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鐺把)
당파(鐺把).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고 오늘 왜 이 말이 강하게 나를 붙드는가?
당파. 이것은 지금엔 없는, 옛날에 사용했던 삼지창(三枝槍)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삼지창이 세 창 끝 모두 똑같은 길이인 것에 비해 당파의 세 창 끝은 길이가 다 달랐다 한다.
하나는 짧고 하나는 중간, 하나는 길고, 가운데 창이 가장 길고 오른쪽이 중간, 왼쪽이 가장 짧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창은 짐승을 잡는 도구다. 짐승은 생명과 영혼을 지닌 존재다. 지금은 다름 아닌 '망할 세상'이라 촛불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 쇠고기 다루는 뉴스필름에 가끔 나오듯 완전히 무슨 쇳덩어리 다루듯 때려 부수고 마구 쑤셔대고 자르고 토막내고 이어 붙이고 지랄 발광하지만, 예전 우리 조상들은 그러지 않았다.
짐승의 고귀한 생명과 거룩한 영혼을 높이 모시고 그윽히 길 닦음해 주었다. 짐승 잡는 전문가인 백정들 스스로 좋은 땅을 골라 정갈한 솜씨로 새하얀 수혼탑(獸魂塔)을 세워 철철이 제사까지 지낼 정도였으니.
당파는 물론 전장이나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겠지만 전설에는 도살장에서 소 잡는 데에도 썼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짐승을 죽일 때에도 그 생명과 영혼을 정성스레 모셨다는 뜻이다. 당파의 세 창 끝 길이가 서로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 한다. 지금처럼 순식간에 앞 골을 망치로 쳐서 갑자기 졸도시키고 난 뒤 온 몸을 절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과 영혼을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순식간에 짓밟는 마군(魔軍)짓에 불과하다.
모신다면 당당히 맞서 천천히 찔러야 하는 것이다. 찌를 때 당파창의 가운데 기인 창 끝이 먼저 폐와 심장 중심으로 모여 잇는 생명과 영혼의 기운 움직임의 핵을, 조금 피부로부터는 속으로 들어가 있는 바로 그 중단전(中丹田) 부위 즉 '강궁금궐(絳宮金闕)' 또는 '전중(膻中)'을 건드린다.
그러면 그 기운의 중심이 왼쪽 조금 아래쪽 그러니까 당파 창 쪽으로 보면 오른쪽으로 옮겨간다. 그것을 당파 오른쪽의 중간 창끝이 맞서 찌른다. 그러면 바로 그 영혼과 생명 기운의 중심이 그 짐승 몸의 오른쪽, 그러니까 당파 왼쪽의 가장 짧은 창 족으로 쏠린다. 그 때 당파의 가장 짧은 창이 그 중심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찔러 드디어 전체가 기운이 뒤집어지면서 천천히 숨을 멎게 한다.
왜? 왜 이리하는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든 생명 있는 것, 영혼 있는 것, 어쩌면 물질까지도 그 내부의 핵의 움직임은 이와 비슷할 터인데, 죽음에 가깝거나 초 비상사태에 돌입하면 그 움직임의 핵이 중심으로 모였다가 그 다음 먼저 왼쪽 극으로 이동하고 그것이 다시 오른쪽 극으로 중심 이동하는데 맞대응하는 '조용히 모시는 죽임'의 예절이었던 것이다.
생명과 영혼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한답시고 극약을 먹이거나 갑작스럽게 질식시키는 것은 생명과 영혼 안에 본디 함께 있는 이승만 알지 저승은 아예 모르는 것, 어쩌면 이승도 저승도 싸그리 알지 못하는 철저한 무식의 소치다.
당파는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길 닦음이다. 흰 배를 쭈욱 가르는 것이 다름 아닌 길 닦음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일종의 새하얀 수혼탑이다. 짐승의 넋도 사람과 한 가지로 죽음 뒤엔 기인 삼도천(三途川)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안락사(安樂死)'의 미명 아래 저지르는 독약이나 타격에 의한 돌발사는 자살과 마찬가지로 그 삼도천을 쉽게 건너지 못하게 하고 때론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허공을 울며불며 떠돌게 한다. 고통은 더 길어지고 돌아오는 길은 더 어두워진다. 당파는 그 때 참선(參禪)이다. 이변비중(離邊非中)이다.
좌우 양극단을 버리되 중간도 아닌 것. 전체적인 차원변화의 참 중도다. 중도(中道)가 참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면 당파는 생명과 평화의 길 나름으로 낡은 문명의 마지막 남은, 연대하거나 화해하거나 상생할 수 있는 그 이외에 도저히 방치할 수는 없는 온갖 사기와 짝퉁들, 그리고 살기(殺氣)와 적의(敵意)와 마군(魔軍)을 조용히 물러가게 하는 참다운 '모심의 선(侍禪)'이다.
그렇다고 당파가 찰스 다윈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이나 약탈이나 착취처럼 생명체를 살해하는 그저 그런 '죽임'인 것인가? 당파는 반드시 병든 짐승이나 늙어 저승을 보내야 할 인간 생명에 대해서만 한정해서 쓰였다고 한다.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다윈 생물학은 정당한가? 강한 짐승은 약한 짐승을 먹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변함없는 생명의 진화법칙인가? 그래서 적응이나 도태나 자연선택이 의심할 수 없는 황금율임에 변함이 없는 것인가?
그와 반대다. 다윈주의는 이미 뒤집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도 형태를 달리 하면서 의연히 지배적인 법칙인 양, 불멸의 질서인 양 행세한다. 약간의 예외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약육강식이 아니라 상부상조(相扶相助)가 생명 진화의 기본법칙임이 드러나고 있고 약육강식으로 관찰된 형상마저도 관찰 방식이나 관찰자의 생태 현장에의 개입 상태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이제는 지배적인 생명과 진화과학의 현장담론이 되었다.
매나 독수리가 양을 먹기 위해 공중에 날며 양떼를 뒤쫓는다 하자. 치밀하고 엄격한 장시간 관찰에 의하면 양에 대한 매의 포식 관계는 사실은 '청소부' 형식이었음이 드러났다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에리히 프롬'이 증언하고 있다.
또는 식물의 경우 흔히 관찰되듯, 종자가 아닌 여백에의 관여 형태로 '먹이 사슬'이 성립된다. 당파는 바로 이러한 경우에 등장하는 수단에 속한다. 만약 그것이 문명이라고 하자. 병들어 처치곤란한 상태의 문명이거나 그 문명의 지금 여기 잠재 상태에 있는 새로운 문화적 유동성에 대한 창조적 촉발의 한 형식에 연결된다고 하겠다.
낡은 문명의 마지막 남은 방치할 수 없는 온갖 사기와 짝퉁, 그리고 살기, 적의, 마군, 또는 그와 반대로 그것을 처치할 때 촉발되는 새로운 문화적 유동성의 개화(開化)에 대응하는 것이 다름 아닌 당파의 기능이라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당파는 근본적으로 '모심(侍)'인 것이다.
당파는 참선이며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고 했다. 그러나 참선에도 간화선(看話禪) 또는 조사선(祖師禪)이 있고 여래선(如來禪)이 있다. '모심의 선(侍禪)'은 간화선 중에도 간화선이며, 간화선의 추상적 화두(話頭)가 아닌 구체적으로 살아 생동하는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존재만 아니라 생각, 감정, 감각과 일체 움직임, 기미, 과거와 미래, 예감과 환락, 악마와 천사 같은 광적 현상마저도 일체 화두가 되는 선이니 어쩌면 여래선이면서 동시에 간화선이요 동시에 일체 진화 자체의 자각적 동력원이기도 하다.
동학은 우주와 인간 주역 천만년 진화 그것도 창조적 진화 전체, 그리고 이제부터의 우주와 인간, 삶과 앎과 영, 모든 것의 대개벽, 대화엄 실천의 기본 추진주체를 우선 '모심'에 두고 있다.
따라서 '모심선(侍禪)'의 한 실천 형식으로서의(물론 '모심'은 그 다음의 '살림'과 마지막의 '깨침' 그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 당파는 좌우 양쪽에의 대응 이전에 이미 막연한 형태로나마 그 '가운데 길'(좌우간의 '生克' 이후에 숨은 차원에서 드러난 차원으로 개시될 '復勝'의 내용) 즉 '중도(中道)'가 일단 현훈(眩暈, 아지랑이)이나 미망(迷妄, 환상)의 행태로 흔히 앞서 등장한다.
따라서 '이변비중'은 다분히 '비중이변((非中離邊)'의 형태로 진행되곤 한다. 좌우 양 극단과의 대결 이전에 스스로 중도를 자처하는 거짓 생명과 평화사상이나 거짓 새 문명 실천 운동과의 대결이나 논평, 처리가 먼저 필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변(離邊)의 대결적 긴장이 지나갈 때 다시금 다음 단계와 연결된 참된 중도의 새 차원이 나타나게도 된다. '모심'은 '화두'보다 더 강렬하게 '간화선'보다 훨씬 더 구체적, 생활적, 생명적이다. 따라서 어쩌면 원효, 의상, 의천(義天), 보조(普照) 이후 1700년 한국 불교사의 비원(悲願)인 '화엄선(華嚴禪)'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철저히 수많은 '우주수'가 스스로 우주수 그 무한 다수를 각개적으로 말고 동시에 그 앎을 계시 받은 참다운 '개벽선(開闢禪)'이기 때문이다. '이변' 이전에 '중(中)의 망상'부터 깨뜨리는 '비중(非中)'이 먼저 제기되는 것부터가 결코 심상치 않은 것이다. 즉 가장 위험한 유혹부터 먼저 맞부딪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개벽 운동은 모심으로부터 시작하고 있고 그 모심은 생명과 평화의 길로 구체화하고 있다. 촛불이 아마도 그 새로운 시대의 첫 모습일 것이다. 촛불의 생명과 평화의 길 몇 개월간에 이미 좌우 양쪽의 두 극단의 오류가 얼굴을 드러낸 바 있다. 이 기간, 그리고 이 기간 전후한 시기, 그리고 이전 기간의 숨은 차원에서 생명, 평화 신문명에 연관된 '중도의 망상'이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형태로 귀신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이미 좌우 양 극단의 징후들의 위험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 아마도 '수운시에서 배운다' 쯤에서 수운 선생의 '흥비가(興比歌)'를 들어 '비흥(比興)에서 흥비(興比)에로의 전환'에 의해 대응의 실마리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은 150년 전, 19세기 수운 선생 시대의 반(反)개벽적 역행(逆行)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복잡다단하고 미묘 망측한 역행이 '들끓고 쏠리고 끌린다.'
촛불들 용어로 하면 '댓글 알바'요, '프락치' 정도지만, 내 용어로는 '까쇠'인데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까쇠는 프랑스 말로 'Casseur',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복면을 쓰고 끼어들어 이렇게 저렇게 난장판을 만드는 자를 말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약간 비틀어 '까부수고(파괴) 까불고(난동) 까발리는(선동) 것을 본업으로 하는 쇠(마당쇠의 그 쇠)를 요약한 것이다.
이미 6월 10일부터 첫 촛불광장에 나타나 6월 29일에 절정이 이르른 좌우 양쪽의 '꾼'들, 그리고 6월 30일에서 7월 4일까지의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의 새 촛불 때 사과했다가 이후 다시 나타나 이번엔 형태를 약간 바꾸면서 최근까지 활약한 그 '맑스-촛불' 따위를 나는 까쇠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그런 좌파 '까쇠'들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리며 폭력적 진압 사유와 현 정부의 억터리 독단을 합리화시켜 세상을 제 멋대로 하려 드는 우파 집단 역시 나에겐 똑같은 '까쇠'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엔 그 '좌우 까쇠' 못지않게 생명과 평화의 중도를 내세우면서도 '촛불의 모심 개벽'을 흐트러뜨리는, 또 앞으로 보다 더 근본적으로 오도(誤導)하려고 기도하는, 보다 더 악질적인 중(中) 망상의 '중도까쇠'들이 심상치 않게 암약하고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나의 모심은 강렬하다. 나는 하등의 미움 없이, 미움이 있더라도 거의 동시에 우정을 함께 느끼면서 그 모심을 밀고 간다. 개벽은 뚜렷하고 아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어떤 이는 중도마저도 '아니다, 그렇다'(不然其然)의 대상으로 떠올림은 너무 이르고 개벽 전열을 흩어버리는 역작용의 우려가 있다고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흥비가'에서와 같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烏飛梨落)' 경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대 비극, 예컨대 머지않아 필연코 다가올 사회 대 변동과 겹치는 대 생태위기에 임해 악질적인 '에코파시즘'으로 둔갑할 조짐이 농후한 그 '중도까쇠'들을 비록 초기단계지만 날카롭게 경계하는 경각심(警覺心)의 환기는 지금 필요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이들과의 본격적인 맞대결이 머지않아 시작된다. 그렇다면 더욱 더 일찌감치 그 중(中)의 망상 영역에 붉은 점을 꼭 찍어둬야 하는 것이다. 내 주변 가까운 벗들이 우려하듯 큰 대동연대의 일은 그 다음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운데도 아니다(非中)
촛불의 예에서 보듯이 '생명과 평화'는 대유행이다. 입만 열면 그 소리요 프랭카드만 펼치면 그 글자들이다. 한국만 아니다. 전쟁이나 생태위기 등 문명 문제에 미국, 유럽 등처럼 민감한 나라들은 다 그렇다. 생명과 평화는 이제 영어로는 'eco peace'로, 라틴어로는 'pax vitae'로 정착되기까지 할 정도다.
이 유행을 타고, 좌우 양극단을 벗어나는 첫 제스처를 쓰면서 아니면 실제 중간 입장에서라도 사실은 그야말로 생명과 평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낡아빠진, 이기적인, 인간 중심주의적인 갈등과 투쟁과 장삿속만을 일삼는 집단들이 너무도 많다.
우선 이미 권태에 빠져버린 형식적인 환경운동이다. 환경(環境)이라는 말이 계속 살고 있는 한 환경문제 해결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언어로 사유하는 버릇이 있다. 사유는 판단의 기본이요 판단은 행동의 기본이다. 환경을 그 서구 언어와 똑같이 인간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죽은 물건들의 들러리나 무대 장치쯤으로 생각하는 관행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런 틀려먹은 사고나 판단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전통 풍수학 공부를 그리 권하는데도 마이동풍(馬耳東風). 유럽이나 미국 쪽 짝퉁만 계속이다. 언어와 사상, 개념을 바꾸는 문화운동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환경운동연합은 새만금에서 쓴 맛을 보고 나서도 근본적 대응을 기피하고 천성산 문제에서 또 다시 법에 호소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대법원은 개발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왈, '천성산 도롱뇽은 소송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현직 판사를 욕할 일이 아니다. 현 실정법은 철저한 휴머니즘에 입각한 근대 법제다. 철학적으로 그것은 '사회계약'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 곳엔 자연생명의 권익 같은 것은 없다. 유럽에서는 미셸 셰르의 '생명계약'론 제기와 함께 약간의 법개정 물결이 일어났었다.
서구와는 달리 동아시아 철학은 자연의 조리(條理)와 인간의 윤리(倫理) 사이의 일치가 그 기본이다. 바로 이에 근거하여 사회적 공공성과 생태적 공공성 사이를 결합하는 '우주사회적 공공성' 개념을 세우고 이에 따라 '도롱뇽은 현상적으로는 소송할 수 없으나 도롱뇽을 인간과 똑같은 우주공동주체로 높이 모시는 인간이 그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소송을 대행할 수 있다' 쪽으로 실정법을 개혁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먼저 법철학 논쟁이 치열하게 제기되어야 하고 그와 함께 한국만 아니라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생명철학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나야 한다. 환경연합 등은 바로 이 일에 팔을 걷어야 할 것 아닌가! 이미 끊임없이 충고해 왔음에도 '어느 집 개가 짖나?'의 정도다. 그 지경에도 '그린피스 짝퉁'으로 일본인 등과 함께 '피스보트' 여행이나 하며 호화판 팜플렛에 의상 디자이너의 사치스런 색채론이나 귀족적 모델관 따위나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동아시아와 한민족 전통의 심오하고 광활한 생명 사상, 예컨대 풍수지리학은 몰라도 좋다고 하자. 그들이 숭배하고 몸살을 내는 서구 생태학자 왈,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을 막론하고 모든 존재를 우주공동주체로 높이 모시는 문화와 생활양식의 대변혁 없이는 지구 생태대혼돈은 못 넘어선다'는 말 따위가 들리지 않고,
이미 독일 생태학과 녹색당이 파산했다고, 희망은 동아시아의 불교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근본적 생명운동뿐이라 확언하고 있는 유럽 전문 생태학자 자신의 발언들이 도무지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그대들은 뭐하는 사람인가?' 뭘 하면서 숱한 기업들에서는 거액의 현금이나 계속 받아 챙겨 호화판 사무실에서 거들먹거리는 거냐?
필사적인 문제였던 대운하 토목 공사를 중지시킨 것도 불교의 스님들과 촛불의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여성들이었지 그대들은 결코 아니었다. 또 묻는다. 그대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가?
'환경'
'친환경'
'환경 프렌들리'
이 따위 가짜 말들만 수십 년 간 퍼뜨리고 자빠졌는 그대들은 참으로 뭐하는 사람인가?
지금 촛불들의 최대 관심은 값싸고 질 좋은 유기농산물, 해산물, 한우고기를 생산자와의 직거래 네트워크로 지속적 공급을 받을 수 있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문제로 되는 것이 질이다. 화학 비료, 바다 수질오염, 동물사료 먹이기 등이다. 여기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항구적으로 개입하는 생명 운동의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여기 개입할 수 있는가? 사람의 생명이 가장 큰 문제 아닌가?
인간 생명 중심으로 곡식, 채소의 생명, 바다의 고기와 뻘의 어패류, 해조류, 소와 닭과 돼지, 오리의 생명을 감시하는 운동을 통해 거듭날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흙도 물도 환경이 아닌 생명임을 자각하게 될 터이다. 생태학과 풍수학의 결합, 더 나아가 후천개벽공부를 통해 문명변혁운동으로, 그리하여 한국과 동아시아 환경운동은 생명평화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
요즘 청정 농산물, 유기 농산물은 대인기다. '웰빙' 바람을 타고 중산층 고급 소비자 상대의 온갖 농산물 유통 산업은 이미 거대기업 수준이다. 그들이 천억 이상씩 매출을 올리면서도 아직도 생명운동, 대중생활 운동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것을 나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작은 아이가 심한 아토피로 고생한다고 그 대안식품인 청정 농산물 가격을 도대체 언제 내릴 거냐고 울면서 묻고 또 묻는 젊은 가난한 엄마에게 생명운동을 표방한 유기농 공동체의 대표가 가라사대,
'시장이 내리면 우리도 내린다.'
말이냐? 막걸리냐?
이런 판에 차라리 생명 기업이나 유기농 기업 간판을 내걸고 정직하게 기업행위를 하는 게 도리어 도덕적인 결단 아닐까?
묻는다. 왜 그러는 거냐? 위선자에 도적 심보가 아니라면 무슨 까닭이 있을 수 있느냐? 그들이 내건 공동체도 생활협동도 이젠 다 끝났다. 좌우를 넘어선 중도적 생명운동이었던 '몬드라곤 ', '기브츠', '야마기시'도 다 물 건너갔다. 도리어 개체성, 개체성 사이의 분권적 융합, 계열중심의 호혜, 내부공생(內部共生) 등을 내걸었던 '모샤브' 만이 살아남았다.
시절은 변했다.
네오 르네상스와 전 세계 문화대혁명, 그리고 인류문명사 전체의 근본적 대전환이 오고 있고 그 전초전으로 모샤브의 예감에 잇닿아있는 우리들 전통의 계(契)나 품앗이와 같은 것, 동학 문자로 각지불이(各知不移), 현대진화론의 개체-융합(identity-fusion) 또는 내부공생(endosymbiosis)과 같은 방향으로 생명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계나 품앗이 같은 개체융합과 내부공생이 곧 경제적 호혜다. 일본 생협은 아시아 민중과 함께 바로 이 운동을 시작한다. 호혜시장이 그것이다. 우리의 옛 생명경제인 신시(神市)다.
혹시 여기에 합류할 용의는 있는가? 그 방향밖에 다른 길이 없을 터인데….
그러나 나는 안다. 그대들은 이미 물 건너갔다.
배에 비계가 너무 끼어서 그런 것을 못 한다. 한다면 그것이 곧 개벽(開闢)이다.
그러나 모심 없이 개벽은 어림없다.
'시장이 내리면 우리도 내린다'는 말 한마디는 , 그 아픈 생명에 대한 모심 위에 재를 뿌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정직하게 생명 장사로 나서라. 그래야 진짜 생명운동이 호혜시장의 방향에서 본격화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요즘의 생명평화운동은 하도 여러 종류라 그 정체도 갈래도 잘 알아보기가 어렵다. 사기꾼, 거짓말쟁이, 허황한 도사, 짝퉁들, 정치꾼, 기회주의자, 야심가, 넋 나간 쓰레기들, 그 중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알짜들이 여기저기 보이긴 보인다. 요컨대 그 자체가 이미 중(中)이다.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므로 중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 또한 있다.
새로운 참된 방향이 나타날 때는 그 스스로 정화되고 대오를 갖출 터이지만 지금으로선 그 가능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 힘들다.
다만 촛불, 4월 말에서 5월 초의 첫 촛불과 6월 말에서 7월 초의 새 촛불의 그 생명운동과 새 문명창조운동에서의 큰 의미에 착안하는 사람들만이 바로 새로운 대오와 방향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촛불로부터 모심의 상징성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참다운 개벽꾼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 직후 수많은 문예지들이 생명시학, 생명문학의 의미를 다시금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선림(禪林)은 곧 퇴색되고 또 여전히 별 대수롭지도 못한 유럽 엉터리 예술의 짝퉁(부끄러움도 없다. 민족문학은 끝났으니 세계문학이라면서 그 따위 짝퉁이 바로 정통이라는 조다. 시와 문학이 모국어를 통한 창조적 세계 개진임을 아예 깡그리 잊은 얼굴들이다. 아주 살판난 듯 돈도 안 생기는 아날로그 구닥다리 타령에 약간의 디지털이나 그로테스크, 섹스, 죽음, 외계 언어나 스님들 흉내를 섞어놓은 째진 나팔소리뿐이다.)이 유행인데 2만 명이 넘는 시인, 수십만 명이 넘는 문학관계 인구가 머지않아 아마도 '금방' 또 다시 생명·평화 타령으로 다시금 상승하고 긴장할 것이다. 후천개벽 바람에 콘텐츠 중심의 포스트 한류, 불교의 거대한 행보, 우주 변동과 유럽 생태주의의 대 후퇴에 따른 동아시아 생명평화운동에 대한 세계인의 시선 등은 바로 그러한 물결을 반드시 또, 그리고 또 다시 만들 것이다.
2년 뒤의 지방자치제 선거는 분명 생활자치의 조류를 만든다. 생명평화의 문화정치는 서울 등 대도시보다 지역에서 강하게 불어올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열풍을 타고 마당굿이 다시금 큰 유행을 볼 것이다. 촛불은 마당에서 다시 치열하게 예술적으로 타오를 것이다. 촛불 문화제는 어쩌면 마당굿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화혁명으로 번질 확률이 높다.
바로 그때 중도짝퉁도 기세를 올릴 것이고 바로 그때 중도짝퉁비판도 그 차원을 바꾸며 그것을 제압하고 정화할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 짝퉁인 MB독재가 도리어 이 모든 전환에 역행보살(逆行菩薩) 노릇을 할 것이다. 바로 그때 사상전선은 어떠할 것인가?
몇 개월 전부터 프랑스에는 그동안 완전히 가라앉아있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 유행바람이 불고 있다. 그것은 먼저 최근 유럽과 서방을 강타하고 있는 창조적 진화론 찬반논쟁에 연루된 것 같다.
떼이야르는 찰스 다윈 이후 엄청나게 확산된 진화론과 신화나 미신상태로 코너에 밀린 창조론을 결합한 큰 공로가 있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의 창조론과 서구 근대과학의 진화론을 탁월한 차원에서 통합하지 못하면 유럽문명은 그야말로 끝장이다.
벌써부터 일체의 포스트모던 모험의 의미를 격하시키며 혼란스러운 세계의 실상에는 등을 돌린 채 객관적 관념론 따위 헤겔, 칸트 등의 굳어서 이미 쓸모없는 철학체계와 뉴턴, 데카르트를 전후한 우주적 수리과학(數理科學)으로 고집스럽게 혼돈한 현실을 설명하려는 그야말로 보수반동(이것은 르네상스 정신과는 하등 인연이 없다.)이 서서히 압도하고 있다. 유럽은 자기네의 아날로그 전통에 너무 자만한 나머지 디지털 네트워킹조차 소홀히 한다. 미국과는 뚜렷이 분별해야 한다.
떼이야르의 유행적 복권은 일면 타당한 점이 있다.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 양쪽의 날카로운 상호 모순을 생명현상의 과학적 탐구를 통해 상호 연속시킨 큰 공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연속성이 창조와 진화의 연결고리다.
관념론과 유물론, 위로부터의 기제와 아래로부터의 기제, 존재나 삶의 내면과 외면, 영성과 생태학,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에서 유럽 나름으로 그 통합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이것은 일단 유럽만 아니라 전 인류 사상사에도 큰 축복이었다.
1860년에 신의 계시에 의해 크게 깨달은 수운 최제우 선생의 진리의 핵심인 '모심(侍)' 사상의 시작도 바로 이 같은 창조적 진화론이었다. 그것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1859년 바로 다음 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니 더욱 기이하고 의미심장하다.
유럽의 새 문명사 비전의 핵심에 바로 이 같은 사상이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의식-복잡화(Consciousness-Complexity)' 이론이라고 부르는 이 떼이야리즘은 바로 그 다음 단계에서 여지없이 망상과 오류를 범하고 만다. 역시 유럽의 낡은 관념론 및 신학과 역시 낡아빠진 생명생태생물학·물리학의 한계, 그리고 그들의 세계지배에의 망상적 야심과 턱없는 우월감 탓이다.
떼이야르는 진화법칙의 첫째와 둘째 단계인 의식-복잡화 원칙 다음의 세 번째에서 '집체는 개별화한다(Union differentiates)'는 그야말로 거대한 망상을 과학의 이름 아래 주장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사랑이 가진 거대한 전체적 조직력에 의해 전 인류, 전 세계, 전 우주가 집체화하는 과정에서 차츰 개체들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진화원리다.
생명발생사(Genesis)에서도 개체가 아닌 집체, 종(種) 전체가 필연적으로(!)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 우연성, 돌연변이, 다양성, 자유 등의 우발적인 종속 메커니즘에 의해 개체성이 비로소 부분적으로 나타난다는 저 다위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진화론이다.
떼이야르는 바로 이 진화론으로 당시 맹위를 떨치던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의 악랄한 전체주의에 커다란 면죄부(免罪符)를 준 것이다.
독일 개신교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가 창조적 진화론의 전제조건으로서 신약성서의 초점 중 하나인 산상수훈 중 네페쉬 하야(저주받은 자)의 텅 빈 마음, 생명 진화의 우발성, 혼돈성, 개별성, 창의력 등을 요구하고 있음에 대비하여 프랑스나 카톨릭 사학 일부가 그 대신으로 진화의 기획자 즉, '디자이너'로서의 신을 강조하면서 떼이야르 유행이 다시 불붙고 전체주의 신학의 망령, 즉 '에코파시즘'이 머리를 든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이 있을 수 있는가?
생명 진화의 기획자, 디자이너로서의 신의 과학적 발상은 그리 엉뚱하거나 신기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현대 자유의 진화론에서 강조하는 자기조직화(self organization) 원리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 판넨베르크 명제에서 강조되고 있는 신의 내포(內包)에 있다.
그 내포가 '비어 있음'과 '혼돈적 질서'인가 아니면 이러저러한(마치 뉴턴이 꿈꾼 것처럼) 절대적 세계 질서의 로드맵이나 토마스 아퀴나스가(이전 꿈이 아니라 명백한 확신으로) 주장한 계층구조(hierarchy)론 따위라면 한 마디로 '어림없다'.
이 '어림없다'란 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한 때 내가 동학과 화엄사상, 그리고 현대 자유의 진화론의 '개체-융합'의 '자기조직화' 사상을 현실적으로 개진한, 조금 소박한 대담 형식의 '생명학(또는 생명과 자치)'에 대해 저 '온생명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장회익 씨가 뱉어낸 악담이었기 때문이다.
떼이야르와 장회익 씨 같은 구닥다리 기독교, 그리고 오늘 68문화혁명과 포스트모던 사상모험 이후 유럽이 빠져들고 있는 에코파시즘에 대해 무수한 젊은이들과 여성들, 소수 민족들, 짐승과 나무와 풀들, 물·흙·쇠·공기·바람과 햇빛이 뱉어내는 악담과 똑같이 때문이다.
'어림없다'.
이들이 주장하는, 그것도 서슴없이 자랑하는 바로 그 전체주의와 집체적 조직화의 진리가 현대문명과 현실 생명의 생활적 감각에 구체적으로 통용되는 진리일 것인가?
공동체도 협동운동도 다 끝났다.
방콕과 밀실들의 그들만의, 그들 나름나름의 네트워킹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이 세계에 버틸 수가 없다.
농업 정착의 정태적 우주관만으로는 그들의 대혼돈에 대답 못 한다. 그렇다고 '노마디즘', 유목 이동의 역동적 블랙홀 논리로 모든 것이 다 해명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꽉 찬 기획의지나 디자인 로드맵으로도 그 무슨 절대적 통섭력(Consilence)이나 온 생명의 위대한 중추신경계의 통제력 따위 망상으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 가장 웅변적인 증거가 촛불이다.
지도자도 조직도 동원체제도 없이 끝없이 수없이, 각기 직업도 기질도 취향도 다른 수많은 네티즌들의 끝없는 쌍방향 소통과 끊임없이 불꽃튀는 논쟁들을 통해 도달한 어떤 잠정적 합의로 형성된 집단지성에 의해 광장의 그 시끄러운 직접민주주의, 화백, 그 개별성, 우발성, 자발성, 복잡성, 천태만상의 차이와 창의력, 영성적 숙의(熟議) 과정에서, 그것도 춤과 노래, 유머와 미소, 사랑과 우정의 표현들로 가득 찬 축제의 문화 속에서 새 차원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그 화백(和白), 그 풍류(風流), 그리고 나중에는 신시(神市)의 가능성까지도 나타난 그 촛불이라는 이름의 일대 영적인 생명현상을 과연 떼이야르가 설명할 수 있는가? 장회익? '어림없다'.
역시 이 한마디다.
떼이야르의 장단점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것이 유럽에서 정당하게 평가되기를 바란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동학이 떼이야르의 초기 창조적 진화사상의 기본 테마 '의식-복잡성'을 '신령-기화(神靈-氣化)'로 표현했다고 이미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제3의 테마인 '집체는 개별화한다'를 거꾸로 '융합을 각자각자가 제 나름대로 인식한다(各知不移)'로 표현한다고 했다. 현대 자유 진화론의 '개체-융합'의 원리에 가깝다고도 했다. 또 불교 최고 최대의 경전 <화엄경>의 '달이 천 갈래 강물에 다다른 모습으로 비침(月印千江)'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연초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거기서 만난 여러 신학자들이 동학 공부를, 바로 지금 이야기한 바로 그 '각지불이'를 말하는 것을 보고 크리스토퍼 도우슨이 '세계사에서 르네상스 이후 최고최대 사건은 16세기 마테오 리치의 베이징 상륙이다'라고 한 말을 큰 감동 속에서 기억해냈다. 왜냐면 마테오 리치의 소망은 바로 오늘 이 신학자들의 공부와 똑같은 맥락이겠기에 말이다.
역시 예수회는 무섭다. 떼이야르의 처음 두 테마의 위대성과 함께.
그러므로 예수회가 이제 예수회에게 대답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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