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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앞에서만 '시장주의적'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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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앞에서만 '시장주의적'인 정부

[기자의 눈] '모럴 해저드'는 은행에는 통하지 않는 말일까

달러가 말랐다. 지난달 '9월 위기설'에 이어 이번에는 달러 부족으로 곤란을 겪는 국책은행이 시중은행에 제공했던 달러자금을 회수해 위기가 올 것이라는 '10월 외화 유동성 위기설'이 또 들불처럼 번질 정도다. 실제 이번 달에는 국책은행이 시중은행에 빌려줬던 단기 외화자금 27억 달러 정도가 만기를 맞는다. 만기를 눈앞에 둔 외화채권도 5억 달러 가량 된다.
  
  은행권이 아우성을 치자 은행에서 돈을 빌렸던 중소기업도 비명을 지른다. '실물 경제로 자금경색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여기저기서 나오는 지경이다. 국책은행이 달러를 되찾아가니, 국책은행에서 돈을 빌린 시중은행은 역시 달러를 빌려준 중소기업에서 돈을 회수할 수밖에 없고 이런 연쇄 작용이 결국 실물경제를 주저앉힐 수 있다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구조다. 피(달러)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수혈 말고 다른 치유법이 없다.
  
  문제는 지금처럼 환자(중소기업)뿐만 아니라 간호사(시중은행)까지 앓아누웠을 때 발생한다. 정부는 동시에 여러 환자를 돌봐야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더군다나 보관한 수혈백(외환보유액)에는 한계가 있다. 무한대로 피를 공급할 수 없는, 실로 난감한 상황이다.
  
  변수는 또 있다. 두 환자는 모두 지금 당장 치료비를 내지 않는다. 매달 꼬박꼬박 내는 의료보험금이 전부다. 한쪽(시중은행)은 의료보험금도 많이 내고 건강할 때는 다른 환자를 돕기도 한다. 실려온 환자(중소기업)는 그와 반대다. 환자의 상태를 보니 미심쩍긴 하지만 천방지축 사고뭉치 구석도 있는 듯하다. 불장난을 좀 크게 한 것 같긴 한데 확실한 물증은 없다.
  
  정부는 결론을 내렸다. 중소기업에는 "비싼 세금으로 구입한 수혈백을 무작정 공급해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간호사가 아프지만 지금 당장은 일손이 모자라니 간호사에게 치료를 전담케 하겠다"라고 처방전을 내렸다. "아프다고 무작정 찾아오는 모든 환자를 돌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훈계도 했다.
  
  1일 발표된 중소기업 유동성 대책이 이렇다. 중소기업의 유동성 문제가 심각한 상황인 것은 사실이지만 당장 치료에 들어가기에는 정부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더군다나 당장 치료비도 내지 않는 환자에게 아까운 세금을 마구 퍼붓다가는 자칫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신중해 질 수밖에 없다. 몇몇은 키코(환위험 헤지 상품)에 헤지 비용 이상을 투자한 것 같기도 해 무작정 기업의 잘못을 세금으로 메워주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간호사는 어떨까? 간호사 역시 병상에 누운 상황에서는 환자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조금 다른 처방전을 준비 중이다. 주요 경제신문의 보도를 종합하면, 정부는 외화자금시장에 100억 달러를 풀겠다는 대책에 이어 시중은행권에 직접 달러를 대출해주는 방안마저 고려하고 있다. '수혈'이라는 간접 지원도 모자라 아예 직접 자기 팔에 주사바늘을 꽂아 피를 집어넣어주겠다는 친절함을 보인 것이다.
  
  금융기관의 호소가 줄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필요한 경우 외환보유고로 모자라는 자금을 확실히 공급해 주겠다고 금융기관 실무자들에게 약속했다"고 말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은행권의 이와 같은 외침이 커지자 한국은행에서도 이와 관련된 멘트를 했다. 정부가 중소기업 지원방식에 대해 해명한 뉘앙스와 똑같다. "개별 은행에 중앙은행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모럴 해저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게 한국은행의 입장이다. 지금 은행을 지켜보는 정부의 태도와는 상이하다.
  
  안타깝지만 기준을 알 수 없다. '시장원리'를 어기면서 정부가 직접 지원에 나서야하는 까닭은 중소기업이든 시중은행이든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중소기업과는 달리 시중은행에는 친절하게 비축분에 대한 우려마저 제기되는 수혈팩을 직접 놓아줄 태세다. 자칫 수혈팩이 모자라는 상황, 즉 정부 보유 외화 유동성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부가 말하는 '시장원리'는 도산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에만 적용됨이 확실해 보인다. 정부의 유동성 공급 대책을 지켜본 중소기업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어떤 은행이 지금 같은 달러 난국에 조그만 인센티브로 중기 대출을 늘리겠나"는 아우성이 흘러나온다. 정부가 고려하는 은행에의 직접 달러 대출과 같은 정책을 두고 미국 보수파들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한다. 은행을 바라보는 정부의 눈과 중소기업을 지켜보는 정부의 눈은 너무 다르다.
  
  하긴, 정부가 추진하는 모델이 입으로만 '시장 친화'를 부르짖는 미국의 정실 자본주의라면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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