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영애, 책 읽는 여배우에 대한 단상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이영애, 책 읽는 여배우에 대한 단상

[김상수 칼럼]가상과 현실에서

26일 오랜만에 낮술을 좀 마셨다. 만 7년간 살았던 북한산 자락 내 살던 동네에 오랜만에 약속이 있어서 갔다. 화가 임옥상의 최근작인 부처를 보러갔다.

이년 만에 화가를 만나니 못 보던 사이에 부처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 글자인 한글을 철판에 새겨 그 글자를 조각으로 끊어서 하나하나 이어 붙여 불상(佛像)을 만들고 있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인가? 쇠로 만들었지만 무겁거나 둔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가는 선의 부드러움이 쇠의 물성(物性)을 잘 다루었다. 임옥상이 만든 부처는 겸손함이 묻어 나왔다. 문득 왜 임옥상은 부처를 만들고 있지? 혹시 부처를 만났나? 새로 탈각한 중(僧)하고 친구라도 됐나? 같이 차를 마셨다. 조만간 화가 임옥상에 대해 글을 쓸 것 같다. 화가의 차로 산기슭 가나아트센터 카페로 좀 데려 달라고 했다. 혼자서 낮술을 마시고 싶었다.

햇살과 바람이 산산했다. 근처 지인 몇 분들과 같이 마시다가 한 두어 시간 쯤 지나서부터는 혼자 마셨다. 그리고 걸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역 밖에 세워뒀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켰다. 답답한 뉴스들이 지나갔다. 뉴스가 끝나자 '나는 이영애다'라는 제목으로 MBC 스페셜이 방송됐다. 봤다. 오랜만이다. 이영애를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반가웠다. 어떻게 지낼까? 만난지 꽤나 오래됐다.

방송에서 이영애가 말하기를, 수년전에 광고모델로 카드회사 광고를 찍었는데, 카드 빚을 못 갚고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 보고는 카드 광고 모델은 안하기로 했단다. 죄스러움도 느꼈다고 했다.

나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한 때 텔레비전 드라마를 썼기 때문일까. 20대 중후반인 85년에서 89년 사이, 간간이 텔레비전 드라마 작업을 한 적이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에서 난 텔레비전 드라마를 소홀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한동안 진지하게 관여했던 것 같다. 이 진지함이 도리어 텔레비전 드라마 작업에서 점점 멀어졌고, 이후 드라마도 안 보고 이영애가 그간 무슨 드라마에 나왔는지도 잘 모른다. 몇 년 전에 서울에 있을 때 리모콘을 돌리다가 대장금(大長今)이란 드라마를 잠깐 봤다. 이영애가 나왔다. 사극으로는 기획이 참신하고 돋보였다. 맨날 지지고 볶는 그 궁중사극이란 상투성을 벗어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이영애가 반가웠다. 연기가 좋았다.

어쨌든 나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지 오래됐다. 15년 정도 못 봤고 안 봤다. 배우 이름도 잘 모른다. 요즘 자주 떠들고 보이는 누구누구 연예인 이름자가 뭐하는 누구 이름인지 잘 모른다. 텔레비전에 넘치는 몸과 말의 비틀기는 도를 넘어 모욕적이다. 토, 일요일은 저녁 시간대가 개그 프로그램으로 꽉 찬다. 온통 뒤틀려도 한 참 틀렸다.

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면서 짓까불고 저질스런 짓거리를 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드라마라고 막 찍어대는 걸 경멸했고 한국 방송 드라마나 영화를 안 보는 게 아마 그런 편견 때문이리라.

내가 관여했던 마지막 텔레비전 드라마가 만 서른 살 때인 1989년이니 세월 참 빠르다. '서러운 땅'이란 제목의 드라마였다. 한 시인이 시대와 불화(不和)를 겪다가 죽는 얘기다. 그 이후부터 텔레비전 일을 그만뒀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국 현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혼자서 부대꼈다. 그 이전 시기에 군사독재시대의 검열도 문제였지만 알아서 기는 방송국 간부들, 전두환을 선전해주고 체제옹호 드라마나 찍던 PD가 시대가 바뀌자 '5. 18광주' 얘기를 찍었다. 독재 권력에 아양을 떨던 PD가 광주항쟁을 만화처럼 찍어 하루아침에 조선일보에선가 한국을 이끄는 100인에 선정되고 민주투사 PD가 됐다.

미친 건가? 시대가 바뀌면 뭔가 정리를 좀 해야지. 너무 뒤죽박죽이고 뻔뻔해 보였다. 전두환 때 '땡전뉴스'를 읽으면서 "전두환 각하는" 어쩌고저쩌고 하던 이들도 이후 국회의원을 하고 낙하산으로 방송사 사장까지 하겠다고 설쳐 어지럽다. 난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국 체제가 그때 그 현실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1989년을 끝으로 드라마는 안했고 93년 무렵까지 다큐멘타리 작업을 했다. 이후 방송작업은 안 했다.

얘기가 좀 샜다. 이영애, 벌써 15년이 지났다. 영애가 당시 스물 둘이나 셋쯤. 잘 기억을 못 하겠다. 영애가 지금 몇 살인지도.
▲ 1993년 김상수 작, 연출. 배우 이영애,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김상수

1993년에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개관기념공연으로 내가 쓰고 연출한 <짜장면>이란 연극을 영애와 같이 했다. 5.18 광주가 배경인 극이었다. 그 때 이미 그녀는 '산소 같은 여자'로 많이 알려져 있었다. 지금 기억에, 어느 날 같이 지하철을 탄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중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지하철 안에서 '어머!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다!' 하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옆에 섰던 나는, 내 옆에 서있는 이영애가 이렇게 유명하구나' 하고 비로소 알게 됐다.

같이 작업을 한 여배우 중에서 이영애는 기억에 남는 배우다. 그녀는 그 누구, 어떤 배우보다 성실했다. 93년 당시 '짜장면'이란 연극을 연습하고 공연을 할 때 같이 일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영애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어른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분장실 분장 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분장을 하던 기억이 나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왜죠? 왜 그렇죠?'하고 나에게 질문을 하고, 세상사에 주의 깊은 그녀의 표정도 생각난다. 당시 그 연극에 출연배우들 중에서 가장 '스타'였다. 당시에 작업 태도가 단정하고 몸놀림이 깔끔했으며 작품을 분석하고 집중하는 배우로의 능력이 돋보였다. 연습시간때면 항상 일찍 왔고 열중해서 작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도 기억이 난다. 겸손한 인품과 따뜻한 표정의 아버지. 그녀가 연습을 마치는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장 밖에서 딸을 기다리던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시를 쓰시던 시인이었다고 영애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이영애에게 적은 출연료와 선물로 주었던 모나미 만년필도 기억이 난다. 시를 쓰시던 아버님께 만년필을 갖다 드리라고 했다.

작년인가, 우연히 안젤리나 줄리의 인터뷰를 CNN 래리킹 쇼에서 봤다. 파키스탄 원리주의자에게 납치된 기자와 그를 구하려는 아내의 이야기로 <월 스트리트 저널> 리포터인 '대니얼 펄'의 아내 '마리안 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에 출연한 촬영 전후의 이야기와 그녀 주변의 사정들을 래리 킹과 인터뷰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 인터뷰에서 난 서른 두살의 여배우가 세계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균형감을 지니고 자기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을 처음 봤다. 무엇 때문에 세상이 전쟁을 하며, 인간들이 인간을 서로 증오하고 다치고 죽이며, 그 근원이 어디에 무엇 때문인지를 알아듣기 쉬운 말로 명확하게 얘기하는 여배우를 처음 봤다. 그녀의 얘기는 충분히 사려 깊고 총명했다. 문명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인간이 과연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예민하게 지적하는 그녀에게서 난 한 사람의 '지성'을 느꼈다.

내가 그녀 이름이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연기나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를 어떤 여배우한테서 가로챘느니 마니 하는 가십기사보다는 캄보디아나 베트남 고아원에서 아이를 입양하고, 막막한 내전의 아프리카를 찾아 헌신적인 반전 캠폐인에 앞장 서고, 전쟁에 버려진 아이를 입양하고, 유엔에서 전쟁과 기아의 문제를 주제로 연설을 하고, 사람들의 동참을 끌어내는 열정에 찬 모습이 '잠깐의 쇼'로 비쳐지는 게 아니라, 지속적이면서 진정성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텔레비전 작업이나 연극 작업을 통해 여배우와 작업을 할 때마다, 그 여배우들에게서 나는 단순히 연기만 잘하는 배우 이상의 당당한 인격과 세상을 향한 역할을 기대하곤 했다. 너무 지나친 기댄가?

내 기대가 지나친 것인지 아니면 그런 풍토나 처지가 아닌지, 난 잘 만나지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던 내 능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나 자산을 자기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는 여배우를 만나기란 어려웠다.

1993년에 만난 이영애가 당시에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다. 그 시절에 역사에 대한 얘기를 나는 그녀에게 건냈던 기억이 난다. 26일 밤에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이영애가 큰 책방에서 책을 고르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역사 공부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15년 전 같이 작업할 때, 연기에 파고드는 그녀의 열정과 틈날 때 마다 꼭 책을 읽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때 책 읽던 영애의 모습은 쑥쑥 자라는 깨끗한 식물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 솔직하고 담백했다.

연기를 하는 여배우의 사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는 오늘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광고가 보여주고 약속하는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이영애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연기란 실재가 아님도 잘 안다. 가상이고 인간의 본질을 그리는 예술이다. 가상이지만 동시에 리얼리티다. 그러나 세상에 불 밝힌 '촛불'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실이다. 이영애는 가상과 현실의 어디쯤에 있을까? 이영애도 이젠 서른 후반인가? 곱다. 허나 세월은 참 빠르다.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