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로 평가받는 현재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층이 루스벨트를 배우겠다고 나선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배움의 내용이 루스벨트가 정치적 반대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사력을 다해 추진한 정책이 아니라 '노변담화'라는 껍데기뿐이라니 역시 정권의 수준이 '2메가바이트(2MB)'인 것이 드러난 것 같아 헛웃음만 나온다.
이명박은 루즈벨트의 대척점에 서 있다
F.D.R.이라는 알파벳 약자로 더 유명한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논쟁적인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33년 3월에 취임하여 1945년 4월 죽을 때까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경제제도와 금융제도에 대한 규제강화, 사회보장제도 도입, 노동조합 성장과 노동권 개선, 공산주의와의 화해정책 추진 등이다. 이명박 정권이 지향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내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미국 진보주의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루스벨트 역시 자본가를 비롯한 보수 진영으로부터 "거대 정부"를 만들고,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키우고, 반기업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주범이라고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실 1980년대 레이건 정권 들어 본격화된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뤄진 뉴딜 청산 과정에 다름 아니다.
루스벨트 "국부의 공평한 분배, 이윤이 아닌 사회적 가치"
루스벨트가 한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입니다"이다. 이를 흉내 내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8일 재향군인회와 만난 자리에서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두려워할만한 근본적인 이유가 없습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두려움'이 어쩌고 하는 추상적인 말장난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노선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선언했다.
"국부의 분배를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 나는 미국 국민을 위한 뉴딜에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경제의) 재건은 우리가 돈과 이윤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생활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라면 이 나라에 존재할 권리가 없습니다."
루스벨트는 1933년 3월 행한 첫 취임연설에서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한 은행업자와 금융업자의 "고집스러움과 무능력" 때문에 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1937년 행한 두 번째 취임연설에서는 "우리의 전진 여부는 많이 가진 자들의 부유함에 더 많은 것을 더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너무나 적게 가진 이들에게 우리가 넉넉하게 줄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말로만 끝나지 않았던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 강화
루스벨트는 말로만 끝내지 않았다. 1933년 취임하자마자 전국산업부흥법(NIRA)을 만들었다. 경쟁 제한과 기업 활동 규제를 노린 이 법으로 정부의 경제계획 정책을 지원하는 경제기획원(NPB)이 출범했고, 4000개가 넘는 기업 관행이 금지되었으며, 3000개가 넘는 행정 명령이 만들어졌다.
또한 경제부흥청(NRA)이 만들어져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가격을 통제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임금을 안정시켰다. 전국산업부흥법은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했으며 노동운동의 조직화 사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루스벨트는 월스트리트, 즉 금융자본을 규제할 목적으로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창설했다.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같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영기업을 만든 것도 그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명령으로 모든 민간 보유 금을 즉각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매각토록 하는 사실상의 "금 몰수"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물론 루스벨트의 정책은 대자본가를 비롯한 보수층의 반발을 불렀고, 자유방임주의에 물든 보수파가 장악한 미국 대법원이 그 선두에 섰다. 1935년 대법원은 전국산업부흥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루스벨트는 "(이 법의) 기본 목적과 원칙은 건전하며 그것의 포기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며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이 법은 되살아나지 못했다.
뉴딜의 "반기업-친노동" 색채와 이명박의 "친기업-반노동"
보수층의 반발에 직면한 루스벨트는 1935년 봄을 기점으로 "반기업-친노동" 노선으로 더욱 기울었다. 그 해 와그너 법(Wagner Act)으로 알려진 전국노동관계위원회법이 만들어져 민간부문 노동자 대다수에게 노조 결성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주어졌다.
이 법으로 기업의 부당노동행위를 조사하는 권한을 가진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가 만들어졌고,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크게 느는 등 성장을 거듭했다. (자본가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힌 이 법은 1947년 노동권을 제한한 태프트-하틀리 법으로 대체되면서 그 생명을 마치게 된다.)
더욱 중요하게로는 사회보장법이 만들어져 은퇴자연금, 실업보험, 장애자급여, 빈곤층급여를 지급함으로써 미국 복지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루스벨트는 세금으로 사회보장 재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뉴딜 정책의 결과,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자유방임주의 하에서 전횡을 일삼던 미국 자본가들의 권력이 줄어들고,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커졌다. 농민들의 목소리도 커졌고, 소비자 단체도 중요한 여론집단이 되었다. 중앙정부의 역할이 커진 것은 물론이다.
대공황이 오기까지 미국에서는 정치적 경쟁은 전무한 반면, 경제적 경쟁은 흘러넘쳤다. 자본가와 부유층은 무한대의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 정치적 권력을 독점했다. 하지만, 뉴딜 정책으로 경제적 경쟁에 제약이 가해지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정치적 권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뉴딜 정책의 추진자들은 자유 시장을 "살인적인 경쟁"이며 악(evil)으로 여겼다.
'노변담화'는 '시장주의자'를 논박하기 위해 마련됐다
취임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이 친기업 정권임을 틈만 나면 강조했다. 그는 전임 정부인 노무현 정권을 (말로는 좌파정책을 거들먹거렸지만, 실제로는 이라크파병과 한미FTA 등 우파정책을 적극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정권"이라고 비판했다.
루스벨트 역시 "반기업-친노동" 정책으로 "공산주의"니 "좌파"니 하는 보수파의 이념공세에 시달렸다. 노무현 정권과 달리 말로만 그쳤던 게 아니라 일관된 정책으로 집행까지 했던 그였기에 자본가와 부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층의 반발은 엄청났다. 반대파의 격렬한 반발을 잠재우고 국민들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루스벨트가 마련한 것이 노변담화, 즉 라디오 연설이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상한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때는 '파시즘', 어떤 때는 '공산주의', 어떤 때는 '집단주의', 어떤 때는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실제로는 매우 단순하고 실용적인 것을 매우 복잡하고 이론적인 무언가로 만들려고 합니다. 말주변이 좋은 이기주의자이자 완고한 이론가인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 (국민 여러분) 권리나 자유, 혹은 헌법상에 보장된 행동과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까?"
루스벨트의 '달'은 못 보고 '손가락'만 보는 MB정권
이명박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을 비롯한 "민간"의 힘, 즉 사적인 권력(private power)이 커져야 하고 국가의 간섭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라디오 연설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1938년 의회에 보낸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국의 불행한 사건들은 민주 시민의 자유에 대해 두 가지 단순한 진실을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줬다. 첫 번째 진실은 사적인 권력이 민주국가 자체보다도 더욱 강하도록 커지게 국민이 용인한다면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는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 개인, 특정 계층 혹은 어떤 다른 사적인 권력에 의한 정부 소유, 즉 파시즘이다.
두 번째 진실은 기업제도가 (누구나) 받아들일만한 생활기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고용을 창출하지 않고 상품을 생산하고 분배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는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두 가지 교훈은 우리나라에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평등 없는 사적인 권력의 집중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전기를 쓴 진 에드워드 스미스는 장애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했던 루스벨트가 "미국을 대공황과 2차 대전(의 참화)에서 번영하는 미래로 이끌었다"며 "휠체어에서 그 자신을 일으켜 세워 미국을 일으켰다"고 썼다.
이명박 대통령의 전기에는 뭐라고 써질까. 실용은 간데없고 한물간 이념만 나부끼는 이 정권의 행태로 볼 때 "2008년의 경제위기를 넘어 번영하는 미래로 이끌었다"고 써지지 않을 건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노변담화'가 루스벨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은 보지 못하고 루스벨트의 손가락만 보는 허망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끝나게 될 것도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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