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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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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철학자의 서재]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시장과 진보의 불행한 종말

책을 두 번 읽었다. 처음 접했을 때는 황당했다. 숲속 오지에서의 '자급적' 삶, 노동과 고행, 기독교 근본주의, 아나키스트, 납세 거부, 현대의학 거부, 창조설 옹호, 시장과 '가격'(거래) 거부 등. 무슨 이야길 하려는 건가. 조금 이상한 사람 아닌가. 하지만 그 충격으로 무언가 찜찜한 것이 남았고, 결국 다시 책을 들게 되었다.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학교 복지, 과학과 합리적 사고, 지속가능한 발전. 이는 현대 지성의 키워드요, 당연한 요청이다. 그런데 호이나키는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반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요소를 고발하며 홀로 외로이 '아니오!'라고 외친다. 더구나 시장과 화폐, 전기와 비행기, 진보와 연대 등 보통 사람이 당연시 하는 온갖 '근대적' 산물, 이념, 제도와 편의를 거부한다.

신부와 교수의 경력도 던져버리고, 깊은 오지에서 '자족적' 농부로, 또 대학 식당의 '행복한' 청소부로, '길'을 찾는 순례자처럼 평생을 방랑한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라는 책의 제목이 곧 그 자신의 모습이다. 책을 읽다 보면, 영화 <위트니스>에 등장하는 아미쉬 공동체, 혹은 선가(禪家)의 청빈한 삶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나'를 찾으라 한다. 미국의 불의와 문명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서도 먼저 가족, 나라, 신에 대한 충성(pietas), 그리고 덕(virtue)의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충성과 덕의 실천은 '육체 노동'과 절약, 자족적 농촌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학과 진보, 제도와 국가, 효율성과 시장 등 근대가 만든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요 환상이며, 오히려 빈곤과 부채, 억압과 불행, 전쟁과 제국주의를 낳을 뿐이다. 우리는 '외로운 거부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호이나키는 기독교 아나키스트인 셈이다.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세상이 달라지냐고? 그는 "숲속의 생활"을 외치던 소로(H. D. Thoreau), 가톨릭노동운동의 선구자 헤나시(A. Hennacy)의 입을 빌어 선문답처럼 답한다. "맞아요! 하지만 세상의 불의가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합니다." 그는 국가의 불의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여 세금 납부도 거부한다. 악마적 시장 논리를 거부코자 자기 집을 시장 가격의 3분의 1에 내 준다. 학교도 병원도 복지도 심지어 장애인 시설도 신실한 삶에 독이 되고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파괴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말, 서구사회에는 베트남 전쟁과 미국 제국주의, 국가와 시장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 폭발한다. 대항문화(counter-culture)와 '대안적 삶'이 유행처럼 번진다.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이 뉴레프트 학생 운동의 자극제가 되고, 다른 한편에선 히피와 마약, 신비주의와 '뉴에이지'가 확산된다. 동양적 지혜와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도 이때부터 이루어진다. 호이나키의 고뇌는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는 이들 중 어느 것도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후에 등장한 "지속가능한 발전" 구상도 시장과 권력에 '타협'이라고 하여 이데올로기로 간주한다.

나를 바꾸는 삶!
▲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윤구병을 떠올렸다. 대학에서 고전철학을 가르치던 윤구병은 어느 날 교수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간다. 도시에서 버림받은 아이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며 공부도 하는 공동체를 꾸린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는 정성껏 일군 유기농 채소로 만든 밥을 '가격' 없이 제공한다. '형편에 따라' 돈 내는 식당을 연 것이다. 그에게는 꿈나무 어린이를 위한 희망의 책들을 내 올린 수익이 있었다. 하지만 윤구병은 이 수익 역시 '공금'이라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업에 쓴다.

세속에 물든 나로서는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형님"이다. 그의 친형(윤팔병)은 넝마를 수집하는 사람이다. 어렵게 1000만 원을 모은 어느 날 그는 그 돈을 어려운 북한 어린이 돕기에 쓰라고 이름 없이 신문사에 기탁한다. 본래는 전세금에 보태기로 아내와 약속한 돈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아내에게 대신 줄 장미 몇 송이를 들고, 술 힘을 빌려 집으로 갔단다. 잡지에서 본 그 기사 말미에 윤팔병이 말한다. "동생이 하나 있는데, 뭘 좀 한다고 애는 쓰는데, 먹물을 먹은 놈이라 아직 멀었어요."

그 윤구병은 오래 사귄 선배다. 게다가 그가 농사 짓는 변산은 나의 집에서 가깝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 진담 같은 농담(?) 때문에 나는 그 주변에서 그가 빚은 술만 먹었을 뿐 아직도 그 공동체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여기 오려면, 적어도 셋은 같이 와야 해, 또 최소한 사흘 이상 일 해야 하고. 그거 싫으면 오지 마!"

윤구병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호이나키를 본다. "나(호이나키)는 현대 사회의 실패자들이 겪는 매일 매일의 어려움에 동참하도록 도로시 데이를 이끌고 간 가없는 사랑의 불에 대하여 생각하고,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이 개척한 삶에 소박한 매력을 느끼며 (…) 현대 세계가 던져주는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웬델 베리의 비전이 반박할 수없는 논리라는 것을 느꼈다."

호이나키는 미국 일리노이 주 링컨의 시골에서 1928년 태어난다. 어린 시절 육체노동과 공작 일만 하던 할아버지의 삶, 반나절 우체부로 일하고 오후에는 말없이 농사만 짓던 아버지의 삶, 문명과 기술로부터 격리된 '초라한' 집안 분위기 등에 반발, 가출을 꿈꾼다. "해병대에 들어와 세계를 보라"는 광고에 현혹, 1946년 집을 떠나 미군으로 중국에 근무한다.

제대 군인에게 주는 혜택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린 시절의 자급적 농촌 공동체 삶에 대해 다시금 동경의 마음을 품고, 그 시절 부끄러워했던 농부차림의 아버지의 모습을 사모하게 된다. 1951년 도미니크회 수도회에 입단, 이후 15년간 수도사 생활을 한다. 1959년에는 뉴욕 맨해튼 빈민구역에서 사목활동을 하는데, 이때를 전후해 많은 정신적 지도자들을 만난다. 그 중 한명이 1930년대부터 피터 모린과 함께 미국 가톨릭노동자운동을 전개해온 도로시 데이(1897~1980)다.

데이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운동은 국가의 힘에 맞선 아나키스트적 비협력주의,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평화주의,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실천하는 운동이다. 또 호이나키가 목격한 1950년대에는 주로 뉴욕의 부랑자들에게 수프를 끓여주는 일을 했다. 일견 소박해 보이는 실천인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목표로 했다.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움직이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코울즈의 지적에 대해 데이는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작은 공간'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답한다.

호이나키는 데이의 이런 삶에 감명을 받는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소비주의에 맞서 가난을 택했고, 기술주의적 추상화에 맞서서 이웃과의 친밀한 사귐을 택하고, 풍요와 성공을 구가하는 사회에 맞서서 남루한, 멸시당하는 자들 곁에 서있기를 택하였다."

길은 낮고 천한 곳에!

호이나키의 삶은 때로 종잡을 수 없다. 1960년대 초에는 남미 연구를 위해 푸에르토리코, 칠레, 멕시코 등을 여행하고, 1967년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대학(LA)에서 정치학을 공부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미국의 불의와 무질서에 분노하게 되고, 항의 표시로 가족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망명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망명의 비겁함에 대해 자책하게 되고, 또 충성(pietas) 구현을 결심하면서 다시 귀국, 일리노이의 실험대학 생거먼(Sangaman) 대학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접한 몇 권의 책 역시 호이나키에게 감동을 준다.

그 중 하나가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인데, 호이나키는 이들의 삶을 통해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소비를 삼가며, 실제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자립의 덕행"을 배운다. 그리고 웬델 베리(1934~)의 책 <미국의 붕괴>를 통해서는 자급적 농업 공동체야말로 인간적 사회의의 유일한 가능성이란 확신을 하게 된다. 웬델은 아미쉬 공동체를 완전한 의미의 공동체로 간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몬느 베이유의 <뿌리를 찾아서>도 호이나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베이유는 파시즘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 1932년 독일로 갔고, 1934년에는 노동자의 세계를 몸소 알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갔고, 1941년 농장 노동자의 피로(疲勞)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치기 위해서 포도밭의 일꾼이 되었다." 결국 호이나키는 베이유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다시 대학을 떠난다.

그로 하여금 대학을 떠나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교수노조 활동에 대한 환멸이었다. 생거먼 대학 옆에는 마더 존스(1837~1930)의 무덤이 있었다. 노동운동, 공동체 운동에 헌신했던 존스를 생각하며 호이나키는 노조 활동에 대해 수치심마저 느낀다. "사회에 의해 버려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고액의 급료와 특권이 보장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인간적 삶의 구현에 대학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제 그가 택하는 것은 일리노이 농촌에서의 농부 생활이다.

그 후 농사 일 내내 그를 사로잡은 정신은 중세 수도원의 기도와 노동, 그리고 절약과 '땅'(육체노동)이었다. 그리고 가족, 교회, 근면, 나눔과 베품이었다. 그러던 중, '약간의 생활고' 해결을 위해 인근 대학에 '부엌일꾼'으로 취직, 2년간 화장실 청소 생활을 한다. 이때 그는 하층민 사이에 섞여 말없이 사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 또 시몬느 베이유의 육체 노동에 대한 헌신을 배우려 노력한다. 그는 그 2년이 너무도 행복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성스러운 산으로 순례의 길에 나설 수 있다. 이러한 중심은 흔히 사회의 '시궁창', 즉 내가 화장실의 비유 속에서 본 것과 같은 데서 발견된다 (…) 진정한 중심은 저 멀리 아래에, 사람의 필수적인 나날의 '천한 일'을 하는 육체적인 경험 속에 있다 (…) 중심은 어둡고, 천한, 낮은 곳에 있으며, 거기서 우리는 모든 빛을 초월하는 '빛'에 감촉될 수 있다."

그의 마음을 채우는 많은 사람 중에는 간디도 있다. 그는 인도 여행을 통해, 첫째 자급적 농업을 문화의 토대로 삼고, 둘째 필요한 것은 마을 규모에서 만들어내는 문화를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다시 한 번 감복한다.

하지만 그는 동아시아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 같다. 그를 시종일관 사로잡은 정신은 중세 수도원의 '기도와 고행', '청빈과 노동'이었다. 만약 그가 노자/장자, 불가의 생활이나 선(禪), 동양적 청빈과 자연친화 사상을 알았더라면 무어라 이야기 했을까. 아마도 동아시아에 답이 있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

책의 마지막 장은 더욱 극적이다. 독일에 머물던 호이나키는, 어느 날 부시의 바그다드 폭격(1991년)이라는 충격에 접한다. 동료들과 일견 무력해 보이는 피켓 시위를 하면서 많은 자성(自省)을 쏟아낸다. 제국주의와 거대한 미국의 폭력 앞에 무력한 인간,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호이나키는 그 대답으로 '울고 있는 바보', '거룩한 거부자'의 삶을 제창한다. 그리고 그 거룩한 바보의 정신을 아나키즘에서 찾는다. 자유주의 경제의 풍요에 대해 깊고 크게 울리는 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아나키즘 말이다.

그의 아나키즘은 독특하다. 근대 국가와 근대 경제마저 거부하는 윌리엄 골드윈과 소로 전통의 아나키즘인 것이다. "나는 사회에 대한 완전히 대안적인 비전을 가진 하나의 사회-정치철학으로서의 아나키즘에는 관심이 없다 (…) 그러한 행동은 모두 다양한 종류의 사회공학이 필요하고, 따라서 내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고, 또 내가 행사하고 싶지도 않은 힘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나 자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지도 않고, '힘든 노동의 삶'을 살지 않고도,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고, 몸소 집 없는 사람과 거리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고도, 일관된 논리를 가진 위대한 아나키스트 이론가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호이나키는 헤나시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서의 가르침에 직접 토대를 둔 이 네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기도와 단식이라는 전통적인 관습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한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과연 이런 삶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는 그저 별종이고 도덕적으로 예민한 바보('거룩한' 바보)인가. '나'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나'를 찾는 삶으로서는 의미를 가질지언정, 그런 삶이 공동체와 사회의 문제, 지구적 문제의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희망을 구현하는 투쟁과 연대는 어떻게 하나. 책을 덮으면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주변에서 계속 던져지는 이런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나키스트 윤리를 통해서, 우리는 국가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고, 갈수록 더 모든 사람의 삶을 통제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맞설 수 있다. 내가 이들 무수한 시스템을 변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시스템이 제공하는 외관상의 안락과 안전과 특권과 명예를 지금 당장 포기하는 것을 시작할 수는 있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혁명'이다.

사회적 대안은 사회과학적 진단과 처방, 진보와 연대를 통해서 마련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신념이 녹슬고 있다. 과연 그 '녹슬어 빈 곳'에 호이나키의 삶이 작은 불씨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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