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

[우석훈 칼럼] 이 주의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는?

이 주의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는?

이번 주 칼럼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들과 약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칼럼이라는 글의 형태를 선호하는 편도 아니고, 또 내 글을 여러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할 정도로 글을 매끄럽거나 매력 있게 쓰는 편은 결코 아니다. 굳이 누군가 지적해주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나도 충분히 알고 있고, 늘 반성하고 있다.

그래도 시대가 난국이라,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도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서 압력을 가해서, <프레시안>의 지면에서 1주일에 한 번 정도, 그 주에 내가 나름대로 경제적인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서 짧게 짚어보자고 했던 것이 이 칼럼이 생겨난 유래이다.

그렇게 해서 독자 여러분에게 별도의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글을 쓰기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다. 늦게라도 이 지면에 대한 인사는 한 번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또 이런 인사 없이는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서 겸사겸사 뒤늦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녹색 성장 문제, 서울시 청사 파괴, 9월 위기설 등 나름대로는 숨 가쁘게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이번 주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막바지로 달려가는 기륭전자 문제, 다소 이해하기 어렵게 이념적인 형태로 전개되는 감세 문제, 여전히 진행 중인 9월 위기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레임 자체가 전복된 형태로 제기된 새만금 등 다룰 수만 있다면 긴 시간을 놓고 다루고 싶은 문제들이 쌓여있는 1주일이다. 경제, 그리고 실물이라는 두 가지 주제어만 가지고도 매주 이렇게 다루어야 할 주제가 쌓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주에 어렵지만 결국 다루기로 마음을 먹은 주제어는 '오체투지'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할 때, 지난 주 그리고 앞으로 올 1주일 동안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새만금보다도, 9월 위기설보다도 이 문제가 더욱 크다는 것이, 경제학자로서의 나의 개인적 판단이다. 2008년 9월 첫째 주, 한국에 벌어진 가장 큰 경제적 사건은, 몇 성직자들의 오체투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고? 자, 생각을 해봅시다.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라는 문장이 있다. 좀 멋진 철학자가 한 얘기는 아니고, 그저 별 볼일 없는 미국 숭배영화 정도로 종종 비판받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오는 대사이다.

로마 5현제의 마지막 시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코모두스는 아버지를 교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왕위 계승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게르만 전투의 영웅인 막시무스 장군이 검투사로 새로운 영웅이 되어 독재의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황제가 된 코모두스는 민중의 사랑을 받던 검투사 막시무스를 간단하게 암살할 수 있었고, 그의 참모들은 모두 그렇게 하기를 권고하고 있었다. 그 때 황제가 한 말이 "그를 순교자로 만들 셈인가?"라는 문장이다.

순교자라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대가 만드는 것이고, 무엇보다 위정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힘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정적을 순교자로 만들기 보다는 '시정잡배'로 만들기를 더 원하고, 그가 민중의 아이콘이 되기보다는 치사한 파렴치범으로 몰고 싶어했다. 그 편이 통치에 편하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한국에서도 작용했다. 위정자와 공안검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국가보안법 대상자는 순교자의 느낌을 갖는 영웅이 되었고, 그래서 노태우 정권 이후로 국보법이나 집시법보다는 도로교통법과 같이, 그저 길거리 통행질서를 어긴 잡범처럼 만들기를 선호했다. 민주화의 투사를 시정잡배 혹은 도로교통법 위반자 정도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순교자를 만들지 말라"라는 정책인 셈이다.

순교자와 잡범 중, 잡범을 선택한 것이 지난 15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공안사건으로 만들지 않고, 도로교통법 위반 정도로 처리하고자 했던 것은, 더 민주화된 정부이거나, 더 합리적인 정부라서가 아니라, 포군 코모도수의 지혜 정도를 사용하고자 한 정부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지난 4일 오후 지리산 노고단.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사람과 생명,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의 첫 발을 뗐다. ⓒ프레시안

생명평화로 밝히는 '촛불'

시대가 흘러서 이명박 시대가 되었다. 이제 도로교통법 대신 집시법을 적용하고자 하고, 기왕이면 집시법 보다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고자 하는 것 같다. 코모두스 황제와는 반대의 방향이다. 그의 문장을 활용하자면, "기왕이면 순교자를 만들어, 본때를 보여주라"라는 것이 정권의 실세들이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인 것 같다. 무서운가? 물론 무섭다. 어우, 무셔버, 무셔버!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라는 사건은 우선은 이 흐름 위에 있다고 이해된다.

"순교자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순교자를 주리라!"

오체투지의 1차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순교를 결심한 큰 스님과 큰 사제의 오체투지, 그들은 전투와 싸움 대신 평화라는 전략을 선택했고, 그 수단이 바로 생명이다. 그들의 '작은 두 생명'을 내놓아 세상의 평화를 위한 순교자가 되는 것, 그것을 지금의 오체투지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눈물이 흐르는가? 이 사건에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코모두스만도 못한 사람이다. 코모두스 황제는 억울해서라도 울었을 것 같다.

이 오체투지의 약간 전사를 살펴보면, 크고 작은 순교에 대한 대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맞다면, 불교대회를 전후하여 등신 공양, 소지 공양, 단지 공양 등 온갖 무수한 크고 작은 순교 사건들을 이 큰 종교인이 무마하면서 그들을 '대속'하여 오체투지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의 본질이 종교 간 갈등인가? 불교와 가톨릭이 손을 잡고 '생명평화'라는 구호로 나선 이 사건은, 종교 간 갈등과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명평화의 순교 사건이 본질이고, 이 사람들이 금번의 지리산에서 묘향산 오체투지의 그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버티려고 하는 것은, 내년에는 휴전선을 오체투지로 넘어 남북 화해를 위하여 육신을 던지고자 하려는 결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은 이명박 정권의 말도 안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한 토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단순히 정권에 대한 부당함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오랫동안 한국을 내리눌렀던 분단에 대한 순교 사건으로 이 어두운 시대에 생명평화로 '촛불'을 밝히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 이 사건의 진실이다.

한국 경제의 방향을 결정할 오체투지

이 사건이 경제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 행사나 사회적 고발이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환원주의 혹은 경제물신론에 대해서 우리 시대의 큰 종교인들이 던지고자 했던 경종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이지만, 효과는 경제적인 것이다. 이 오체투지의 출발점이 바로 '경제 대통령'의 말도 되지 않는 이상한 정책과 국정운용 기조에 대한 항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리산의 산길에 우리의 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온몸을 던져서 걷기 시작했다. 이 질문은, 1차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던져진 질문인 것 같고, 2차적으로는 우리들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인 것 같다.

과연 좋은 경제가 무엇인가? 2008년, 한국에서 진행되는 오체투지의 질문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눈에는 9월 위기설, 감세정책, 국제중 정책, 이런 것들이 중요해보이지만, 사실 본질을 따라 흐르는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이 오체투지이다.

"순교자를 만들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이 질문이 진짜 질문이다. 젊은이들도 때때로 죽어나간다는 이 오체투지에 환갑이 가까운, 우리 시대의 큰 스님과 큰 신부님들이 나섰다.

내가 이해하는 바에는, 이 오체투지 기간 중, 한국 경제의 미래는 여의도의 증시나 전경련의 결정 혹은 한나라당 내부의 권력투쟁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이 큰 종교인의 매일매일의 생사여부에 걸려있다.

경제에는 윤리도 있고, 정의도 있다. 그리고 시장주의자들이 그렇게 중시여기는 '효율성'도 있다. 식구들과 친구들, 그리고 장로들끼리 끼리끼리 나누어먹는 지금의 한국 국민경제에는 어떠한 윤리와 정의는 물론 효율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명평화의 순교자이며, 경제의 순교자인 큰 스님들이 오체투지의 순교의 길을 걷는다.

과연 이분들이 순교할 것인가, 아닌가?

이 대답 여부에 한국 경제가 '좋은 국민경제'로 갈 것인가, 중남미형 양극화 경제로 갈 것인가의 미래가 걸려있다는 것이 나의 경제에 대한 이해이다. 개발이냐, 발전이냐, 부자냐, 가난한 사람이냐, 서울이냐 지방이냐, 그리고 불균형이냐 균형이냐, 이런 질문들이 이 오체투지에 걸려있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9월 위기설? 이 중요한 질적 전환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같은 사건이다.

그래서 내가 이해한 이번 주의 한국 경제 최고의 사건은 오체투지 시작이고, 최고의 질문은 '순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