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나는 요즘 9월 8일부터 시작되는 2학기 수시모집 때문에 아이들과 상담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거기다 국어 선생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보낼 추천서를 작성하거나, 아이들이 쓴 자기 소개서를 검토하는 일까지 더해져 몹시 바쁘다. 사실, 내가 하는 진학지도란 아이들이 3년간 얻은 내신 등급과 모의고사 성적, 그리고 입시 관련 회사에서 만든 배치 자료를 보고 아이들을 적당한 위치에 '꽂아주는' 일이 전부다.
이번에 아이들을 면담하면서 내가 새삼 깨달은 것은, 이 아이들을 입학할 때부터 가르쳐 왔지만, 두드러진 일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재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없이 조용하게 지내던 한 아이가 애완동물에 관한 한 프로급의 마니아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시내에서 한 시간 남짓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서 다니는 한 녀석이 남몰래 방송연예과를 꿈꾸어왔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좀 끔찍한 일인데, 이게 낯설지가 않다. 아이들을 몰라도 진학 지도 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 대개 아이들은 제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뭘 잘하는지 그 자체를 잘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진학을 앞두고 교사에게 하는 질문이란 대개 '제 점수에 갈 만한 대학이 어디 있을까요?'라는 식이다.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질문들, 이를테면 '이 과 나오면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어요?'라는 식의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12년 동안 공교육과 사교육을 넘나들며 부모님 등골이 휘도록 투자하고 공들인 작업의 마지막 순간치고는 허망할 정도로 단순하다.
면담하는 틈틈이 미국의 저명한 교육자인 조너선 코졸이 지은 <젊은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를 읽는다. 처음 접했을 때는 제목도 심심했고, 글쓴이의 약력도 좀 판에 박힌 듯 드라마틱했다(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했던 전도유망한 백인 청년이 스스로 보스턴의 흑인 거주 지역의 형편없는 초등학교 교사를 자원하고, 이로부터 40여 년간의 풍부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써서 저명한 문필가가 됐고, 지금은 진보적인 교육운동가로 노엄 촘스키만큼의 명성을 얻고 있다는 둥).
그런데, 또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교육이 잊고 흘려보내는 숱한 근본적인질문들에 대한 생생하고도 감동적인 답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고, 그래서 좀처럼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 가르치기
조너선 코졸은 프란체스카라는 초임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젊은 교사들에게 자신의 교사 체험과 인생에 대한 조언을 전하고, 현재 미국 교육에 대한 생각을 펼쳐놓는다.
이 책에서 읽은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다. 조너선 코졸은 자신의 책을 읽은 아이들의 초대로 사우스브롱크스에 있는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토론 수업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당연하게도(!) 금세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다. 낯선 손님을 초대해놓고 엉망으로 망가지는 아이들을 그 학급의 새파란 신참 교사 애프릴 갬블은 어떻게 진정시켰을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의 손가락들을 약간 구부린 채 입 바로 아래쪽에 붙이고 다른 한 손도 같은 방식으로 구부려 오른편 30센티미터쯤 되는 지점으로 뻗었습니다. 저는 제가 초래한 어수선한 상태에서 벗어나 차분해지는 것을 홀린 듯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갬블 선생님이 하는 것과 똑같이 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한 손을 입 아래쪽에 붙이고 다른 한 손은 옆으로 뻗어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나직하게 흥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그녀의 소프라노 음성으로 멜로디를 노래했고 몇몇 아이들도 자신의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였고 그들은 플루트를 연주하는 파트였던 것이죠. 아이들은 작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플루트를 연주했습니다. (…) 음악이 끝나자 선생님은 플루트를 세련되고 매끈한 동작으로 손에서 빼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시 토의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상황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손님을 초대해 와서는 통제불능으로 망가지는 아이들이 순간 '웬수'로 보였을 것 같다. 회초리로 교탁을 탁탁 치면서 고함을 치거나, '손님 가시면 보자'는 무섭고 살벌한 눈빛으로 제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손님 가시고 난 뒤에 '한 따까리' 하고 나서는 '너희들에게 실망했다'는 투로 그럴듯한 연설을 했겠지.
이참에 한번 생각해 본다. 교사는 일생토록 떠드는 아이들과 싸우다가 교직 생활을 마감할 업보를 타고 났다. 그런데,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죄일까? 사실 말이지만, 초등 1학년이건 고3이건, 아이들은 언제나 떠든다. 그것은 새가 노래하듯이, 시냇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토론에서의 통제불능의 상황은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일어난다. 그러므로 저 애프릴 갬블 선생의 침착하고 품위있는 대응은 몹시 아름답지만, 또한 교육적으로는 상식적인 해결이다.
그러나 대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은 극히 안일한 방식으로 수습되고 따라서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수업들은) 점점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혼란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 필연적인 과정이지만, 이것을 이렇게 단순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면 아이들은 조금씩 민주주의를 귀찮게 여기게 되고, 구질구질한 민주주의보다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처리되는 것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파시즘의 정서적 기반이 된다.
교육에는 교육적 기술이 필요하다. 떠드는 아이를 진정시키면서도 명랑한 수업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 곤경에 빠진 급우를 수치심이 느끼지 않도록 잘 돕는 일, 상습적으로 조는 아이를 수업에 참여시키는 일,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아이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지도하는 일, 적절치 않은 연애 관계에 빠져든 아이를 스스로 빠져나오게 만드는 일, 이런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교육적 상황에 대한 대응은 너무나 타성적이다. '외면하거나 내리 누르기', 이 양 극단 사이를 오갈 뿐이다. 그렇게 해도 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교사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딴 데 있기 때문이다. 교육 관료들과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잘 통제하고, 말썽 없이 상급학교에 진학시키고, 덤으로 사교육에 맡기지 않아도 될 정도의 미더운 교수학습능력만 갖춘 교사를 선호한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사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공공적 표준이다.
서로 '섞이는' 교육
조나선 코졸을 초대했던 저 아이들은 쓰레기 소각장 인근에 살아서 3분의 1이 천식을 앓아야 했던 가난한 초등학생들이었다. 조나선 코졸은 이 책 곳곳에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분리와 노골적인 차별을 고발하고 있다.
그에게 교육적 이상은 '섞이는' 것이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흑인과 히스패닉과 아시아계와 백인이,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고학년과 저학년이(그래서 그는 중등 저학년을 초등 고학년으로 편입시켜 저학년들의 학습을 돕는 교육과정을 제안한다) 서로 섞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자기네들끼리만 '따로 놀려는' 백인들의 의지는 그야말로 노골적이다. 마틴 루터 킹을 기념하는 마틴 루터 킹 고등학교는 맨해튼의 유복한 백인 거주 지역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학교인데, 마틴 루터 킹의 이상과는 전혀 다르게 흑인과 백인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채 재학생의 96%가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채워지는 악명 높은 인종분리학교가 되어 있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 흑인 법조인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서굿 마셜 학교 또한 흑인들만의 학교가 돼 있다. 그래서 이 학교의 교장은 아이들에게 서굿 마셜을 아예 모범적인 기업의 중견 간부쯤으로 바꿔서 소개한다. 그러고는 서굿 마셜의 맹세라면서 "나는 주의를 기울여 듣고 지시에 잘 따를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나한테 달렸습니다"라는 다짐을(물론 날조된 것이다) 아침 조회 때 30번씩 외치도록 가르친다.
미국에는 바우처 제도라는 게 있어서 한 사람 몫의 교육비를 받아서 제가 원하는 학교로 이동해갈 자유를 허용한다. 물론 이 자유는 학교 정보에 정통하고 교육열이 드높은 백인들이 흑인, 유색인종들의 학교를 벗어나 백인들만의 '작고 우아한' 학교로 옮겨가는데 널리 이용된다. 흑인 밀집 지역의 학교는 교실이 모자라 트레일러에서 수업을 하고, 구내식당은 20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겨우 진입이 가능하다. 사우스브롱크스의 가난한 꼬마 파인애플에게는 1만1500달러의 교육보조금이 지급되었는데, 바로 옆 백인 거주지 자녀에게는 1만9000달러, 더 부유한 교외 지역 아이들에게는 2만2000달러가 지원된다.
조너선 코졸은 이 노골적인 차별을 집행하는 정치인들, 이를 거드는 우파 학자들과 일생토록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치지 않고 명랑하다. 그 이유는 종잡을 수 없도록 유쾌하고, 턱없이 낙천적이고 엉뚱한 꼬마들, 그들의 부모, 조부모님들과의 우정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풀뿌리 지식인이다.
프란체스카 선생님, 이 아이들과의 지속적인 우정은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어요. 그 지역에 너무나 흔한 육체적 질병인 소아 천식과 유행병 수준인 어머니에게서 받은 HIV는 물론이고 주위에 성행하는 마약 거래 등 무시무시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살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밝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능력과 주위에 그렇게 많은 죽음과 고통이 널려 있어도 삶과 희망의 가능성을 확언하는 그들을 대할 때면 가끔 자기 연민에 빠지는 제 자신이 창피해지고 제 정신에서 우울과 어둠이 저절로 가신답니다.
젊은 교사를 향한 날카로운 죽비
내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 교육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담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빈곤',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대한 우리 교육 주체들의 대응은 거의 절망적이다. 우선 교원들 스스로가 계층화되어 있다. 교사들의 경우 그 험난한 경쟁에서 승리한 정규직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대개의 (젊은) 교사들은 그들 자신이 학창 시절 더없는 모범생들이었기 때문에 빈곤층 아이들이 흔히 내보이는 적대감, 무기력, 일탈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학부모들, 특히 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중산층 이상의 '배운 부모'들은 제 자식의 진학과 입시 문제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저 아이들이 결국 비정규직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바로 지금 빈곤으로 삶 자체가 망가져있는 아이들의 절망에 대해서는 거의 사색하지 않는다.
공아무개 씨가 목을 매고 있는 국제중학교 문제, 이 책에서 조너선 코졸이 목 놓아 비판하는 '고부담 시험'(high stakes testing)의 한국적 변용이 될 일제고사, '전통의 이슈' 교원평가제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국제중학교는 아이들에게서 유년 시절을 빼앗아갈 것이다. 일제고사는 더 끔찍한 재앙이 될 것이다. 시험 결과에 따라 학교를 일렬로 줄 세우겠다는 것은 악마적인 발상이다. 몇 시간동안 치르는 5지선다 시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의 인간적 역량의, 그 학교의 교육적 역량의 극히 편협한 일부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그 아이와 학교 전체의 교육 과정, 교사들의 역량, 재정 지원, 사회적 위상, 그리고 그 학교가 속한 주거지의 등급까지 송두리째 규정될 것이다.
이 책에는 <배고픈 애벌레>라는 그림책을 읽어주다 진짜로 애벌레를 학교에 갖고 오는 어느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름다운 애벌레에 아이들은 넋을 잃었다. 아이들은 애벌레를 쓰다듬었고, 애벌레가 스스로 실을 내어 지은 회색 고치 안으로 모습을 고치로 숨어버린 일은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경이이자 특별한 상실의 경험이었다. 이 애벌레가 드디어 아주 화려한 불나방이 되어 고치 바깥으로 나왔을 때 선생님은 창문을 열어 그것을 4월의 하늘로 날려 보냈다. 이것은 그 선생님의 순수한 교육적 선의에서 나온 것이며, 이런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도구는 사실상 없다. 아이들의 감각 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저장될 따름이다. 이미 있어왔던 학교 관리자들의 근무평정에 더해 얹히는 교원평가는 저러한 창조적인 교육열을 갖춘 선생님의 자리를 갈수록 위축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조너선 코졸의 결론은 무엇일까? 그의 결론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투쟁을 호소한다.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교사들은 교직에 들어서기 전에는 예기치 못했던 책임을 떠안아야 합니다. 이 책임들 가운데 하나는, 제 생각입니다만,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교사로서의 직업 윤리'로 간주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아무리 수줍고 자기 주장에 서투르더라도, 정의를 위해 소리 내 말할 수 있는 투사로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 교육의 영혼을 지키려는 싸움은 시작되었고, 이들은 마지막까지 그것을 지켜내야 할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젊은 교사들이나 교직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만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을 즐겁게 채울 수 있는 권리를 지켜내려고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교사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가로 지금껏 지내왔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지회 활동을 하기 위해 제발로 걸어 들어오는 내 후배뻘되는 젊은 교사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 무기력이 10년 정도 이어진다면 우리 교육 현장은 저들이 하고 싶은 대로 질주하는 고속도로가 되고 말 것이고 그래서 지금 몹시 두렵다.
아이들은 이미 촛불을 통해 이 미친 교육에 대해 제 할 말을 이미 다 했는데, 어른들의 미망은 채 걷히지 않고 있다. 조너선 코졸의 이 책이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우리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날카로운 죽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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