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 당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지난 50년을 농업과 함께 보냈던 그는 자신을 "인생에서 '농촌'을 빼면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그가 한국 농업에 직접적 타격을 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우리 농가가 개방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 등을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김성훈 총장은 11일 서울 종로구 희망제작소 회의실에서 희망제작소(대표 박원순) '대한민국 농업 고수로부터 듣는다"의 강연자로 나섰다.
"한미 FTA는 트로이 목마"
김성훈 총장은 한미 FTA를 '한국 농업 말살용 트로이 목마'에 비유했다. 김 총장은 "600년 역사의 숭례문을 눈 앞의 정치적 이득을 노려 일반에 무방비로 개방한 결과 다섯 시간 만에 숯덩이로 만든 사람들이 자칫 1만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 농업과 농촌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미 FTA가 발효되면 농축산업 품목의 65%가 즉시 무관세로 개방되고 나머지 품목은 10~15년에 걸쳐 일정 비율씩 매년 관세를 깍아 무관세로 전환된다. 대책 없이 시장을 개방했을 때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국 농업은 그야말로 초토화될 가능성이 크다.
김 장관은 "농어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라며 "이미 협상 과정에서 상당 부분 망가졌지만 비준 과정에서라도 신중히 그리고 완벽한 사후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우리 농업이 숭례문 신세가 되지 말란 보장이 없다"고 염려했다.
한미 FTA와는 별도로 2004년 WTO 재협상에 따라 2015년에는 쌀 수입이 완전히 개방된다. 현재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27%. 자급률이 95%가량인 쌀을 제외한 나머지 곡물의 자급률은 4.6%에 불과하다.
김 총장은 "쌀 수입 시장이 완전 개방되면 국내 농업 기반은 더 붕괴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는 "식량 무기화를 포장한 말인 '자원 민족주의'나 식량 안보(food security), 또 여기에 식품의 안전성까지 포함한 식량 주권(food sovereignty)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며 "지금 세계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 농업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지난 2년 사이 국제 식품 가격이 75% 뛰었고 밀, 옥수수, 콩 등 곡물가격도 1년 사이 평균 40~80% 올랐다"고 말했다.
"낡은 축음기판은 더 틀지 말라"
이런 상황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한국 농업에 희망을 주겠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농촌은 정신적 지주"라며 농촌에 관한 답변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등 '쇼맨십'을 보여줬다. 그러나 정작 이 대통령은 "이제까지 농촌은 농사만 열심히 짓는 것이었다"며 "돈 되는 것은 도시 사람들이 하는데 그렇게 하면 부자 못 된다"며 농업 개방에 대한 대책은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성훈 총장은 "농업의 전면 개방을 앞두고 농민에게 '경영 마인드'나 '가격 경쟁력' 또는 '식품 가공 상품화"라는 그럴싸한 훈수를 해대지만 유럽, 미국이 자국의 농민들에게 해주는 것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은 WTO가 금지하는 억제 정책은 잘 지키고 허용하는 지원 정책은 안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생산비 보조나 생산 가격 보장은 금지 조항이어서 안 한다고 하는데, 소득 보상제나 유통개발·판매촉진 조치, 농민 중심의 연구 개발 지원은 허용이 돼 있어도 제대로 안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또 김 총장은 30조 원에 이르는 농가 부채의 일부 탕감 등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농정 실태와 국제 통상 환경 등의 변화로 생긴 건전한 부채에 대해서는 정부가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
그는 "정부는 119조 원, 140조 원을 투자한다고 공공연히 선전하고 있지만 이 수치는 10년치 예산과 기금을 모두 합친 숫자"라며 "마치 새로이 투자되는 금액인 것처럼 허위 홍보하며 거짓 투자를 말하는등 낡은 레코드판을 계속 틀어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1+2+3=6'…지연(地緣) 사업으로 농민에게 직접 혜택을
김 총장은 개방화 시대에 한국 농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을 어떻게 전망할까.
그는 "정부관료나 여론 등은 갈수록 보수화되고 비농업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로 채워질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기획기능과 예산을 대폭 지방자치단체와 농축협 등에 이관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는 "현지 농정을 현지인에게 맞겨 지역 특성을 살리고 무한 개방 체제에 대응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화 시대에 오히려 지방화를 꾀하는 '세방화(Glocalization)' 전략이다.
또 농가나 협동조합이 생산뿐 아니라 저장, 가공, 수송, 판매 등의 2차, 3차 산업까지 모두 담당하는 '1+2+3=6'의 지연(地緣)사업을 김 총장은 제안했다. 그는 "농민이 직접 농업 관련 산업을 주도해 수익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농업의 미래는 '기업농'이 아닌 '가족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서산의 대규모 간척지를 특혜 개발하여 세계에서 제일 큰 쌀 기업 농장을 만들겠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례를 들며 "한국엔 가정농을 중심으로 한 다품종 소량생산의 다각화되고 전문화된 협동경영방식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웰빙의 욕구가 넘쳐나는 도시인에게 명품화된 농산물을 제공하면 된다"며 "그러지 않고 개방화된 품목을 피해 매번 정부가 권장하는 새로운 품목으로 주력농업을 바꾼 농민들은 오히려 빚이 많았다"고 말했다.
"특화된 가공상품이 해법"
개별 농가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부과하는 까다로운 규정이 수정되야 한다. 김 총장은 "현재 김치, 된장, 고추장 등의 식품가공 제품은 식품위생법, 도정법, 주세법 등의 엄격한 기준 때문에 대기업이 아니면 진출하기 어렵다"며 "시설 기준이 까다로워 개별 농가에서는 10~20억 원을 투자해야 해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의 식품가공업은 원자재는 전부 수입이고 인적 연계가 전혀 없어 농민과는 유리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유럽처럼 전통적인 가공 방식을 인정하고 시도가 정한 위생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며 "술이나 장 등 집집마다 다른 제조 방식을 특화해 '독점적 경쟁 구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저장과 수송 과정에서 방부제를 뿌리는 수입 농산물과 달리 우리 농산물은 안전한 먹을거리로 차별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총장은 "가족농들이 자유로이 식품가공업과 술을 포함한 음료수 가공 분야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대기업 위주의 법률과 제도를 먼저 대폭 개정해야 한다"며 "이것은 농민과 소비자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