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5년부터 경주용 더러브렛과 제주마 등을 키우고 있는 양동우(47) 씨는 요즘 초원에서 뛰노는 말들을 볼 때마다 한숨이 깊어간다. 감귤 농사를 떼려 치우고 시작한 국내산 마필 생산은 그에게 생계 수단이면서 동시에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때는 감귤 농사가 몇십 년 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태풍에 의해 이중, 삼중 난에 시달릴 줄 미처 몰랐을 때였다. "우리도 말 수입을 줄이고 일본처럼 좋은 말을 직접 생산해보자"던 정부의 정책적 유도도 있었지만, 양 씨가 말 생산에 뛰어든 중요한 이유는 "말이 미친 듯이 좋아서"였다.
그런데 양동우 씨는 요즘 한숨이 늘었다. 때로 분노도 치밀어 오른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바다 이야기' 파문의 충격으로 등장한 사행성 산업 통합 감독위원회(사감위)가 제주 말 농가들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한 것이다.
"경마 산업이 사행 산업이라고? 언제는 또 말 키우라 난리더니…"
'평화의 섬' 제주도가 조용히 들썩이고 있다. 700여 말 생산 농가의 눈이 사감위와 마사회의 대립으로 쏠려 있는 것이다. 사행 산업 규제를 둘러싼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의 결론에 따라 당장 먹고 사는 문제의 향방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감위의 경마 산업에 대한 '감독 방안'의 핵심은 경마 산업을 전체적으로 지금보다 줄이는 데 있다. 그를 위한 첫 번째 방안이 실명 카드의 도입이다. 현재 과도한 배팅을 막기 위해 1인당 구매 상한선을 정해 이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중복해서 마권을 구매함으로써 사실상 이 규제가 무기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사감위는 실제 경마장이 아닌 장외 발매소를 이전하거나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허가 신청 요건을 법제화하는 등의 운영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또 제주, 부산의 지방 경마장에서 열리는 게임에 서울 경마장에서 배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차투표도 단계적으로 줄여 없애겠다는 것이 사감위 입장이다.
현재 20여 마리의 말을 키우고 있다는 양 씨는 이 같은 사감위의 경마 산업 규제에 대해 "농가 입장에서는 참 기막히고 억울하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주도는 사실 먹고 살 만한 게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감귤 농사를 많이 지었지만, 한미 FTA 타결 이후 장기적 비전이 없죠. 관광 산업도 중국이나 동남아로 많이 몰려가는 추세란 말이죠. 그래서 요즘에는 젊은 층도 많이 말 생산업에 뛰어드는 추세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감위가 날벼락이 된 거죠. 언제는 정부가 나서서 '말 키우라'고 하더니만…."
말 가격은 벌써 떨어지고, 생산 원가는 계속 치솟고…
'날벼락'이라고 보는 이유는 실제 말 가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 한 마리의 가격은 지난해에 비해 벌써 15%나 떨어졌다. 사감위의 규제가 장기적으로 경마 산업 전체에 침체를 불러올 것이 예상되면서 미리 시작된 '시장 효과'다. 양 씨는 "앞으로는 더 떨어질 것 같다"고 했다.
말 값과 달리 생산 단가는 작년에 비해 30%나 더 든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기름 값 상승의 영향이다.
"트럭 타고 목초도 뿌리고 하는데 기름 값이 오르니 감당이 안 되죠. 그 넓은 땅을 다 걸어다닐 수도 없고요. 말은 사료도 전부 다 수입인데, 가격이 거의 70% 정도 올랐어요."
양 씨의 말이다.
경주용 말로 마사회가 사가지 않으면 값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1000~3000만 원 하는 경주용 말과 달리 경마장으로 못 가면 100만 원 정도만 받고 '팔아 치워야' 한다. 24개월 동안 1200만 원 정도가 드는 생산 원가에도 턱 없이 못 미치는 것이다.
또 현재 마사회가 축산 농가에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씨수마와의 교배도 마사회가 적자가 되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농가들의 우려다. "좋은 말의 경우에는 한 번 교배 시 몇 천 만원까지 줘야한다는 외국처럼 될 경우 말 생산 산업 자체가 생존이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얘기다.
당연히 말 농가 입장에서는 경마 산업의 '부흥'이 생존과 연관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경마는 경륜, 카지노와 다르다…말 생산부터 관리까지 복합 산업"
결국 말 생산 농가들은 사감위의 이 같은 규제를 '제주 마필 생산 산업에 대한 규제'라고 보고 있다. 이는 대부분이 생산자이기도 한 마주 협회의 입장과도 비슷하다. 때문에 이들은 비상대책위원회까지 만들었다. 이 비대위에는 제주 관광협회와 제주 상공회의소, 제주대학 교수회까지 포함돼 있다.
정완모 '제주마필산업 규제 철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경마 산업이 사행 산업에 포함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했다. "경륜이나 카지노 등과 달리 마필을 생산하고 사료 작물을 재배하는 1차 산업과 시설 설비 등 2차 산업 등이 함께 섞여 있는 복합 산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본인이 마주이기도 하지만 정 위원장은 "경마 산업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찬성한다"고 했다. 과도한 '도박 중독자'가 양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사감위의 현재 계획은 "정부를 믿고 따랐던 축산 농민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 비대위의 입장이다.
정 위원장은 "현재도 말 생산 축산 농가의 가구당 평균 부채가 5억"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말 산업 육성을 위해 말 한 마리당 900만 원 씩 융자를 내줬고 그것이 고스란히 빚이 되었는데 갑자기 말 산업을 죽이려 한다"는 얘기였다.
"'기관차 이론'? '풍선 효과'는 고민해 봤나?"
이들은 "합법 사행 산업이 불법을 조장한다"는 사감위의 소위 '기관차 이론'에 '풍선 효과'를 얘기했다. "합법 공간에서 이뤄지는 경마를 과도하게 규제할 경우 스크린 경마 등 사설 경마장으로 그 수요가 옮겨갈 것"이라는 논리다.
이는 마사회도 같은 입장이다. 정금석 한국마사회 제주본부장은 "경마 산업에 있어서 돈을 걸고 배당금을 가져가는 '도박성 행위'는 아주 일부분에 불과한데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접근하는 것이 큰 문제"라며 "실제 규제가 필요한 것은 불법 경마"라고 주장했다.
실제 지난 2006년 떠들썩하게 벌어졌던 '바다 이야기'는 잠시 전부 문을 닫는 듯 하더니 다시 성행하고 있다. 요즘은 대리 운전, 대출 등에 이어 문자 메시지를 통한 홍보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사감위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에 대해 베팅을 하는 것' 자체가 사행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사행 산업은 증권 시장 아니냐."
정 본부장의 말이었다. 물론 마사회의 입장이야 규제 자체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말 농가들은 그와는 온도차가 있다. 비대위는 현재 정부를 향해 "농가부채 탕감이나 마필 구매 보상 후 시행"과 같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경마가 과연 사행 산업이냐 아니냐, 사행 산업이라 하면 어느 수준까지 규제해야 하느냐를 놓고 마사회와 사감위가 이처럼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 정책만 믿고 말 생산에 공을 들였던, 평균 25마리의 말을 키우는 700여 제주 말 생산 농가의 한숨만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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