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서점은 이 국방부의 불온 도서 선정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해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고, 불온 도서로 선정된 일부 책의 매출이 증가해 해당 출판사는 불황 속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국방부는 이 불온 도서 목록을 철회하지 않고 있고, 저자·출판사의 사과 요구에도 묵묵부답이다.
<프레시안>은 이번에 국방부로부터 '찍힌' 저자·출판사와 공동으로 릴레이 기고를 마련했다. 두 번째 글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펴낸 부키의 박윤우 대표가 보내왔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국방부 불온 도서 선정 이후, 독자들이 다시 찾은 대표적인 책이다. <편집자>
정상적이라면 분노해야 한다. 우리 회사에서 낸 책이 불온 도서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근거를 대라! 이래 가며 목청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놀랍지도 않다. 생각해보라. 장하준 교수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공격하곤 했다. 그것도 보기 드물게도 좌파와 우파가 힘을 합친 모양새까지 취해가며 말이다. 거기에 국방부가 한마디 거들고 나선 것뿐이다. 그게 뭐 그리 분노할 일이고, 놀랄 일이겠는가?
그래 누가 물으면 피식 웃고 만다. '요즘 국방부 덕에 살림 폈다며?' 해도 피식 웃고, '그래 불온 도서 딱지까지 붙었는데 기분이 어때?' 해도 피식 웃는다.
이런 내 태도가 상당히 마뜩찮은지 성질 급한 이들은 노골적으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국방부 덕분에 책 잘 나가니 그걸로 됐다, 그거지? 왜, 아예 이참에 국방부에 감사패라도 돌리지' 하곤 한다. 또 좀 유순하다는 이들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불온 도서 운운하는 국방부에 대해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1인 시위 정도라는 안 된다.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불온 도서 운운하는 건 저자에 대한 인격 살해 행위나 다름없으니 명예 훼손으로 국방부를 제소해야 한다' 해가며 이러저런 충고를 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어딘가 약간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을 정도이다.
그때마다 부랴부랴 내 태도가 왜 이런지에 대해 제법 시간 들여가며 설명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 짓을 만나는 사람마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이 기회를 빌려 나도 내 속내 좀 털어놓아 보련다. 내가 왜 국방부에서 불온 도서 운운해도 피식거리고만 있는지 말이다.
솔직히 나도 국방부에 대해 유감 많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감이 많은 건 배울 만큼 배우시고, 식견 깨나 높으시다는 분들께서 장하준 교수에 대해 던지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재벌 앞잡이'니, '개발 독재를 옹호한다'느니,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한다'느니, '대안이 없다'느니, '이미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자,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좋다.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한다'는 황당한 주장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은 간단하다. 장하준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진국들은 지금 자유화·민영화·탈규제가 경제 발전의 핵심 열쇠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경제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면 철저한 보호주의 정책에 기반을 둔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는 것과 '신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잘못된 경제 이론이다'라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걸 말하는데 책이 6권이나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되묻곤 한다. 경제학 개론 하나면 되지, 왜 미시경제론이니, 거시경제론이니, 재정학이니, 경제사니, 금융경제론이니, 국제경제론이니, 한국경제론이니 하는 걸 따로 배워야 하지? 이러면 상대가 펄펄 뛴다. 심화라는 게 있지 않느냐, 당신은 개론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해당 전문 분야로 들어가서 배울 수 있는 게 수준이 다르다는 것도 모르느냐면서 말이다.
그렇다. 바로 그거다. 장하준 교수도 똑같다. 개론이 있고, 전문 분야가 있다. 가령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은 일종의 개론에 해당한다. 세계화 이론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부자 나라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자유 무역이 모든 나라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 외국인 투자는 언제나 환영해야 마땅한 것인지, 공기업 문제가 민영화로 해결이 되는지,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등등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쉬운 예를 들어가며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반면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는 오로지 한 가지 문제만을 파고든다. 선진국들이 경제 발전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정책을 폈느냐는 것이다. 또 <국가의 역할(the Role of the State)>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자유화·민영화·탈규제로 요약되는 그들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볼 때 타당한 것인지, 이론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부분은 없는지를 정밀하게 점검한다. 그러니까 <사다리 걷어차기>는 경제사에, <국가의 역할>은 미시경제론과 거시경제론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뽑아내 점검하는 경제학 특강에 해당하는 셈이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Reclaiming Development)>나 <쾌도난마 한국 경제>, <개혁의 덫>은 성격이 또 다르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신자유주의 흐름에 굴복하려는 이들에게 제시하는 반(反)신자유주의 정책 대안 모음집이다. 그에 반해 <쾌도난마 한국 경제>는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현재의 문제가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자유롭게 토론한 대담집이고, <개혁의 덫>은 그간 신문이나 잡지에 썼던 칼럼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결국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경제학 연습에, <쾌도난마 한국 경제>는 한국경제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해도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비슷한 사례가 여기저기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맞다. 비슷한 사례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사다리 걷어차기>에서는 스위스의 특허가 물질 특허와 공정 특허로 나눠지는데, 물질 특허 중에서도 화학 물질 관련 특허는 언제까지 인정되지 않았으며, 공정 특허는 언제부터 인정되었다는 식으로 세세하게 나오는 반면,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에서는 그중 일부만 아주 간략하게 인용되는 식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거시경제론에 나오는 내용과 경제학 개론에 나오는 내용에 겹치는 부분이 많은 걸 기억 못하는가? 당신은 정부 재정에 관한 논의가 경제학개론에서, 거시경제론에서, 재정학에서 계속 언급되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가? 기억한다면 그때도 당신은 왜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느냐고 비판할 것인가?
가끔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때도 있다. 가령 돼지고기가 있다 치자. 이 돼지고기가 어떤 맛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구워줄 때도 있고, 튀겨줄 때도 있고, 삶아줄 때도 있다. 또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안심을 줄 때도 있고, 등심을 줄 때도 있고, 삼겹살을 줄 때도 있고, 머리고기를 줄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돼지고기이기는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계속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셈인가?
이런 식의 이야기라면 하도 해서 이제는 징그럽다. 그러니 대충 여기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다만 그 중에서 '재벌 앞잡이'라느니 '개발 독재를 옹호한다'느니 하는 두 가지 이야기는 경제학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그런데 제사 때 절하는 게 우상 숭배라 못 하겟다는 열혈 신앙을 가진 기독교도에게 시시비비를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게 그간의 경험 법칙이다. 그러니 그냥 건너뛰도록 하자.
그러면 남는 게 '대안이 없다'는 것과 '이미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 없다'는 건데, 이 두 이야기는 궤를 함께 한다. 따라서 묶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자, 장하준 교수가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냥 이게 이렇게 잘못되었다고 지적만 했다 치자. 그러면 그걸로 되지 않았는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 사람은 대안까지 제시해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면 이렇게 물어보겠다. 당신은 잘못된 부분을 찾았으면 바로 대안이 나오던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들이 동경하는 그 자연과학의 발전은 왜 그렇게나 더딘가? 문제만 파악하면 바로바로 답이 나와야 하는데, 왜 그렇지를 않더냐 말이다.
이런 식의 질문은 너무 공격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야 올해 나온 최신간이니 논외로 하자. 하지만 <사다리 걷어차기>나 <개혁의 덫>은 2004년에, <쾌도난마 한국 경제>는 2005년에, <국가의 역할>은 2006년에,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2007년에 나왔다. 그리고 이 책들은 모두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정책을 취했는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에 집중해서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대안을 찾지 못했다면 그걸 뭐라 해야 할까?
아, 내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대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의 경우 대안이란 격식 갖춰 밥상 차리듯 이게 문제인데, 이래서 틀렸고, 그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프레젠테이션 하듯 원스톱 서비스로 제공하는 거라고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대안이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사실 장하준 교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2004년에 그런 작업을 해놓았는데, 우리가 게을러서 올해에야 내놓았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가 그것이다.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우리 경제 관료들은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하던데…. 또 우리나라에는 경제학 박사 숫자만 해도 다섯 자리라던데…. 설마 그 우수한 경제 관료와 그 많은 박사님들이 밥상 차리듯 하지 않으면 대안이 아닌 걸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아마도 '이미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의미 없다'는 맥락에서 대안이 없다고들 했을 것이다. 그렇다 시대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노골적인 산업보호 정책은 불가능하다. WTO 규정을 샅샅이 뒤져 교묘하게 피해나갈 방법을 찾아야 할 정도니까.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관료들의 임무이자 한국에서 살아가는 경제학 박사들의 일 아닐까?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지는 말자. 과거 영국에서 원산지 표시를 강화하자 독일 측은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냈다. 재봉틀의 경우에는 그 무거운 걸 뒤집어 보기 전에는 원산지 표시를 볼 수 없도록 하기까지 했다. 프랑스에서는 산업 스파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런 방법을 어디서 알아냈을까? 역사 속에서? 누군가의 귀띔으로부터? 아니다. 자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죽어라 머리를 쥐어짜낸 결과물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우리에게는 우수한 경제 관료가 있고, 수많은 경제학 박사들이 있다. 그러니 마땅히 이 정도는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대안이 없다' 내지는 '이미 시대가 달라졌다'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이전 단계라 할 수 있는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대한 논쟁마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 이건 이래서 틀렸고, 저건 저래서 틀렸다고 명쾌하게 제시하는 이도 없다. 결국 틀렸다는 단정도 없이 논쟁은 실종되고, 논쟁도 없는 상태에서 '대안이 없다'느니 '이미 시대가 달라졌다'느니 하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알아듣기조차 어려운 화두 같은 말만 난무하는 셈이다.
국방부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반정부·반미 불온도서로 규정해도 별로 화도 안 나고, 놀랍지도 않은 건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서브프라임 쓰나미로 결국 월가의 투자은행들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미국 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퍼질지도 모른다고 전전긍긍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여전히 장하준의 주장이 맞다 그르다 논쟁조차 없다. 나는 정말이지 이런 상황이 더 화가 난다.
어떤 유명 작가가 한 여성지로부터 인터뷰 신청을 받고는 '에이, 여성지에서 무슨 인터뷰. 시사지면 몰라도…' 했다. 그런데 그 담당 기자의 댓거리가 심상찮았다. '여성지야 기껏 여자들 좀 망치는 정도지만, 선생님, 시사지 그거요, 그건 아차하면 나라 망칩니다'였던 것이다. 그 작가가 두고두고 말했다. '거참, 옳고 또 옳은 말이더라고….'
국방부에서 불온도서로 지정했다고 뭐가 문제인가. 그냥 국방부에 소속된 국군 장병들이 군 부대 내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볼 수 없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논쟁 없이, 공감대 형성 없이 막가는 지금 식의 경제 정책은 잘못하면 나라 망친다. 나는 정말이지 그게 제일 무섭고, 그게 제일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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