사 등 일부 업종의 부실기업 문제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다. 10년 전의 악몽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한국 국민에게 또다시 구조조정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18일 열린 대주단협약 설명회. ⓒ뉴시스
그러나 부실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부실기업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정책이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다. 요즘 정부가 동원하는 모든 정책수단들이 '예전에 익히 보아 왔던' 것들이고, 그리고 '예외 없이 실패했던' 것들이다.

건설사에 대한 대주단협약? 1997년 부도방지협약의 재판이다; 10조 원의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 1999년 대우채 사태와 2003년 카드대란 때 봤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부소유 주식의 현물출자를 통한 산업은행의 부실기업 지원 여력 확대? 대우그룹, 현대그룹, LG카드 등 대형 부실기업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사용했던 전가의 보도이다; 연기금을 동원한 주가부양과 부동산 규제완화를 통한 건설경기 부양? 이건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사례들이 있다. 현재의 정부정책을 보면서 과거의 정책실패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데자뷰(déjà vu; 旣視感) 현상, 이거야말로 진짜 공포다.

그럼 왜 이런 정책수단들, 즉 관치금융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건설사에 대한 대주단협약의 지지부진한 진행 상황이 그 이유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애초 정부는 채권금융기관 중심으로 건설사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를 거쳐, A등급(양호)은 채권금융기관 자체 지원, B등급(중간영역)은 대주단협약을 통한 기존채권의 만기연장과 신규자금 지원, C등급(회생가능)은 워크아웃 프로그램 적용, D등급(회생곤란)은 회사정리 절차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설사의 입장에서는 채권금융기관의 지원을 요청하는 순간 자신의 재무건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자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나아가 금융지원에 따른 경영간섭과 책임추궁의 가능성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 채권금융기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코도 석자인 마당에 부실채권의 확대를 가져올 건설사 지원에 대해 적극적일 수가 없다. 또한 정책관료의 입장에서도 이런 관치금융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감사원 감사 내지 청문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법률에 근거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한 구조조정 절차가 아닌 한, 어느 주체가 이런 일에 총대를 메고 나서겠는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가 애초 천명한대로 건전한 기업(good company)에 대해서는 유동성을 지원하되 부실기업(bad company)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진행한다는 이른바 '옥석 가리기' 원칙을 엄격히 지킨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옥석을 가릴 능력과 의지가 있는가? 과거에 그런 사례가 있는가? 천만에…

이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시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업은 일단 부실기업(bad company)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느 기업도 금융지원을 신청하지 않게 된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모든 기업이 지원대상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요건을 완화하게 되고, 결국 애초의 옥석 가리기 원칙은 붕괴된다.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구분할 수 없으니, 정부가 아무리 돈을 많이 풀어도 신용경색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이것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사전적 기회주의의 문제, 즉 역선택의 문제(adverse selection)이다. 정부가 관치금융으로 모든 기업을 살리려고 하면, 모든 기업이 사경을 헤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또한, 정부가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불문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관치금융을 밀어붙이면, 배드 컴퍼니의 부실경영 및 불법경영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과거를 묻지 않으니, 현재도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 미래에도 동일한 문제가 재발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사후적 기회주의의 문제, 즉 도덕적 해이의 문제(moral hazard)이다. 정부가 관치금융으로 배드 컴퍼니까지 살려주고 책임도 묻지 않는다면, 모든 기업이 배드 컴퍼니의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조하지만, 시장기능이 붕괴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정부개입의 필요성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관치금융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킨다면, 정부가 경제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과거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특히 환율과 주가 관리도 모자라 이제는 시중금리까지 끌어내리라고 직접 지시하는 대통령의 경제인식을 보면서, 정부정책 실패의 예감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현재의 신용경색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는 시장 스스로가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를 구분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재무상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시장에 제공하여야 한다. 특히 상호저축은행, 건설사, 조선사에 대한 최신의 정보가 즉각 공개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역선택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리고 부실 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의 처리 부담 규모가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것이라면, 구조조정촉진법 또는 예보와 캠코를 통한 공적자금 투입(예금자보호법 및 자산관리공사법) 등 기존의 법률적 절차를 통해 구조조정을 진행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도덕적 해이의 창궐을 막아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고, 정부가 정보를 독점한 채 밀실에서 의사결정하는 관치금융 방식을 고집한다면, 한국경제의 미래는 10년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부 스스로가 '미네르바의 예언'을 실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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