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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만난 1990년대 뮤지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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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08년에 만난 1990년대 뮤지션들

[대중음악의 오늘을 보는 시선 ③]

1990년대 음악, 어떻게 볼 것인가?

1990년대에는 소위 '고급가요군'으로 분류되는 뮤지션들이 존재했다. 모습을 제한적으로 노출하면서도 적지 않은 대중적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둘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1990년대의 그들은 매체 발달을 통해 비교적 어렸을 때부터 팝의 높은 수준을 실감한 세대를 대변한다. 따라서 자기만족을 떠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스레 사운드라던지 세련된 곡의 형식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분히 감각적이었고 모방에 대한 혐의가 늘 따라다녔기 때문에 진정성과 작가주의적 태도를 중요시 여겼던 기존 평단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일부 대중은 그들을 뮤지션의 새로운 전형으로 받아들이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끝을 모르고 팽창하던 댄스 뮤직의 시대에 존재했던 또 다른 선택권이었고, 팝에 근접한 수준 높은 음악을 한다는 동의가 팬들을 중심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다수가 싱어-송라이터면서 동시에 프로듀서를 지향했던 것도 그러한 인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댄스 뮤직의 파급은 순식간에 많은 것을 바꿨지만 보편적으로 봤을 때 한없이 가벼웠고 만들어진 상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여기에서 발생한 괴리는 1990년대 대중음악의 양면을 상징한다. 평단으로부터 가볍게 치부됐던 고급가요군이 댄스 뮤직과 비교해서는 상당히 진지한 집단으로 인식됐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 평단은 고급가요군을 절대 지지하지 않았지만, 내밀 명함조차 희귀했을 만큼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고급가요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연말 시상식에서 원하는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태를 조롱했다. 통신 매체의 발달로 보다 극명하게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었던 불신 가득한 시대, 그것이 1990년대의 진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시대가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여 재조명되고 있다. 여기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은 단순히 예전이 좋았다는 식의 접근이 기본 골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음악에 가장 빠른 반응을 보였던 세대가 오늘날 획득한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너나 할 거 없이 호황을 누렸던 그때를 추억하는 데 그칠 뿐이라면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된다. 본인들은 기성세대의 '예전이 더 좋았어' 타령에 얼마나 공감했나?

물론 199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에게 2000년대는 어떤 재앙과도 같을 것이다. TV 출연을 하지 않고도 안정적인 행보를 보였던 그들 중 일부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고도 잊혀지는 게 두려워서 대중에게 웃음을 판다. 자연히 음악은 남지 않고 우스운 사람만 남는 악순환이 생겼다. 그러나 그들이 누군가? 그들은 팝에 근접한 순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곡을 쓰고 직접 프로듀서가 되어 결실을 이끌어냈던 실질적인 첫 번째 세대다. 단절의 시대에서 손 내밀 대상을 자국 선배가 아니라 해외에서 찾아야 했고, 지명도가 충분히 쌓인 상태에서 유학을 감행했던 그런 경우다. 이전 세대에서도 마찬가지 고민을 안고 있었던 유학파가 존재했지만 그들은 연주 중심의 뮤지션이었고 귀국 후 교수로 불리는 광경이 더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언급될 이름들은 학생이 아니라 우리 곁에 늘 친숙하게 머물고 있었던 뮤지션이 될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따라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예전 결과물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통해 조명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절의 시대에서 고군분투했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되어 이전과는 달리 후배 뮤지션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으로 전해질 것이다. 그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에 해당되는 뮤지션들의 행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유형은 단적인 분류가 아니라 상징적인 부분을 부각시킨 결과임을 알린다.

프로듀서로서의 김현철, 정석원, 박진영
▲ 김현철은 출발점에서부터 프로듀서를 지향했고 누구보다 그 명칭에 잘 어울리는 뮤지션이다. ⓒ로지트엔터테인먼트

여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김현철이다. 김현철은 출발점에서부터 프로듀서를 지향했고 누구보다 그 명칭에 잘 어울리는 뮤지션이다. 그의 정확한 판단력과 재능은 이미 초창기에 후배가 아닌 선배들의 앨범에서 빛이 났지만, 유재하 추모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위해](1997)에서는 다소 과소평가된 경향이 있다. 단 한 장의 앨범으로 10년 사이에 너무나 거대해진 유재하의 그늘을 감안하더라도 그 앨범을 주도한 김현철의 역량은 당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2000년대의 김현철은 어떤 모습일까? 확실히 입지는 예전 같지 않다. 재즈가 대한민국에서 쿨한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던 시기에 김현철이 어떤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돌아보면 그건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나 영역 자체가 좁아진 건 아니다. 여전히 O.S.T를 비롯한 각종 외부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고, 특히 아이들을 위한 팝 앨범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 또 8집 [...그리고 김현철](2002)과 같은 앨범을 들어보면 천생 프로듀서라는 느낌이다.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다양한 성향의 뮤지션들을 통제하고 각자의 색깔에 맞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김현철에 이어 이 유형에서 조명 가능한 뮤지션으로는 정석원이 있다. 015B 해체 후 공백기를 가졌던 정석원은 2000년대 들어 이가희라는 신인 가수를 발굴해서 앨범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굉장히 독특한 결과를 낳았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건 소녀 감성의 발라드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 어떤 음악들보다 치밀한 프로그래밍과 사운드로 채웠는데, 가사는 지나치게 가볍고 도발적이어서 도대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이가희의 앨범이 굉장히 실험적인 시도로 그쳤다면 다음으로 이어진 박정현과의 작업에서는 어느 정도 절충점을 찾아 사뭇 다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그녀의 최고작으로 정석원과의 결과물이 꼽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을 떠올리면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현재 정석원은 015B를 부활시킨 상태다. 무려 10년 만에 공개한 7집 [Lucky 7](2006)은 1990년대의 감성과 트렌드를 이끌었던 예전 행보에 미치지 못했지만 여전히 감이 살아있는 정석원의 능력을 유감없이 담아낸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었다.

프로듀서 유형의 마지막은 박진영이다. 가급적이면 고급가요군으로 분류됐던 뮤지션들 중심으로 진행하려 했지만, 1990년대 출신 뮤지션 가운데 박진영만큼 프로듀서로서 대중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거두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감안하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댄스 뮤직은 1990년대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분야지만 언제나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박진영도 마찬가지였는데 하나 차별되는 점이 있었다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프로듀서와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프로듀서로 구체적 흔적을 남기기 전에 박진영이 참여한 외부 작업들을 보면 거의 일관성이 없다. 함께한 뮤지션들의 성향도 그렇고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기록도 존재한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부터 훈련을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춤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은 그루브를 만드는 데 장점으로 작용했을 테고, 거기에 프로듀서 역량이 더해지면서 천대받았던 댄스 뮤직을 하나의 고급 브랜드로 바꾼 게 2000년대 박진영이 거둔 성과다. 비평적으로 소외됐던 분야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니만큼 그의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좀 더 명확하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싱어-송라이터 유형의 김동률, 이승환
▲ 현재 김동률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음악이 담긴 5집 [Monologue](2008)의 상대적 성공을 누리고 있으며, 2000년대에 가장 신뢰감 있는 싱어-송라이터로 인식되고 있다. ⓒ뮤직팜

싱어-송라이터 유형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김동률이다. 2008년 상반기에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에 관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양산시킨 주역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맞이할 무렵의 김동률에게 1990년대는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벽과 같았다. 1990년대 활동 기간에 비해 전람회가 남기고 간 자취는 이상하리만치 깊었는데, 그것은 김동률에게 득이 되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는 독이기도 했다.

솔로가 된 이후에도 전람회는 김동률을 항상 따라다녔고, 그게 어떤 부담이었는지 증명이라도 하듯이 2000년대에 발표한 첫 번째 앨범이자 본인의 2집인 [희망](2000)에는 이전과 달라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전해진다. 결과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불과 1년 만에 발표한 [귀향](2001)으로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다. 과거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인상이었고 [희망]을 스스로 보완한 앨범이기도 했다. 현재 김동률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음악이 담긴 5집 [Monologue](2008)의 상대적 성공을 누리고 있으며, 2000년대에 가장 신뢰감 있는 싱어-송라이터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승환. 이승환은 앨범과 공연 모두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사운드 구현을 이룩하며 고급가요군에서 누구보다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했었지만 2000년대에 가장 극심한 타격을 받은 뮤지션이기도 하다. 세 장짜리 레이블 컴필레이션 앨범과 더블 앨범으로 구성된 7집으로 2000년대 역시 화려하게 출발했던 이승환이 앨범 제작에 부담을 느끼고 EP로 대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해마다 몰라보게 규모가 축소되어 앨범 시장의 재앙으로 불리는 2000년대를 그보다 극명하게 대변하는 이름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그다운 앨범을 세장이나 발표했고 신인 뮤지션을 발굴하는 데에도 열의를 보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에 있어선 전에 없이 입지가 좁아졌다. 고급가요군의 정수로 불렸던 이승환의 부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분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유희열과 윤상

최근 회자되고 있는 1990년대로의 귀환 분위기에 도화선이 된 건 유희열이었다. 1990년대의 감성이라 불렸던 015B도 불가능했고 가장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했다고 평가받았던 이승환조차 입지가 좁아진 요즘, 유희열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6년여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환을 이끌어냈을까? 단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고 누군가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답은 존재한다. 바로 라디오다.

DJ 유희열과 라디오로 유대감을 형성한 적이 없다면 그게 어떤 건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의외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언급됐던 뮤지션들 가운데 대중과 가장 늦게 교감을 이룬 것이 유희열이다. 물론 그전에도 유희열은 이승환, 윤종신 등과의 작업을 통해 음악적 신뢰도를 구축했었다. 그가 좋은 뮤지션이란 건 알만한 대중은 다 알았고 동료 뮤지션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앨범에서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늘 막혀 있었다.

그것을 단숨에 해결해 준 것이 라디오였고, 그것이 어떤 파급 효과가 있었는지 처음으로 증명한 결과가 4집 [A Night In Seoul](1999)이다. 이후 삽화집으로 유대감은 더욱 견고해졌고, 그와는 별개로 일렉트로니카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뮤지션으로서의 욕심도 알렸다. 그렇게 형성된 끈이 1990년대의 감성과 가장 높은 충성도보다 더 오래 지속됐던 건 우리 사이에서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나?

다음은 윤상이다. 최근 윤상이 일렉트니카 뮤지션들과 작업을 진행 중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2000년대에 따로 어떤 프로젝트 결과물을 발표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보여준 윤상의 행보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와도 같다. 대중적 이해도가 떨어지는 기계 중심의 음악과 월드 뮤직에 집중한 노력은 좀 더 심도 있게 조명되어야 한다. 윤상은 일찍부터 두 분야에 관심을 보였던 보기 드문 뮤지션이고, 대한민국 안에서는 선생으로 불릴 만한 위치임에도 뒤늦게 유학을 감행하는 등 늘 새로운 자극을 이끌어내며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 역시 뒤늦게 파생된 일렉트로니카 문화를 주도하는 후배 뮤지션들과의 작업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5집 [There Is A Man](2003)에서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bk! 외에도 프랙탈(Fractal), 카입(KAYIP) 등을 참여시켜 이끌어낸 결과는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소리의 질감을 다듬는 손길은 그 어떤 장인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출신임에도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뮤지션이 바로 윤상이다.

1990년대 뮤지션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

지금까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일곱 명의 뮤지션에 대해 살펴봤다. 물론 여기에는 없지만 윤종신이라던지 정재형 등 충분히 존중할 만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다른 뮤지션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포함시키지 못해 무척 유감스럽지만 1990년대가 전성기였다고 평가받는 뮤지션들의 오늘을 비추면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1980년대 음악이 좋았다. 아니다, 1990년대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정의가 아니라 보다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1990년대의 뮤지션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때 가장 훌륭한 결과물을 발표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절의 역사를 반복했던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끊기지 않는 긍정적 흐름을 조성시킬 수 있는 최초의 가능성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기 언급된 뮤지션들은 2010년대에도 그리고 2020년대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2000년대 와서 음악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화함에 따라 절망에 가까운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것이 종말로 이어지리라 믿지 않는다. 이 뮤지션들은 커다란 벽이 생길 때마다 그걸 스스로 넘어야 했던 환경을 보냈고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미리부터 포기하는 걸 택하는 대신 그 경험이 차후 후배들에게 어떻게 쓰일지를 떠올리면서 두근거리는 쪽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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