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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FTA가 필요하다"

[송기호 칼럼]국제 금융위기 앞의 한미FTA

세계무역기구(WTO) 라미 사무총장은 금주 월요일(20일), 중국 베이징에서 들어볼 만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는 국경 간 금융 거래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제 금융거래는 본질상 상품 무역보다 휘발성이 더 강하므로 금융의 불안정성이 실물경제로 전염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라미 총장이 나선 것은 그가 '특급 열차'로 비유한 WTO의 안전에 빨간 색 경고등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국제 금융 위기는 전 세계적 실물경제의 불안정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이를 방치할 경우, WTO 체제에 급제동이 걸릴 것이다. 보호주의의 공포스러운 귀환을 막으려거든 새로운 금융규제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라미의 메시지이다.

라미의 말은 적어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의 WTO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보다는 국제 금융자본에 덜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WTO 회원국 중앙은행의 통화와 환율정책은 WTO에 포섭되어 있지 않고, WTO로부터 자유롭다. 그 어떠한 국제금융자본도 여기에 도전할 수 없다. 국가는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금융제도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합리적 이유'가 있는 한, 금융기관에 대한 국내 규제가 포괄적으로 허용된다.
▲ 지금의 한미FTA는 낡은 시대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전혀 다른 한미FTA가 필요하다. 사진은 한미정상회담 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연합

그러나 만일 라미가 한미FTA를 추진하는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그의 말은 매우 위선적일 것이다. 한미FTA는 미국계 국제금융자본에 포위되어 있다.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나 환율정책도 '차별 금지'라는 미국계 금융자본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은행이 이를 어길 경우 미국계 국제금융자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한국을 국제중재에 회부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미국계 금융자본을 상대로 예금자 보호 조치 등 금융제도 건전성 조치를 하는 것에서도 근본적인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한번 풀어준 금융 규제를 다시 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의 파생금융상품과 같은 '신금융서비스' 판매를 규제하기 어렵게 된다.

좀 더 세세하게 설명한다면, 한미FTA는 한국은행의 통화정책과 환율정책 허용 조건으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비차별적 조치일 것'(non-discriminatory measures of general application)을 못 박았다. 그리고 예금자 보호 등 건전성 조치의 내용에 송금 제한을 포함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공평하고 비차별적이며 선의의 적용일 것'(equitable, non-discriminatory, and good faith application)을 걸어 놓았다.(한미FTA 13.1조, 13.10조)

WTO에는 없는 이 근사한 낱말들은 결코 장식용 미사여구가 아니다. 차별금지 요건만 보더라도 국제통상법의 많은 판례들은 정부가 설령 차별을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결과 차별적 결과가 발생하면 이를 차별로 보고 있다.

미국계 국제금융자본은 한미FTA를 무기로 한국의 금융주권에 맞설 수 있다. 여기서 세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론스타라는 미국계 사모펀드가 한국의 금융감독위원장 등에게 올 7월경, 외환은행 매각 승인절차가 계속 지연될 경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겠다는 경고성 서한을 보낸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법원에서 론스타가 승소할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한국 헌법은 국가에게 경제 규제와 조정권을 포괄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지금 한미FTA가 살아 있다면, 한국정부는 론스타에 의해 국제중재에 회부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제중재에서 한국헌법이 갈 곳은 휴지통밖에 없다. 대신 금감위는 한미FTA에 규정된 대로, 자신의 심사 지연이 한미FTA상의 건전성 조치였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절차를 진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또 하나. 최근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의 부실은행 국유화 조치를 뒤이어 부시 대통령마저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돌파하기 위하여 부실은행을 국유화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한미FTA체제가 작동하고 있고, 한국만이 금융위기를 겪고 있다면 한국은 과연 미국계 금융자본이 투자한 은행을 국유화할 수 있을까? 나는 미국계 금융자본의 이익을 별도로 보장해 주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미국계 금융자본의 지분을 강제로 국유화하는 것이야말로 한미FTA가 규정한 '수용'의 전형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한미FTA에서는 신속하고 적절하며 효과적인 보상 없는 수용은 불법이다. 그리고 한미FTA가 규정하고 있는 건전성 조치에 국유화까지 포함된다고 해석할 국제중재위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금융상품에 대한 인가권을 보자. 메릴린치의 붕괴는 미국처럼 장외(OTC) 파생상품을 직접 설계할 역량이 있는 극소수의 나라조차 OTC 파생상품에 대한 건전성 감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을 보면, '키코'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금융 감독 당국은 새로운 개념의 OTC 파생상품에 대해 그 체계적 위험성을 분석하고 적기에 건전성 조치를 취할 충분한 능력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가 오직 건전성 사유로만 신상품의 인가를 거절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놓은 것은 한국에서 판매될 수 있는 OTC 파생상품에 대한 인가권을 미국이 갖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 인가된 OTC니 문제없다는 논리가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사람들이 먹는 쇠고기이므로 안전한 쇠고기라는 논리는 결코 농림부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라미의 WTO에서는 아직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다. 내가 개방론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WTO 라미 총장을 이해한다. 국내 은행의 국제부에서 근무했던 짧은 경험으로 볼 때도, 국제 무역은 국제 금융의 뒷받침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은행에 신용장 결제용 달러가 없다면 국제무역은 석기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라미가 그의 WTO의 순항을 위해 새로운 국제금융규제를 요구한 것을 난 이해한다.

내가 즐겨 듣는 김미화 씨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제목을 빌린다면 '세계는 지금' 한미FTA와는 매우 다른 국제금융 규제를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라미가 '신 브레튼우즈 합의(new Bretton Woods consensus)'라고 표현할 정도로, 세계를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에서 지금의 한미FTA는 과연 무엇일까? 국제금융자본이 국가를 규제하려 시도했던 낡은 시대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한 개방론자가 되려면 한 입으로 한미FTA 추진과 새로운 국제금융규제를 같이 말하는 위선을 먼저 버려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전혀 다른 한미FTA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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